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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없는 한미일 공조 대북정책, 그 시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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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없는 한미일 공조 대북정책, 그 시작은

[제네바 합의 20주년 특별기획] 북핵, 역사에 길을 묻다(7)

필자는 앞선 글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임기 초반부터 강경하게 돌변한 배경과 원인을 북·미 관계를 중심으로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두 가지 이유를 덧붙일 수 있다. 하나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강경책 및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견제이다. 후술하겠지만, 2009년 4월 5일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는 한미 양국의 대북정책에서 MB 정부가 주도권을 잡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또 하나는 북한의 로켓 발사를 한-미-일 3각 동맹 구축의 기회로 인식한 미국 내 기류이다. 이 두 가지를 이해하는 것은 2009년 오바마의 대북정책이 본궤도에서 이탈한 것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한반도 정세 및 미래를 진단하는 데에도 대단히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북한의 로켓 발사는 MB 정부의 반전 카드

먼저 오바마 행정부 출범을 전후한 MB 정부의 태도부터 살펴보자. MB 정부는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부터 강한 견제구를 던지기 시작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외교 문서에 따르면, 오바마 당선 한 달 후인 2008년 12월 5일,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 비서관은 주한 미국대사관 측과 오찬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태효는 이렇게 강조했다.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는 북한에게 사용할 '광범위한 채찍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유인책은 북한의 행동을 변화시키는데 결코 유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MB 정부의 대외정책 실세였던 김태효는 2009년 1월 상순 워싱턴을 방문한 자리에서도 "미북 고위급 대화는 기본적으로 찬성하지만, 남북관계와 6자회담 모두 정체된 상황에서 대북특사를 너무 서두르면 북한에 좋지 않은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MB 정부의 입장은 오바마 대통령의 대선 공약 및 집권 초기의 움직임과 상당한 긴장관계를 형성했다. 1기 오바마 행정부의 백악관 아시아 담당 선임 보좌관을 지낸 제프리 베이더의 회고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일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접근은 오바마 행정부와 대북정책과 잘 어울릴 것으로 보이지 않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MB 정부는 그 해 1월부터 미국이 제공한 북한의 로켓 발사 준비 정보를 유출하면서 대북 강경 여론 조성을 도모했다. 당황한 미국 정부는 2월 9일 한국 정부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했다. 주한 미국대사관 측은 이용준 당시 외교부 차관보를 만나 정보 유출을 따져 물었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비밀 정보를 흘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북한 미사일 프로그램에 관한 위성사진으로부터 나온 정보를 한국 정부가 최근 유출한 것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전달한다"

이처럼 오바마 행정부 출범을 전후해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 간의 미묘한 갈등은 6자회담 문제로도 이어졌다. 미국은 검증 논란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의 2.13 및 10.3 합의에 따라 북한에 제공키로 한 20만 톤 상당의 에너지 지원을 완료했다. 또한 1월 13일 인준청문회에 나선 클린턴은 "북핵 문제를 우선순위로 다룰 것”이라며 “6자회담과 북미 직접 대화를 조화시켜 북핵 해결의 최선의 방도를 찾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MB 정부의 행보는 달랐다. 검증 문제를 이유로 북한에 제공키로 한 20만 톤 가운데 5만 5000톤의 잔여분 선적으로 계속 늦추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역시 납치 문제를 이유로 중요 한 방울도 북한에 보내지 않고 있었다. 이로 인해 2008년 12월에 결렬된 6자회담의 재개 가능성은 급격히 위축됐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미국의 대북정책 분위기는 2009년 3월 들어 강경한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북한의 로켓 발사가 초읽기에 들어간 4월 초에는 강경론이 득세했다. 이에 따라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 간의 엇박자는 빠르게 봉합되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4월 2일 런던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한미 두 정상은 당초 사진만 찍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바마는 "한미관계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며 마이크를 잡고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확고한 안보 공약과 북한의 로켓 발사 시 강력한 대응 의지를 밝혔다. 이를 두고 베이더는 이 말이 "이명박 대통령을 놀랍고 기쁘게 했다"고 전한다.

▲ 2009년 광명성 2호 발사 장면. ⓒ연합뉴스

이처럼 오바마의 대북정책을 걱정했던 MB 정부에게 북한의 로켓 발사 준비설은 반전 카드로 활용됐다. 먼저 MB 정부는 북한의 로켓 발사 시 유엔 안보리 회부 및 제재 부과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2009년 3월 5일 자 주한 미국대사관 외교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문서는 3월 2일에 서울에서 열린 21차 안보정책구상회의(SPI) 회의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전제국 국방부 정책실장은 한국 정부는 (북한의) 어떤 미사일이나 로켓 발사도 군사 도발로 간주한다고 말했다. 전 실장은 한미동맹이 정보와 감시 태세 강화, 로켓 발사 공동 모니터링, 합동 대응을 준비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전에 미국과 한국 정부는 가능하다면 유엔 안보리를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원태호 합참 전략기획부장은 같은 회의에서 "북한의 로켓 발사는 탄도미사일 프로그램과 관련된 기술적 요소 때문에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호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외교 전문에는 MB 정부가 오바마 행정부에게 대북 제재 강화를 주문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SPI 회의 참석차 방한한 데이비드 세드니 국방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만난 김성환 외교안보수석은 "미국 정부가 BDA(방코델타아시아)와 같은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북한이 여긴다면, 북한은 감히 추가적인 대포동 미사일 발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세드니가 "한국 정부가 대북 제재를 요청하는 것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리고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한 직후인 3월 11일 이렇게 말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인공위성이라 하더라도 유엔 안보리 결의 1718호 위반하는 것으로써, 동북아시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긴장을 조성하고 6자회담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자 워싱턴의 외로운 협상파인 보즈워스는 서울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북한의 움직임에 과잉 대응(overreact)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2009년 4월 5일 북한의 로켓 발사를 전후해 MB 정부가 오바마 행정부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북정책 결정 시 한국의 입장을 가장 중시하겠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약속과 맞물려 MB 정부가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만다.

"좋은 기회"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미국 내 강경파들은 북한의 로켓 발사를 한-미-일 3자 공조를 추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간주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기류는 오바마 행정부 출범 초기부터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 출범 직후 미국 국무부는 "북한에게 정책이 연속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백악관에 권유했었다.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 및 1단계 이행계획인 2.13 합의와 2단계 이행계획인 10.3 합의를 추진하고, 무엇보다도 부시 행정부 말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북미 직접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백악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이었던 베이더는 "우리는 한국, 일본, 이상적으로는 중국 및 러시아와 먼저 대북 공조 체계를 이루기 전에는 북한과 소통하지 않을 것"이라며 국무부의 권유를 사실상 묵살했다. 대북 대화파와 한미일 공조파 사이의 미묘한 갈등이 2009년 초부터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북한이 실제로 로켓 발사를 강행하자 미국의 대북정책은 '북한' 없는 정책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대북정책이라는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대북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한미일 공조에 두기로 한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풍경이 있다.

주일 미국대사관은 4월 13일 한국과 일본의 관료들과 학자들을 초청해 비공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평가한 미국 외교전문은 "최근 북한의 대포동 2호 탄도미사일 발사 전후의 전개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 정부가 보여준 긴밀한 협력은 (한일) 양국 사이의 장벽이 깨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한국 및 일본과 함께 3자 안보 및 국방 대화는 두 정부에 대한 미국의 면밀한 감독과 능동적 개입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2차 핵실험 한 달 후인 2009년 7월 16~17일 도쿄에서 열린 차관보급 한-미-일 3자 국방회담(U.S.-Japan-ROK Defense Trilateral Talks)에서 미국의 의도는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회담에서 마이클 쉬퍼(Michael Schiffer) 국방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는 북한의 로켓 발사 및 핵실험 강행으로 한반도 정세가 "변곡점"(inflection point, 變曲點)에 와 있다며, "미국의 대북정책은 동맹국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는데 맞춰져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변곡점이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갖춘 핵보유국이 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3각 동맹 구축을 본격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에드워드 라이스(Edward Rice) 주일미군 사령관은 "북한의 대포동 2호 발사에 대한 대처는 3자 협력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good chance)"라며, "3국 정부는 정보 공유, 합동 기획 및 작전을 포함한 정책 및 작전 협력을 위한 필요한 구조를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정보 공유가 미-일, 미-한 양자 사이에서 배타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MD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공유된 지식과 능력으로부터 나오는 중요한 장점들과 함께 3자 정보 공유가 이뤄지면 더욱 효과적인 MD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2012년 여름 MB 정부가 국회와 국민 몰래 추진했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의 애초 의도가 MD를 고리로 한-미-일 3각 동맹을 구축하려는데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리하자면 2009년 4월 북한의 로켓 발사와 한-미-일의 강경 대응은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있어서 '전환기적 사건'(transitional event)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포용'에서 '봉쇄'로 전환된 결정적 순간이었다. 또한 한미 대북정책 공조체계에서 MB 정부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북한이 한미 양국의 대북적대시 정책을 이유로 본격적인 핵 능력 강화로 나선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장거리 로켓 발사→6자회담 거부 및 2차 핵실험→플루토늄 재처리 재개 및 우라늄 농축 활동 발표 등으로 이어진 북한의 숨가쁜 행보는 북한의 핵문제 해결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동북아 차원에서도 한-미-일은 MD를 고리로 3자 간 군사협력을 크게 강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을 야기하며 동북아에 또 다시 냉전의 먹구름을 드리우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제네바 합의 20주년 특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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