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14강, <송년의 길>로 백제의 멸망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던 사비백제의 도읍지 부여(扶餘)고을을 찾아갑니다. 부여는 높은 산이 거의 없고 낮은 구릉성 언덕들이 산재해 있으며, 부여를 휘감아 흐르는 백마강(白馬江)은 전설에 의하면 용이 되어 백마강에 숨어있던 무왕(武王)이 당(唐)나라 군인들을 괴롭히자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조룡대 바위에서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4강은 12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00)→부여IC→부소산성(부여동헌/부여객사/반월루/낙화암/백화정/사자루/고란사/영일루/삼충사)→정림사지(5층석탑/석불좌상)→점심식사 겸 뒤풀이(14:00)→궁남지→수북정/자온대→왕흥사지-홍산읍치구역(객사/동헌/향교)→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4강 답사지인 부여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부여 진산은 부소산
부여(扶餘)는 높은 산이 거의 없고 낮은 구릉성(丘陵性) 언덕들이 산재해 있는데 부여의 진산(鎭山)은 왕궁(王宮)이 기대고 있는 부소산(扶蘇山)입니다. 남쪽으로는 금성산(錦城山)이, 동쪽으로는 왕릉(王陵)이 모여 있는 능산리의 청마산(靑馬山)이, 서쪽으로는 백마강 건너 부산(浮山)이, 북쪽으로는 왕흥사지(王興寺址)가 있는 백마강 건너 울성산(蔚城山)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부여를 휘감아 흐르는 백마강(白馬江)은 옛 문헌에는 사비강(泗泌江), 사비하(泗泌河), 백강(白江), 백촌강(白村江)이라 하였습니다. 금강(錦江)의 한 부분으로, 부소산 건너 동편 천정대 앞 범바위에서 부여읍의 남쪽 현북리의 파진산(破陣山)까지 약 16km 정도를 일컫는 강 이름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용이 되어 백마강에 숨어있던 무왕(武王)이 당(唐)나라 군인들을 괴롭히자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조룡대 바위에서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고 해서 백마강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부소산(扶蘇山)은 백마강 변에 자리잡은 106m 높이의 부여의 진산(鎭山)으로, 동쪽의 봉우리를 영월대(迎月臺)라 하고 서쪽의 봉우리를 송월대(送月臺)라 이릅니다. 백제 때 도읍을 웅진(熊津)에서 이곳 사비(泗?)로 옮겼을 때 궁궐을 부소산 자락에 지었으며, 언제부터 부소산으로 불렸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소나무를 뜻하는 ‘풋소’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부소’라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둘레 2.2㎞에 이르는 부소산성(扶蘇山城)이 있고 성내에는 서복사지(西覆寺址), 영월대지(迎月臺址), 영일루(迎日樓), 군창지(軍倉址), 송월대지(送月臺址), 사자루, 낙화암(落花岩), 백화정(百花亭), 고란사(皐蘭寺), 삼충사(三忠祠), 궁녀사(宮女祠) 등 많은 사적지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백제왕들은 영월대에서 떠오르는 달을 맞았고 송월대에서 지는 달을 보았는데, 특히 영월대는 해를 맞는 곳이기도 하여 영일대(迎日臺)라고도 하였습니다.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 정몽화가 지은 집홍정(集鴻亭)이라는 홍산 관아문루(官衙門樓)를 이곳에 옮겨 ‘영일루(迎日樓)’라 개칭하여 부르고 있으며, 여기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영월대지 부근에는 백제 시대에 군량을 비축하였던 군창지가 있어서 지금도 1,300여 년 전의 탄화된 곡식의 알갱이가 나옵니다.
백제의 삼신산(三神山), 부산(浮山)·오산(烏山)·일산(日山)
사자루는 부소산 서쪽 봉우리 정상, 곧 달을 보내서 ‘송월대(送月臺)’라 불리는 봉우리에 있습니다. 이곳은 해발 106m로 부소산에서는 가장 높아서 동으로는 계룡산, 서로는 구룡평야, 남으로는 성흥산성, 북으로 울성산성과 증산성 등이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아 부소산성의 서쪽 장대(將臺)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자루는 1919년 당시 부여군수인 김창수가 주도하여 임천 문루인 배산루(背山樓)를 옮겨와 지었습니다.
낙화암은 부소산 북쪽의 절벽으로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 궁녀가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고사로 유명합니다. 낙화암 아래에 있는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사찰 건물은 은산(恩山) 승각사(乘角寺)를 이건(移建)한 것입니다. 절 뒤편의 암벽에서 솟아나는 약수는 백제왕들의 어용수(御用水)로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오며 약수터 주변의 고란초는 그늘진 바위틈에 자생하는 희귀식물입니다.
낙화암 아래의 백마강 물굽이에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용을 낚았다는 설화로 유명한 조룡대(釣龍臺)가 있으며 낙화암 위쪽에 있는 백화정(百花亭)은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지은 정자인데 ‘백화정’이란 이름은 소동파(蘇東坡)의 시에서 따온 것입니다.
부소산의 남쪽에 있는 삼충사(三忠祠)는 백제의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祠堂)입니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곡기를 끊어 죽었고,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오자 의자왕에게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간곡하게 당부한 신하이며 계백은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입니다.
백마강 건너편 서쪽에 있는 부산(浮山)은 오산(烏山), 일산(日山)과 함께 백제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입니다. 지금은 백마강변에 우뚝 솟아있으나 원래는 백마강의 상류인 충북 청주골에 있었던 것으로, 성왕(聖王)이 도읍을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泌)로 옮겨가자 웅진 곰나루의 깊은 물속에 64년간이나 살고 있던 용들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심술을 부려서 몇 달간 계속 비를 내리게 하니 불어난 물에 그 산이 떠내려와 부소산성 건너편 호암리(虎岩里) 앞에서 멈췄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설이 전해지는 까닭은 부산(浮山)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부여의 중심에 위치한 금성산(錦城山)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는 오산(烏山), 서쪽에는 부산이 같은 거리에 일직선으로 서 있어 마치 불상이 좌우에 협시불(挾侍佛)을 거느린 격이 되어 잘 어울리는 풍수(風水)가 되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울성산(蔚城山)은 부소산에서 백마강 건너 북쪽에 있으며 이곳에는 법왕(法王) 2년(600)에 창건된 국찰(國刹)인 왕흥사(王興寺)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백제 임금이 왕흥사에 예불(禮佛)을 드리러 갈 때는 먼저 언덕의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하여 절을 하면 그 바위가 스스로 따뜻해지므로 자온대(自溫臺)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사비백제의 도성(都城)
부여는 사비백제의 도읍지에 걸맞게 도성(都城)을 비롯하여 도성을 방비하기 위한 많은 산성(山城)들이 구축되었습니다. 사비백제의 도성은 백마강 남쪽 부소산성과 그곳과 연결되는 나성(羅城)으로 둘러싸였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부소산성이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릅니다.
도성 안에는 궁궐과 관부(官府)가 세워졌고 그 터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로 추정되며 도성은 상부, 중부, 하부, 전부, 후부의 5부(部)로 나뉘었습니다. 각 부에는 500명의 군대가 있었으며 5부는 다시 5항(巷)으로 나뉘었고 성 안에는 1만 가구가 살았다고 합니다.
부소산성은 웅진(公州)에서 사비(扶餘)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이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 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축, 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것이긴 하나 연차적인 조사에 의하여 성벽과 치성 및 특수한 시설과 내부의 여러 가지 양상이 차례로 밝혀져 우리나라 고대 축성기술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집터가 발견되었고 성안에는 동, 서, 남문지가 있었으며, 북쪽의 백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北門)과 수구(水口)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여나성(扶餘羅城)은 왕성 주변의 시가지를 에워싼 토축(土築)의 외성(外城)으로 도성을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평양나성(平壤羅城)과 함께 가장 오래된 나성의 하나로서 성 안에는 사방에 문지(門址)가 있으며 축성연대는 성왕대를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성벽은 부소산성의 동문 터 부근을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 있는 청산성(靑山城)을 거쳐 남쪽으로 석목리 필서봉(筆書峰) 상봉을 지나 염창리 뒷산의 봉우리를 거쳐 백마강변까지 토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합니다. 현재는 청산성 동쪽으로 약 200m와 석목리에서 동문다리까지, 그리고 필서봉부터 염창리까지 약간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이곳에는 동쪽으로 논산(論山)과 왕래하는 동문지와 공주(公州)로 통하는 동북문지가 있습니다.
서쪽 나성은 부소산성 서문 바깥 지점을 기점으로 하여 현재 유스호스텔을 거쳐 관북리, 구교리, 유수지(遊水池), 동남리, 군수리, 성말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동쪽 나성문지는 구아리로 통하는 서북문지와 장성백이 남쪽에서 규암으로 통하는 서문지가 있으며 남쪽 나성은 동리, 중리, 당리의 뒷산에 연결하여 축조하였으며 주초석과 문초석이 남아 있습니다.
부여를 지킨 산성들
청산성(靑山城)은 부소산 동쪽 500m 지점의 낮은 구릉 위에 있는 토축 산성입니다. 백제 무왕 6년(605)에 사비에서 웅진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기 위하여 나성과 함께 쌓았으며 하나의 독립된 산성이라기보다는 부소산성과 연결하여 쌓았던 보조 산성입니다. 주민들은 지금도 풀뫼, 뿔뫼라고 부르고 있어 이것을 한자로 청산성(靑山城), 각산성(角山城)으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성흥산성(聖興山城)은 백제 때 쌓은 산성 중에 연대와 옛 지명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입니다. 남, 서, 북문지와 군창지, 세 곳의 우물터 및 토축 보루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501년(동성왕 23) 8월에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가 축조하였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기에 가림성(加林城)이라고도 합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 죽었다고 전해지며, 또한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는데 663년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유인궤(劉仁軌)가 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다고 한 것으로 보아 난공불락의 요새지였음을 짐작케 합니다. 고려(高麗) 초에는 유금필(庾黔弼)이 견훤(甄萱)과 대적하다가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합니다.
청마산성(靑馬山城)은 나성의 바깥을 지키는 산성으로, 서쪽의 성흥산성(聖興山城), 북쪽의 증산성(甑山城), 남쪽의 석성산성(石城山城)과 함께 수도를 보호하기 위한 외곽 방어시설이었습니다. 성문이 적은 백제산성의 특징에 따라 남문이 없으며 시야가 트인 곳에 망대 터로 여겨지는 흔적이 보입니다. 성내에는 속칭 각씨우물이라 전해지는 우물터와 경룡사지(驚龍寺址), 의열사지(義烈寺址)가 남아 있으며 성 남쪽에는 백제 왕릉인 능산리 백제고분군이 있습니다.
석성산성(石城山城)은 연산(連山)의 황산성(黃山城), 노성(魯城)의 노성산성(魯城山城), 백마강(白馬江) 건너의 성흥산성(聖興山城), 배후에 있는 금성산성(錦城山城)과 연결되는 수도의 남쪽 외곽을 방비하기 위해 축조되었던 성입니다. 안쪽에 성을 세운 후, 다시 성 밖에 2개의 골짜기를 따라 성을 쌓았는데 현재는 성문터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게 하던 수구문, 그리고 우물터와 건물터들이 남아있습니다.
울성산성(蔚城山城)은 왕흥사지(王興寺址) 뒷산 정상에 있는 소규모의 테뫼식 토축산성(土築山城)입니다.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부소산성과 마주보고 있으며 높이 113m에 둘레는 약 350m로 현재 북쪽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습니다. 남쪽에는 성벽을 축조하지 않고 암벽으로 된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습니다.
증산성(甑山城)은 흰 돌을 사용하여 쌓은 성이 마치 시루를 올려놓고 시루테를 바른듯하다고 시루메산성이라고도 부릅니다. 서쪽, 남쪽, 북쪽에 각각 문이 있던 흔적이 남아있고 성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지만 다른 성에 비하면 정교하지 못하며 은산면의 이중산성, 서쪽의 옥녀봉산성과 서로 바라보면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태봉산성(胎峰山城)은 90m의 상단부 능선에 축조된 토축산성입니다. 둘레는 430m이며 성벽의 기단에만 돌을 가지런히 깔고 그 내부와 윗부분은 모두 흙을 쌓아올렸으며 현재 성벽의 윤곽은 뚜렷하지 않습니다. 발견되는 백제 토기들을 통해 볼 때 본격적으로 성의 기능을 한 때는 백제의 사비 천도 이후일 가능성이 높으며, 고려 후기 최영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찌른 홍산대첩(鴻山大捷)이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부여읍, 홍산면, 석성면에 남아있는 읍치구역
부여에는 읍치구역(邑治區域)이 부여읍, 홍산면, 석성면에 남아 있습니다. 부여동헌(東軒)은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아(官衙) 건물입니다. 고종 6년(1869)에 지었는데 앞면 5칸, 옆면 2칸의 규모로서 왼쪽 3칸은 대청으로 판벽을 치고 문을 달았고 오른쪽 2칸은 온돌을 놓고 앞쪽에는 툇마루를 놓았으며 ‘초연당(超然堂)’이라는 현판이 결려 있으나 ‘제민헌(濟民軒)’이라고도 부릅니다.
객사(客舍)는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는 한편 왕명을 받들고 내려오는 중앙관리를 유숙시키던 곳이었습니다. 마루로 된 정당(正堂)과 온돌로 된 익실(翼室)을 두었으며 정당의 대청에는 궐패를 모셨고 익실에는 온돌방을 들였습니다. 부여객사는 ‘부풍관’이라고 하나 지금은 ‘백제관(百濟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현감의 처소인 내동헌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3칸의 대청과 그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들였는데 백제시대의 주춧돌과 기단석을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으며 정원에는 지금도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여향교(扶餘鄕校)는 조선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원래 부여읍 구교리의 서쪽 기슭에 세웠던 것을 18세기 중엽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는데, 건물의 전체적인 배치는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이 앞쪽에 있고,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뒤쪽에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홍산객사(鴻山客舍)는 조선 헌종 2년(1836) 세웠는데 ‘비홍관(飛鴻館)’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전해지고 있는 <객사기(客舍記)>에 따르면 인부 4,000여 명에 목수 20여 명이 5개월에 걸쳐 완성했으며 민간인의 기부금과 공금(公金)으로 공사비를 충당하였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정권을 잡은 후 관청의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 걸쳐 관청건물을 정비하였는데 홍산동헌은 그 일환으로 고종 8년(1871) 정기화 군수가 세웠으며 해방 후 홍산지서로 사용하다가 198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하였습니다.
홍산형방청(刑房廳)은 조선시대 홍산현의 관아 건물 중 하나입니다. 고종(高宗) 8년(1871)에 개건(改建)한 민가풍의 목조 건물인데 10칸 크기의 ㄷ자형 동향집으로 원래 중앙 대청과 남쪽 딸림채는 마루를 깔았으며 당시의 현액명은 ‘비홍추청(飛鴻秋廳)’이었습니다.
홍산향교는 조선 중종 12년(1517)에 처음 세운 것으로 선조 24년(1591)과 광해군 2년(1610)에 고쳐지었다가 인조 21년(1643)에 향교의 위치가 너무 높아 평지인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습니다. 건물 배치는 앞쪽에 명륜당이, 뒤쪽에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석성동헌(石城東軒)은 인조(仁祖) 6년(1628)에 세워졌는데 석성은 본래 백제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으나 고려 초에 석성으로 지명이 바뀌었고 조선 태종 15년(1415)에 현(縣)이 설치되고 그 후 군(郡)으로 되었습니다. 석성향교는 조선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인조 1년(1623)에 다시 세웠고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랐습니다.
많은 서원이 남아 있는 곳
부여에는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書院)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동곡서원(東谷書院)은 고려 공민왕 때 회양(淮陽) 부사(府使)였던 조신(趙愼) 선생을 제향하는, 조선 철종 때 세운 서원입니다. 선생은 고려 말 국운이 기울자 임천(林川)의 덕림(德林)에 은거하였으며 박팽년(朴彭年), 유성원(柳誠源) 등의 문하생을 길러냈고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와도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태종의 어릴 때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퇴수서원(退修書院)은 영조 33년(1757)에 풍양 조씨 3인(조박, 조견소, 조성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조박은 선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당상관 중에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조견소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금구현령을 지냈고 조성복은 대사간을 지냈으나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칠산서원(七山書院)은 예(禮)에 관해 정통한 학자로서 김장생(金長生)의 제자이며 충청도 유림의 오현 중 한 사람인 유계(兪棨)를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숙종 13년(1687)에 세워 숙종 23년(1697)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습니다.
창강서원(滄江書院)은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낸 추포(秋浦) 황신(黃愼)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선생은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죽은 뒤에 우의정의 직함도 받았는데 인조 7년(1629)에 세우고 숙종 8년(1682)에 사액서원이 되었습니다.
간곡서원(艮谷書院)은 인조 24년(1646)에 노성현감으로 재직 시 토호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유동수(柳東秀)를 배향하는 서원입니다. 1730년(영조 6) 양호사림(兩湖士林)이 ‘향현사’로 창건하여 그로부터 2년 뒤 사당의 이름을 '창의사'라 불리다가 1740년(영조 16)에 강학(講學)과 장수(藏守)의 장소로 간곡서원을 세웠습니다.
창열사(彰烈祠)는 삼학사(三學士)인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 주전파로서,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의 항복을 하게 되자 이들은 청나라에 잡혀갔습니다. 청 태종이 직접 이들을 심문하며 설득과 회유를 하였으나 심한 고문을 견디면서 끝까지 척화를 주장하다가 결국 중국 심양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사당은 숙종 43년(1717)에 세웠고 경종 1년(1721)에는 ‘창열사’란 현판을 임금이 내렸습니다.
청일사(淸逸祠)는 1621년(광해군 13)에 홍산현감 심완직(沈完直)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말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감한 무량사(無量寺) 옆에 작은 누각을 건립하고 제사지내던 것을 홍산현감 권완이 현재의 홍산향교 근처로 옮긴 것입니다. 1704년(숙종 30)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처음에는 김시습만 배향하다가 단종의 폐위를 보고 홍산으로 내려와 김시습과 절친한 사이가 된 김효종(金孝宗. 1414~1493)도 함께 배향하였습니다.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청일사기(淸逸祠記)>에 따르면, 김시습은 이미 중이 되었는데 유교(儒敎)의 예로 받드는 것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송시열은 김시습의 행적은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쉽게 이야기할 수 없으니 삭발, 변형한 것이 그의 청덕(淸德)에 해로울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의열사(義烈祠)는 백제의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과 고려 후기의 충신 이존오(李存吾)를 위해 부여현감 홍가신(洪可臣)이 세운 사당입니다. 선조 때 선비 정택뢰, 인조 때 문신 황일호를 추가로 모셔 현재는 6명을 배향하고 있으며, 조선 선조 8년(1575)에 처음 지었는데 원래는 용정리 망월산(望月山)에 있었으나 1971년 지금의 남령공원으로 이건하였습니다.
도강영당(道江影堂)은 홍가신(洪可臣), 허목(許穆), 채제공(蔡濟恭)의 영정을 봉안한 곳입니다. 홍가신은 선조 37년(1604)에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이듬해 영원군에 봉해졌으며, 허목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지냈는데 그림, 글씨, 문장에도 능했고 특히 전서(篆書)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채제공은 영조의 세자 폐위 문제를 죽음을 무릅쓰고 막으며 영조의 신임을 얻게 되어 그 후 병조, 예조, 호조판서를 거쳐 영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정조 때는 수원화성 건설에도 참여하였던 분입니다. 이 건물은 원래 조선 말 부여현(扶餘縣)의 내아건물로서 해방 후 귀속재산인 가옥을 1971년 신축한 것입니다.
절들은 사라지고 폐사지에 탑들만
부여는 왕도답게 크고 작은 절들이 많이 세워졌으나 나당연합군에게 패하고 도성이 화염에 싸여 남아 있는 사찰이 거의 없고 폐사지에 탑들만 을씨년스럽게 서 있습니다.
정림사지(定林寺址)는 1980년 발굴조사를 통하여 금당지(金堂址), 중문지(中門址), 강당지(講堂址), 회랑지(廻廊址) 등이 확인되었고 또한 석탑 기초의 판축기법(版築技法), 다량의 와당과 격목와(格木瓦) 등이 발견되어서 백제시대의 창건 사찰임이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으로, 남으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주위를 회랑으로 구획하였으나 특이하게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복도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있습니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절 앞의 연못이 정비되어 있고, 백제 때에 세워진 5층석탑(국보 제9호)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이 절터에 남아 있으며 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 백제 벼루, 토기 그리고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기록을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平濟塔)’이라고 잘못 불리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는데,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정림사지 석불좌상은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제9호)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이며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됩니다.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이며 불신은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어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어깨가 밋밋하게 내려와 왜소한 몸집을 보여주고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비로자나불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한데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8각 받침돌은 각 면에 큼직한 눈 모양을 새겼고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장갑,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14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사전예약 관계상 12월 23일까지 참가접수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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