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올바른(正思) 사람이 많고 그런 사람이 제 대접을 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생각이 올바른 사람은 바른 말(正言)을 하고 바른 글(正文)을 쓴다. 정사(政事)를 돌보는 사람, 즉 정치인은 정사, 정언, 정문을 하지 않고는 훌륭한 정치인이 될 수 없다. 건강사회 칼럼에 뚱딴지같이 웬 정치 이야기냐고? 앞서 거창한(?)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바로 건강 제도와 관련해 어느 정치인 이야기를 해보기 위해서다. 그냥 일개 정치인이 아닌 대한민국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의장은 과거 부산에서 중소병원을 운영했던 의사 출신 정의화 의원이다. 그가 지난 13일 열린 제5회 병원경영 국제학술대회에서 한 축사가 의약계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그는 축사에서 우리 국민들이 매우 민감하게 여기는 역사성을 지닌 의약분업 문제를 노골적으로 건드렸다. "의약분업이 더 이상 이렇게 가면 안 된다. 일본식이라도 선택적 의약분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의약전문지를 중심으로 널리 보도되자 대한약사회가 발끈하고 나선 것은 물론 대다수 의약전문지가 기사 또는 기자칼럼 등을 통해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약사회는 정 의장 발언 다음 날 즉각 성명을 내어 관련 발언을 취소하고 국회의장직에서 사퇴할 것을 촉구했다. 현직 국회의장이 공식 석상에서 현행 의약분업을 뿌리째 뒤흔드는 일본식 선택적 의약분업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무책임한 발언을 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언행이라고 꼬집었다.
일본식 선택분업의 폐해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일찍이 의약분업을 도입할 당시인 2000년도 이전부터 국회, 정부, 시민단체, 보건의료 관계자 등이 모두 잘 알고 있고, 일본조차도 자기 나라의 선택분업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완전 의약분업을 시행하기 위해 원외처방전 발행 시 수가를 인상하는 등의 정책적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아는 보건복지위원을 지낸 국회의장이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뭔가 감춰진 의도가 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와 관련해 한 의약전문지 기자는 칼럼에서 "국회의장의 발언이라기보다 부산에서 병원(김원묵 기념 봉생병원)을 운영하던 경영자의 발언처럼 지극히 단편적이다"라고 꼬집었다.
약사회는 성명 발표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대표단을 국회의장실로 보내 정의화 의장을 면담하려 했으나 불발에 그치고 대신 비서실장을 만나 항의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다.
일본식 선택분업, 의사가 꿩 먹고 알까지 먹겠다는 선언
일본식 선택분업은 환자가 병의원에서 약을 조제하고 싶으면 병의원에서 하고, 병의원 밖 외부 약국에서 조제하고 싶으면 약국에서 조제하는 것을 선택토록 하는 형태의 방임형 의약분업이다. 겉으로는 환자가 알아서 선택하도록 한다고 하지만 실은 병의원에서 진료하고, 처방하고, 조제하는, 이른바 의(치료)와 약을 모두 독식하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꿩 먹고 알까지 먹겠다는 선언이다. 만약 이런 제도가 실제로 도입되면 2000년 의사 파업 못지않은 약사 파업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 게 불 보듯 뻔하다.
왜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보건의료정책과 관련해 전국 규모의 장기 의사 파업이라는 사상 초유의 대 홍역을 치르며 도입·시행되고 있는 의약분업에 대수술을 하려는 발언을 했을까. 부산대 의대 출신의 그는 2000년 의약분업 당시 보건복지위원으로 있었고 15대 때부터 부산 중구·동구에서 내리 5선을 하면서 국회의장에까지 오른 정치인이어서 자신의 발언이 가져올 파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의 발언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서 의약분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자는 목소리가 거의 없는 가운데 나와 뜬금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미 의약분업이 시행된 지 햇수로 15년이 돼 거꾸로 돌릴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우리 사회에서 정착된 것임에도 이를 건드리려 한 것은 다른 숨은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의혹의 눈길이 그에게 쏠리고 있다. 더군다나 정 의장은 의약분업 시행 당시 보건복지위원으로 있으면서 제도가 원활하게 시행될 수 있도록 약사법 개정안을 제출하는 등의 노력을 한 바 있기도 하다.
따라서 정 의장이 발언한 곳이 중소병원 경영자들이 대거 참석하는 병원경영 학술대회였고 최근 중소병원들이 대형 대학병원과 개원의원 사이에 끼어 날이 갈수록 경영이 어려지고 있는 곳이 많아지자 핵폭탄급에 해당하는 의약분업 문제를 끄집어내 관심을 끈 다음 중소병원에 유리한 정책이나 제도를 반대급부로 얻어내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여기는 분석이 매우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국회의장, 특정 집단이나 계층 대변하는 자리 아냐
만약 이런 분석이 맞으면 그는 국회의장이 아니라 중소병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서 축사를 한 셈이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중소병원의 처지를 대변하고 싶다면(중소병원 대변 자체가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국회의장 직을 내려놓고 다시 병원 경영자로 돌아오는 것이 올바른 처신이다. 아니면 중소병원협회장을 맡아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이 훨씬 모양새가 낫다. 국회의장은 일개 국회의원이 아니다. 대한민국 입법부를 대표하는 자리다. 특정집단이나 특정계층의 이익이나 처지를 대변하라고 국회의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의 발언 배경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지 않는 한 그 참뜻을 알기는 어렵지만, 일본식 선택분업을 하면 가장 유리한 곳이 중소병원이므로 결국에는 약을 둘러싼 파이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발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사실 2000년 의약분업을 둘러싼 의사파업과 의사와 약사 간 갈등도 그 이면에는 누가 환자의 호주머니 돈을 더 많이 가져갈 것인가의 한판 승부였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물론 수면 위에서는 국민건강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말이다.
바둑에서 대국자가 조급하고 편협한 생각을 하면 흔히들 말하는 '덜컥수'를 두게 된다고 한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이런 수를 둔 게 아닌가 싶다. 중소병원 경영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선택분업이라는 카드를 띄워보았다면 그것은 무리수를 둔 것이다. 차라리 정직하게 중소병원 경영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각적인 방법 모색을 이야기했더라면 언론의 공감도 얻고 약사들의 반발도 사지 않았으리라.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정치인이든, 그 누구든 세상풍파를 많이 겪고 한 살 더 나이가 먹어 갈수록 지혜로운 언행을 해야 존경을 받는다. 그런 사회일수록 더 건강해진다. 오로지 자기들 분파 속에 파묻혀 분파의 이익밖에 모르는 사람은 사회를 쪼개고 시끄럽게 만들며 주변을 불안하게 한다. 정 의장의 선택분업 발언이 실제 국가 보건의료정책에 끼칠 영향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본다. 발언에 올바름(正)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잉 대응할 가치조차 없다. 다만 우리가 교훈으로 얻을 것은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늘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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