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노약자석에 젊은이 셋이 나란히 앉아서 낄낄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한 노인이 들어오더니 이들에게 소리쳤다. "이봐, 여기는 노약자석이야. 일어들 나라구." 그 젊은이들은 노인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노인은 목소리를 더 높였다. 그런데도 젊은이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태도로 보아 외국인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이번에는 그 노인이 노약자석 옆 벽을 가리키면서 "이 사람들아! 여기 노약자석이라고 쓰인 게 안보여? 엉? 빨리 일어나지 못해!" 호통을 치자 그제 서야 젊은이들은 머쓱해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들의 어깨너머로 중국말이 들려왔다. 외국인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들에게 굳이 그렇게 화를 버럭 냈어야 했을까. 지하철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 짜증 내고, 불평하고, 화를 내는 노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얼마 전 국제노인인권단체('헬프에이지 인터내셔널')가 세계 노인 복지 지수를 발표하였는데, 조사 대상 96개국 중에서 지상 최고 ‘노인 천국’은 노르웨이였고 스웨덴, 스위스, 캐나다, 독일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우리나라는 50위로 필리핀(44위), 베트남(45위), 중국(48위)에도 뒤졌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1인당 GDP) 수준은 이 주변 국가들보다 4~13배 더 높다. 돈만 보면 우리 국민은 이 주변 나라들의 국민들보다 훨씬 더 행복해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국제노인인권단체의 보고서에 의하면, 우선 우리나라 노인들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 연금 수금율에서 우리나라 노인은 96개국들 중에서 바닥권이었고 특히 노인의 소득 수준이 중‧장년층에 비해 크게 뒤진다. 보고서는 "한국은 상당한 수준의 경제 성장을 이뤘지만, 노인 47.2%가 중간 소득의 반도 안 되는 수입으로 생활 한다"고 했다. 순전히 육체적으로만 본다면 우리나라 노인의 건강 지수는 10위권 안에 들지만 정신적‧심리적 측면을 고려하면 42위로 곤두박질친다. 그만큼 우리나라 노인들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불행하다. 보고서에 의하면, 50세 이상 우리나라 노인들 중에서 '내 인생이 의미 있다'고 응답하는 비율이 35~49세 연령층에서 그렇게 응답하는 비율의 70%에 불과했는데, 이 비율은 아시아에서 꼴찌라고 한다. 싱가포르와 같은 국가에서는 오히려 노년층에서 '인생이 의미 있다'고 답한 비율이 더 높았다.
이런 조사 결과는 그 동안 국내에서 실시된 조사 결과와 일맥상통한다. 연령별 행복지수를 조사해본 여러 연구들에 의하면, 선진국의 경우 청소년 시절에는 행복지수가 높고, 나이가 들면서 행복지수가 낮아지다가 중년기에 가장 낮고, 노년기에 접어들어 행복지수가 다시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대체로 선진국의 경우 연령별 행복 지수는 'U자 형 곡선'을 그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그 반대다. 청소년 시절에는 행복지수가 아주 낮다. 입시 지옥, 취업 걱정, 세대 갈등 등으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고, 직장을 얻고, 가정을 꾸미면서 행복지수는 차츰 올라가서 중년기에 최고에 이른다. 하지만, 은퇴하고 노년기에 접어들면 행복지수는 하락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 연령별 행복지수는 선진국과는 달리 '엎어진 U자 형 곡선'을 그린다. 청소년기와 노년기에 자살률이 유난히 높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국제노인인권단체 보고서에서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부분은, 많은 우리나라 노인들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학자들은 삶의 의미와 행복을 약간 다르게 보는 것 같다. 예를 들어보자. 자녀를 둔 부부보다 자녀를 두지 않은 부부가 더 행복하다는 것이 많은 조사 결과에서 밝혀졌다. 그렇다면, 자녀는 부모의 행복을 갉아먹는 애물단지인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만일 다시 태어나 같은 삶을 산다고 했을 때에도 자식을 가지겠느냐고 물으면 자녀를 가졌던 부부들 대부분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한다. 많은 부모들이 이 세상에서 받은 최고의 선물이 자녀라고 말한다. 자녀를 기르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도 자녀를 가지지 않은 부모들은 자녀 없는 것에 쓸쓸함을 느낀다. 물론, 행복하면 삶이 더 의미 있게 느껴지고, 삶이 의미 있게 느껴지면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행복과 삶의 의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선택한다고 한다. 그만큼 삶의 의미가 중요하다. 그러나 많은 우리나라 노인들이 행복하지도 못하면서 삶의 의미도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행복에 관한 이런 일련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청소년과 노인들이다. 이들은 지금 잔뜩 화가 나 있다. 취업도 잘 안 되고, 결혼하기도 어렵고, 미래도 불투명하니 젊은이들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노인들은 어떤가? 그들은 과거 어른으로서 대접도 잘 받았고, 무엇보다도 아프리카 가나보다도 못한, 지지리 가난한 후진국을 선진국 문턱까지 끌어 올린 주역들이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허나, 막상 일선에서 물러나고 보니 할 일도 별로 없고,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쌓아놓은 돈도 없다. 집에 있어봐야 어른으로서의 권위도 서지 않고, 밖에 나가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화딱지만 난다. 화딱지 나는 사람은 화풀이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단식하는 곳에 일베 회원들이 일부러 찾아가서 피자를 돌려 먹는다거나 보수 꼴통 노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들을 무조건 빨갱이로 몰거나 '종북몰이'를 하는 것도 화풀이의 한 방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화가 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공감할 능력을 가지지 못하며, 나와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을 용납할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에 입각해서 지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에 드느냐 아니냐에 입각해서 지식을 받아들인다. 특히, 화가 난 사람들은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 특정 정치인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노인에게는 그가 진짜 빨갱이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가 빨갱이라고 생각하면 속이 편하고 그를 빨갱이로 매도하면 속이 후련해진다. 어느 학자가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싸가지 없는 사람은 보수 진영에도 아주 많은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의 골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다.
의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 사이의 골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를 완화하는 가장 근원적인 방법은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불행한 사람들보다는 행복한 사람들이 남을 더 잘 배려하며, 남을 더 잘 도와주고, 남에게 더 관대하다. 이런 점에서 정부의 책임이 매우 크다. 하지만, 지금의 정부는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기는커녕 더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행복추진위원회까지 만들어서 표를 긁어모아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제까지의 정치 행태를 보면 이 정부의 집권 기간에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가 높아지기는 틀린 것 같다. 세월호특별법 입법과정에서 보았듯이 사회적 갈등을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키우고 있고, 국민의 아픈 마음을 보듬기는커녕 덧나게 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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