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에 열정을 식은 교사가 있다. ‘이런 상태로 아이들 앞에 서느니, 차라리 교직을 떠나자.’ 그런데 그조차도 마음대로 안 된다. 교육청에 낸 명예퇴직 신청은 반려됐다. 교육청에 퇴직금 줄 돈이 없어서다. 학교를 떠나고 싶은 교사는 남고, 교사가 되고 싶은 청년은 노량진 수험가를 떠돈다. 얼핏 관계없어 보이지만, 모두 ‘재정’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의 교육복지 공약 가운데 상당수가 지역 교육청 예산으로 진행된다. 원래는 중앙정부 예산으로 감당하겠다는 공약이었지만, 중앙정부 재정이 부족했다. 결국 부담이 지역 교육청에 넘어갔다. 그 바람에 교육청은 교사들의 퇴직금을 주지 못한다. 젊은 교사 충원은 그만큼 어려워진다.
담배가 해롭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일용직 노동자가 있다. 그에게 담뱃세 인상 소식은 다시 담배를 물게 만드는 사건이다. 금연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는 9억 원대 주택 소유자가 내는 재산세 수준의 세금을 담뱃세로 내게 된다. 역시 ‘재정’ 문제다.
생산 및 소비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금을 낸다. 그렇게 꾸린 재정으로 정부는 다양한 일을 한다. 정부가 힘을 쓰는 영역에 살고 있는 이상, ‘재정’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담뱃세 인상을 계기로, ‘재정’이 화두가 됐다. 담뱃세 인상이 꼭 국민 건강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안다.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 최근의 정책 흐름은 대부분 ‘재정 확충’을 가리킨다. 정부가 ‘경기 부양’에 목을 매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재정’ 때문이다. 경기 부양에 성공하면, 세율을 높이지 않아도, 세수가 늘어난다. 로또 판매점이 늘어난 것, 학교 근처에도 화상경마장이 들어선 것. 모두 ‘재정’과 관계가 있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복지 수요 자연 증가, 이명박 정부의 부자 감세 및 4대강 사업 후유증 등이 정부 재정 적자로 이어졌다. 세율을 건드리지 않고 문제를 풀려다 보니, 정부가 사행산업을 부추기는 일까지 생겼다.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공무원 연금 개혁 역시 ‘재정’ 문제다. 공무원 연금에 정부 재정이 투입된다. 이런 부담이 공무원 연금 개혁을 추진하는 동력이다. 국민연금과의 형평성 문제는 부차적이다. 근로 외 수입에도 건강보험료를 부과하기로 한 결정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 재정 부담과 관계가 있다.
흩어져 있는 ‘재정’ 관련 쟁점들을 매끄럽게 이어서 설명하는 정책 전문가가 절실하다. 우선 만나기로 한 사람이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이다. “진보의 눈으로 국가재정 들여다보기”라는 부제에 충실한 책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의 저자이기도 한 오 위원장은, 일찍부터 ‘사회 공공성 확대’라는 화두에 골몰했다. 공적 연금, 재정 등에 대한 관심은 그 연장선 위에 놓인 것들이다.
오 위원장을 지난 16일 서울 서교동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만났다. 그의 주장은 간명했다. 정부 재정 적자가 심각하다는 것, 복지 운동의 화두가 ‘보편적 복지’에서 ‘복지증세’로 넘어갔다는 것, 사회복지 목적세를 신설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아울러 ‘부자 감세 철회’라는 프레임에 머무는 야권에 대한 비판도 곁들였다. 실제 내용을 뜯어보면, ‘부자 감세 철회’로 확보할 수 있는 세수는, 필요한 재정 수요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게다. ‘보편적 복지’라는 비전을 붙잡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진보 진영이 적극적인 증세정치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안에 대한 입장도 분명했다. 담뱃세는 올려도 된다. 다만 이렇게 확보한 세원을 서민 의료 지원 목적으로 써야 한다. 지금 추진 중인 건강보험료 부과방식 개편은, 박근혜 정부 사회정책의 모범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다른 세제 개편도 이런 방식을 따르는 게 좋다. 공무원연금 개혁 역시 필요하다. 소득재분배 기능이 있는 국민연금 방식을 따라야 한다. 평균 급여율을 낮춰서 정부 재정 부담을 줄여주되, 하위직 공무원의 급여 수준은 보장하는 방식이 옳다. 중상위직 공무원의 양보가 필요하다. 공무원 노조는 국민연금 방식으로 연금제도를 바꾸는 대신 일반 국민처럼 노동기본권을 갖겠다고 요구해야 한다. 공무원 노조가 연금 권리만 외친다면,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릴 수 있다. 대략 이와 같은 주장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서 정리했다.
"현 정부 담뱃세 인상, 서민 부담 늘리고 세수는 엉뚱하게 쓰는 최악의 방향"
프레시안 : 담뱃세 인상 논란이 뜨겁다. 어떻게 보나?
오건호 : 담배가 건강에 해악을 끼치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고령화 시대에 의료비 지출이 큰데, 예방적인 차원에서라도 줄여나가야 한다. 담뱃세는, 비록 간접세이지만 다른 간접세에 비해 사회적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담뱃세 인상은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전액 의료 지원 목적 재원으로 써야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담뱃세가 ‘의료목적세’의 성격을 띨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별 소비세가 포함되고 추가 재원의 상당수가 그쪽으로 간다. 이건 동의할 수 없다.
둘째로 담뱃세가 간접세다 보니 서민 부담 문제가 있다. 서민에게는 담뱃세 인상이 부담이 된다. 이를 완화시켜야 한다. 의료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보편적이어야 하는데, 서민들만 추려서 암 보장성을 높여줄 수는 없지 않나. 따라서 서민 부담을 덜려면 다른 지출을 줄여줘야 한다. 대표적인 게 건강보험료 부담이다. 담뱃세 인상으로 확보된 재원 가운데 상당 부분을 건강 증진과 저소득층 건강보험료 지원에 쓴다면 좋다. 이 두 조건이 충족되면, 담뱃세 인상은 대단히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본다. 인상 폭도 정부가 내놓은 수준 그 이상도 가능하다고 본다.
정리하자면, 세수를 의료 목적으로 쓰고, 서민 부담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저소득층 건강보험료를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한다면 서민증세 부담을 좀 완화시키면서 동시에 담뱃세 인상이 갖는 공익적, 사회적 효과를 이루지 않겠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안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아니고, 서민 부담만 지우고 세수는 엉뚱하게 쓰는 최악의 방향이라고 본다.
"재정 적자 고착화, 복지에 부메랑 온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 이후 재정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래서 정부는 담뱃값 인상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재정을 확보하려 한다. 하지만 조세정의를 바로 세우는 방식은 아니다. 대체로 꼼수를 쓰는 듯하다. 로또 판매점을 늘린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는 재정 문제를 제대로 풀기 힘들 것 같다. 향후 어떤 문제가 불거질까.
오건호 : 두 가지다. 복지 지출 억제와 재정 적자 심화. 올해 세수 결손액이 10조 원 안팎이다. 재정적자 25조5000억 원까지 합치면 올해 재정 적자가 30조 원이 넘는다는 얘기다. 정부는 1년 전에 냈던 중기재정운영계획에서 내년에 (적자를) 17조 원으로 줄이겠다고 했다. 그 계획도 이미 깨졌다. 오히려 진실은 30조 원 안팎의 재정 적자 구조가 2009년부터 고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 국가들이 갖고 있는 구조적인 재정수지 적자가 한국에도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재정 적자가 커지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일단 재정 불안정성이 커진다. 그러다 보면 지출을 줄여야 하는데, 기존 지출을 줄이기는 어렵다. 그럼 결국 복지를 줄이지 않겠나. 복지에 부메랑이 올 것이다.
프레시안 : 복지 관련 지출 심사도 더 엄격해질 수 있겠다.
오건호 :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해 왔던 복지공약 구조조정이 그렇지 않나. 4대 중증질환 건강보험 적용, 기초연금, 저임금 노동자 보험료 지원, 고교 무상교육, 반값 등록금, 국민 행복주택 등. 모두 줄줄이 연기되거나 축소됐다. 전체 복지 지출을 억제하기 위한 큰 작업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복지지출을 통합하고 부정수급 등을 단속하고 있다. 이런 건 제도 변화 없이 행정상으로 지출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종의 재정 준칙이라는 게 있다. 수입과 지출을 맞추는 것을 아예 제도화시키는 것이다. ‘페이고’ 원칙이라고 하는데, 그런 논의를 지금 정부에서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 상황에서 새로운 지출 항목을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지출이 묶인다. 다른 나라에선 이런 재정 준칙을 강하게 적용하고는 있다. 하지만 국가별 상황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한국은 재정 규모가 GDP의 30% 수준이고, 유럽 대부분 국가는 50% 수준이다. 유럽은 전체 GDP의 절반을 국가가 쓰니까 꽤 규모가 큰 것이다. 재정 규모가 이미 성인으로 성장해 있어서 더 지출을 늘리는 것이 문제가 제기될 정도의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까 유럽 국가들에선 엄격한 지출 관리가 의미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성인이 아니라 사춘기 단계다. OECD 국가들이 40%대 수준은 된다. 그 정도까지는 일단 성장을 해야 하는데, 사춘기 애한테 성장 억제책을 쓰려고 하는 것이 바로 재정 준칙이다. 재정 준칙이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선 굉장히 강력한 방책이다. 그 제도가 의미가 없진 않은데, 서구적 맥락과 우리 맥락은 다르다. 성인에게 쓰는 약과 사춘기 애한테 쓰는 약은 달라야 한다. 앞으로 재정 준칙이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앞으로도 30% 수준으로 묶이게 된다. 지출 수요는 앞으로 고령화 때문에 더 커진다. 재정은 시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부작용을 완화하고, 공공적 주체인 정부의 활동을 뒷받침 하는 토대다. 재정이 그렇게 묶여 버리면 정부의 활동도 함께 묶인다. 한국사회의 공공적 발전에도 장애 요소가 된다.
“공무원연금 개혁, 필요하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에서 진행 중인 여러 사안들이 대부분 재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도 그렇다. 어떻게 보나.
오건호 : 공무원연금을 개혁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국민연금과의 형평성 문제, 둘째는 재정 부담이다. 형평성 문제뿐이라면 정부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재정 부담이다. 공무원연금은 올해 2조4000억 원 정도가 적자다. 그 이유 때문이라도 공무원연금 개혁은 필요하다고 본다.
공무원연금 수령자들의 사회적 지위는 중상위층이다. 그들의 연금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재정이 많이 들어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선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공무원 노조도 비판을 받을 면이 있다고 본다. 공무원연금 적자 보존에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것을 뻔히 알고 있다. 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선 합당한 조치일 수 있다. 하지만 예산은 제약돼 있고, 결국 전체 복지 지출에 압박이 온다.
특히 공무원들은 국가 운영에 관여하기 때문에 좀 더 포괄적 시야를 가질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전체 국가재정을 어떻게 늘릴지에 대해서 공무원 노조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재정 상황이 압박받을 수 있다는 점을 뻔히 알면서도, 오로지 공무원연금 권리만 얘기하지, 연금의 바탕이 되는 전체 재정 구조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
공무원 노조가 정부로부터 정치적으로 몰리고 있는데, 공무원연금 의제의 프레임을 획기적으로 바꿔서 공무원 노조가 선도적으로 논의에 개입하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를 상대로, 국민의 여론을 상대로 이기기 어렵다.
“공무원 노조, ‘하위직 공무원 vs 중상위직 공무원’으로 전선 바꿔야”
프레시안 : 공무원연금 의제의 프레임을 획기적으로 바꾸자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자는 건가.
오건호 : 기존 공무원연금을 흔히 ‘후불 임금’이라고 한다. 공무원 재직 기간 동안 급여를 적게 받은 데 대한 보상 성격이 있다는 게다. 그러나 공무원연금 개혁을 하더라도 소급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존 연금 급여권은 보장된다.
현재 공무원연금에 정부 재정이 들어가는데, 이를 줄이자는 게다. 그러자면 전체적인 공무원연금 평균 급여율은 낮춰야 한다고 본다. 국민연금은 그 안에 균등지수라는 게 있다. ‘하후상박’(下厚上薄, 아랫사람에게 넉넉하고 윗사람에게 인색하다는 뜻) 성격의 조정 기능이다. 반면, 공무원연금은 아예 비례 연금이다. 물론 대부분의 다른 나라도 공적연금은 비례연금이다. 그러나 한국적 공적연금의 특수성이 있다고 본다. 공무원연금도 “공무원연금도 공적연금이다”라고만 하지 말고, 국민연금 원리를 닮을 필요가 있다.
공무원연금에도 국민연금처럼 A급여(소득재분배급여)를 집어넣자는 게 내 주장이다. A급여를 크게 넣으면 하위직 공무원들은 급여가 오히려 올라갈 수도 있다. 나는 공무원연금의 평균 급여율은 내리되, 하위직 공무원들에게는 급여 삭감이 이뤄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 관건은 중간층이다. 중간지대의 공무원들이 급여 삭감을 용인해야 한다. 재정 지출 부담에 대해서 대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대신 하위 공무원들의 급여 인하는 없고, 상층부는 더 많이 희생하라는 것이다. 공무원연금을 많이 받는 경우엔 월 550만 원까지 받는데, 위 공무원들은 좀 깎아도 된다고 본다. 그들은 연금 아닌 다른 사회적 자산을 이미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공무원노조가 평균 급여율 인하를 수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일괄로 깎이는 게 아니라, 하후상박이다. 평균 급여율을 낮춰서 정부 재정 부담을 줄여야 한다. 정부에 이런 방안을 제시하면서 공무원들의 노동기본권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은 전선이 정부, 국민, 그리고 공무원 사이에 각각 쳐 있다. 그런데 공무원연금을 국민연금의 하후상박 방식으로 개혁하면 중상위 공무원 대 국민으로 전선이 다시 생긴다. ‘관피아 척결’을 많이 얘기하는데, 상위 공무원들 얘기다. 중하위 일반 공무원들은 노동자라고 설득할 수 있다. 그렇게 노동 기본권도 개선시킬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식으로 큰 그림을 그리면, 명분을 가진 공무원연금 개혁 논리가 생길 수 있다. 그런데 공무원노조가 지금처럼 ‘연금권리 수호’만 외치면, 계속 코너에 몰릴 것 같다.
공무원연금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너무 커지다보니까, 전체적으로 연금 불신만 높아진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공무원들에게 일반 국민과 똑같이 노동기본권을 보장해주고, 대신 신규 공무원부터는 아예 국민연금으로 가는 것도 적극적으로 논의할 때라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공무원이 인기 있는 직업인 이유가 연금인데, 그런 식의 개혁이 가능할까.
오건호 : 모두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 아닌가.
“박근혜 밉다고, 세수 증대까지 죄악시하면 안 돼…건보료 부과 체계 개편은 모범사례”
프레시안 : 건강보험료 부과 방식 개편이 진행 중이다. 이 문제도 재정과 관계가 있다.
또 피부양자 제도를 손보는 문제가 있다. 지금은 피부양자가 너무 온건하게 인정된다. 금융 소득이든, 연금 소득이든 연 4000만 원 이하면 피부양자 등록을 시켜준다. 연금을 월 300만 원 씩 타고 있어도 자기 자식의 피부양자로 들어갈 수 있다. 결국 이런 체제에선 상위 계층이 특혜를 본다. 근로 외 소득이 많고, 연금과 금융 소득이 있는 피부양자들이 수혜자였다.
반면, 피해자는 지역 건보 가입자들이었다. 이번에 건보 부과체계 개편 방안은 이들의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것이다. 이번 방안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사회 정책 가운데 가장 전향적인 것이라고 본다.
다만 문제는 속도다. 얼마나 급격하게 할 것이냐의 문제다. 정부는 과세 인프라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으니 천천히 하자는 쪽인데, 나는 정부가 너무 신중하다고 본다. 건강보험료 형평성 문제가 심각한데, 정부는 큰 폭의 변동이 있는 식으로는 안 할 것 같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강력하게 진행했으면 좋겠다. 국민을 믿으면 된다. 국민들이 지지할 것이다.
국민들이 조세 정의가 제대로 실행되는지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이번에 건강보혐료 부과체계 개편을 제대로 하면 ‘대한민국에서 조세 정의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거듭 강조할 게 있다. 세수 확보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보면 안 된다. 앞으로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이려면 건강보험료를 늘려야 한다. 정부는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을 통해서 이제까지 안 걷던 부분을 걷자는 것이다. 기본적으론 옳은 방향이다. 담뱃세도, 제대로만 쓰인다면 올리는 게 옳다. 박근혜 정부가 밉다고 해서, 세수 증대까지 죄악시해선 안 된다.
어떤 방식으로 세수를 늘릴지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 방향은 굉장히 모범적이다.
건보료 부과체계에서 모범 사례를 만들어 내면, 다른 조세개혁이나 증세 논의가 한결 수월해진다. 건강보험 제도는 다른 제도에 비해서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내면 돌아온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델을 잘 만들었으면 좋겠다. 결국 조세 개혁은 세수 확대와 조세 정의 실현이 목표인데,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방안이다.
“증세는 결국 ‘신뢰’ 문제…부동산 세금 조금만 올려도 ‘신뢰’ 생길 텐데”
프레시안 :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종합부동산세가 보수 정부 출범 이후 무력화됐다. 종부세 무력화는 상징성이 크다고 본다. 부동산 부자들에 대한 과세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생겨난 재정 악화에 대한 책임을 서민이 떠안고 있는 형국이다. 조세 정의에 역행하는 사례다.
오건호 : 부동산 부자에 대해서 과세를 강화하라는 국민적 여론은 높다고 본다. 종부세가 노무현 정부 때 도입된 방식대로 계속 진행이 됐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유명무실해졌다. 2007년에 종부세로 거둬들인 연 수입이 3조 원에 육박했다. 그런데 지금은 경상가격(물가 상승 요소를 무시한 가격)으로도 1조 원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종부세는 대상이 명확하고 투명하다. 부동산은 숨길 수 없지 않나. 분명하게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괜찮은 세금인데, 그게 거의 무력화됐다.
증세는 결국 신뢰의 문제다. 금액의 문제가 아니다. “땅 부자들에겐 세금 깎아주고 왜 인두세를 올리느냐”라는 반발이 있지 않나. 만약 박근혜 정부가 종부세에 대해 이명박 정부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면, 즉 종부세를 조금이라도 강화한다면, 현 정부의 증세 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으리라고 본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
“진보교육감 향한 정부의 복수”
프레시안 : 요즘 지방 재정 문제가 심각하다. 지역교육청은 교사들 명예퇴직 신청도 반려할 정도다. 퇴직금 줄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누리과정(만3~5세 보육지원 사업)을 2015년부터는 교육청 예산으로 감당한다. 그래서 교육감들이 재정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지방정부는 보육과 기초연금 때문에, 교육청은 누리사업 때문에 돈이 없다. 중앙정부가 세입을 안 늘려줬으니까. 지방정부 입장에선 보육과 기초연금에 돈이 다 들어가니까 다른 복지 사업을 거의 못한다. 자체 복지사업이란 독거노인 지원 등 틈새복지인데, 그게 2009년 이후 절대 수준 이하로 내려가고 있다. 지방정부는 지방교부금, 교육청은 교육교부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문제는 교부금을 줘야 할 중앙정부가 사정이 가장 어렵다는 점이다. 재정 적자가 30조 원 수준이다. 이렇게 가면, 지방정부가 기초연금 디폴트를 선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중앙정부가 어쩔 수 없이 지방세 개편을 해준 것이다. 주민세, 자동차세, 담배소비세 등을 올렸다. 역진적 방향으로 간다는 것인데, 편법이긴 하지만 지방정부는 좋아할 수 있다. 지방세를 두 배로 올리는 것도 서울시의 요구라고 한다. 이번에 정부가 낸 보도자료를 보면 서울시 공문이 첨부돼 있다.
“재정 위기감, 대통령보다 진보 진영에 더 절박하다”
프레시안 : 4년 전, 그리고 올해 지방선거에서 모두 복지가 주요 의제였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재정난에 시달리다 임기를 마치게 된다면, 다음 선거에선 복지 이야기를 하기 어려워질 것 같다. 한국의 사회복지는 여전히 걸음마 수준인데, 이대로 복지정치에 제동이 걸리는 것 아닌가 싶은 불안감이 있다.
오건호 : 그게 내가 가장 심각하게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2012년에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후보가 세게 붙었다. 자료만 놓고 보면, 문재인 후보의 경우 50조 원 규모의 복지였고, 박근혜 후보는 20조 원 규모였다. ‘박근혜 복지’에 비해서 ‘문재인 복지’가 두 배 이상 재정이 필요했다.
그런데 더 적은 돈이 드는 공약을 내걸었던 박 대통령조차 공약을 안 지킨다. 상당 부분은 재정 탓이다. 이제는 국민들도 달라졌다. 복지공약을 세게 내건다고 무조건 반기지 않는다. 실현 가능성을 검증한다. 재정 확충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보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남은 임기 2년 동안, 진보 진영은 현 정부의 복지를 넘어서는 복지 계획을,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출해야 한다.
2012년 총선과 대선 당시 야권이 발표했던 수준의 보편적 복지 공약을 다음 대선에서 내걸려면, 새로운 세입 확충 방안에 대해 보편적 복지 진영 나름의 재정 계획을 내야만 한다. 그 때 못 내면 앞으로 영원히 보편적 복지 공약을 내지 못한다고 본다. 국정 운영자인 박근혜 대통령도 다급하겠지만, 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는 게 보편적 복지 진영 쪽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보편적 복지를 지지하는 진영이 주민세나 담뱃세 인상을 비판하는데 골몰해선 안 된다. 사실 그렇게 해서 거둘 수 있는 돈은 몇 푼 되지도 않는다. 정부의 증세 방안이 적절치 않다고 보는 건 그래서다. 다음 대선에서 복지 공약을 놓고 국민을 설득하려면 나름의 재원 확보 전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진보, 개혁 진영에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없다.
이제까지 우리는 보편적 복지가 ‘시대적 대세’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보편적 복지가 선거에서 쟁점이 됐던 2012년이 대한민국 복지 역사에서 굉장히 예외적인 해로 기록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다음 선거 전까지 제대로 된 재원 확보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사회복지 목적세 신설, 가장 간결한 복지 증세 방안”
프레시안 : 평소 사회복지 목적세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소득세나 법인세을 올리는 것으론, 복지 재원을 확보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
오건호 : 그런 뜻이 아니다. 사회복지세란 기존의 소득세, 법인세, 종부세, 상속증여세 등의 세금을 기준으로 다시 매기는 세금이다. 세금이 매겨지는 대상을 과표라고 한다. 예컨대 소득세의 과표는 소득이다. 그런데 사회복지세의 과표는 세금이다. 예컨대 내가 10만 원의 소득세를 내면, 10만 원의 소득세에 20%를 사회복지세로 더 내라는 얘기다. 기존의 소득세는 일반 회계로 가고, 20%인 2만 원은 사회복지세로 걷어서 사회복지 회계로 가는 것이다.
사회복지세의 첫째 장점은 세수 확보가 용이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간단하다는 점이다. 국민에게 설명하기가 쉽다. 증세 대중정치에 이롭다는 말이다. 가장 결정적인 장점은 목적세라는 점이다. 거둬들인 세금을 모두 복지에 쓴다는 점을 국민에게 약속할 수 있다. 예컨대 50개 가계 유형을 만들고, 그 가운데 내가 어떤 유형에 속한다고 하면, 내가 얼마 내고 얼마 받는다는 걸 바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한국처럼 정부에 대한 불신이 큰 나라, 재정 지출에 대한 불신이 큰 나라에서는, 세금 내면서도 나에게 제대로 돌아올지에 대해 대단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데 목적세인 사회복지세는 상당한 강점이 있다. 가장 효과적인 복지 증세 방안이라고 본다.
부유세를 신설하거나 소득세나 법인세를 올리는 것도 찬성이다. 다만 ‘증세정치’라는 면에선 ‘사회복지세’ 하나로 승부하는 게 좋다고 본다.
“복지 키워드, ‘보편적 복지’에서 ‘복지증세’로 바뀌었다”
프레시안 : 전문가 집단 안에서 사회복지세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
오건호 : 지방세 연구자 가운데 지역복지세를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 박원석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사회복지세 도입방안도 지역복지세에 가깝다. 중앙정부에서 거두되, 지역복지 교부금으로 주는 방식이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일본과 프랑스 사례가 있다. 한 달 전에 나온 사회보장기본계획에도 예시로 나온 게 프랑스 사회보장세와 복지목적세 성격의 일본의 부가가치세였다. 중앙정부가 부가세를 올리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만약 한다면 일본처럼 했으면 좋겠다. ‘소비복지세’로 하는 것이다.
복지와 세금을 결합시키는 ‘복지 증세’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지금 복지 지형이 변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보편적 복지’ 대 ‘선별적 복지’의 싸움이었다. 일종의 복지 ‘시즌 1’이었다. ‘시즌 1’을 추동시켰던 에너지는 물론 보편적 복지였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가? 복지 ‘시즌1’ 당시 '보편적 복지'라는 단어에 가슴 떨렸던 사람들은 여전히 열정적인가? 그렇지 않다. “보편적 복지가 좋은데,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생겨나고 있다. 결국 재원 문제다. 지하경제 양성화 등의 해법으론 안 된다는 점이 이미 다 증명됐다. 복지 재원 확충 방식에 대한 논의가 ‘시즌2’에서 이뤄져야 한다. 어떻게 구현할 것이냐의 문제다.
그래서 다음 대선까지의 복지 지형의 화두는, '복지증세'라고 본다. 복지 지형의 키워드가 ‘보편적 복지’에서 ‘복지증세’로 바뀌고 있다.
“최경환 경제팀이 경기 부양에 목매는 까닭…실패하면 부가세 올릴 듯”
프레시안 : 정부가 사실상 간접세를 올렸다. 공식적으론 아니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증세다. 정부가 어느 범위까지 증세를 이어갈 것이라고 보나.
오건호 : 최경환 경제팀이 경기부양책을 쓰고 있는데, 결국 경기에 달린 것 같다. 이번 지방세 개편안이 원안대로 통과되면 지방 재정 문제를 그럭저럭 메울 수 있다. 주민세를 놓고 뜨겁게 붙어서 그렇지, 사실 주민세 인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1년에 한 번, 5000원 내던 걸 1만 원 내라는 건데, 아무것도 아니다. 커피 한잔 값이다. 주민세 인상해봐야 세수가 1800억 원밖에 안 된다.
그런데 지방세 감면의 경우, 1조원짜리다. 원안대로 하면 되는데, 국회통과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만약 원안대로 된다면, 당장 내년에 기초연금 재원이 구멍 나는 것 정도는 그럭저럭 메워진다.
이번 증세 논의가 나온 배경이 사실 지방정부 때문이다. 너무 어려워서 ‘디폴트’ 선언하겠다고 난리가 난 것 아닌가. 이번 처방으로 잠시 지자체가 잠잠해질 순 있는데, 문제는 중앙정부다. 올해 세수 결손이 10조 원 정도로 예상되고 재정적자도 30조 원을 넘는다. 심각하다.
그렇다고 국채를 더 늘리긴 어렵다. 정부가 5년 임기 마치고 평가를 할 때, 수량적 지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 부채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욕을 먹은 것도 국가 부채 때문이었다. 국정 책임자 입장에선 어떻게든 국가 부채를 줄이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세입을 늘려야 한다. 의미 있는 세입을 확대하려면 주민세 같은 것으론 부족하다. 그럼 결국 부가세다. 부가세 10% 올리면 6조 원의 세입이 발생한다.
세수의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결국 경기다. GDP가 올라가면 그냥 세수가 높아진다. 그래서 최경환 경제팀이 경기부양에 승부를 거는 거다. 경기부양이 그들의 바람대로 되면 세수 늘어난다. 경기부양이 예상대로 안 되면 세수가 더 줄어들 수도 있다. 작년과 올해가 그랬다. 안 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게 되면, 정부가 원하지 않겠지만 부가세 인상 카드를 던질 수 있다.
“부가세 인상, 꼭 나쁘지만은 않다”
프레시안 : 직접세는 손을 안대고?
그런데 한 마디 덧붙이면, 부가세가 꼭 역진적이진 않다. 일종의 소득 재분배 효과를 낼 수 있다. 그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품목만 보면 역진적이지만, 전체 세수로 보면 안 그렇다. 소득대로 소비한다고 한다면, 소득이 높을수록 돈을 더 많이 쓴다. 그걸 복지목적세로 사용한다면,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많은 혜택을 받는다. 상당한 재분배가 발생하는 것이다. 복지국가에서 부가세가 높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부가세 올려서 4대강 사업 같은데 쓰면 안 된다.
직접세 중심의 증세를 이루면서 부가세 개혁이 보완되면, 하나의 종합적 프로그램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본다.
“‘MB 부자감세 100조 원’, 사실과 다르다”
프레시안 : 야권에선 ‘부자감세 철회’를 줄곧 이야기한다. 그렇게만 되면, 증세 없이도 복지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오건호 : 이명박 정부가 2008년에 전면적인 감세안을 제출했다. 소득세, 법인세, 종부세. 이 세 가지가 핵심이었다. 2008년 12월에 전격 통과됐고, 대부분 2009년부터 적용이 됐다. 그게 통과가 되니까, 국회 예산정책처는 이 법안에 따른 감세 규모가 대략 90조 원이라고 발표했다. 정부도 그렇게 봤다. 그래서 야권에서 ‘MB 부자감세 100조 원’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소득세와 법인세는 단계적 적용이었다. 소득세는 네 개 구간이었는데 가장 아래가 8%, 위가 35%였다. 똑같이 2%포인트 씩 내리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 정부가 1단계 감세는 아래쪽부터 했다. 높은 쪽은 2010년부터 35%를 33%로 낮출 예정이었다. 법인세도 비슷했다. 최고구간세율은 단계적 적용이었다.
그런데 비판 여론이 고조되니까, 국회에서 다시 법 개정을 조금씩 했다. 첫 번째 조치가 2단계 감세가 유보된 것이다. 소득세 최고구간 세율을 33%로 낮춰야 하는데 보류했다. 2010년부터 하기로 했는데 유예했다. 2011년 말에는 인하 유예 정도가 아니고, 아예 더 높은 38% 최고구간 세율을 하나 더 신설했다. 35% 유지하고, 그 아래 세 구간은 2%포인트 씩 낮춰줬다. 세율로만 보면 최고 구간은 증세가 이뤄진 것이다. 법인세도, 대기업에 적용되는 게 22%까지 내려왔다가 유예됐다.
결국 ‘부자 감세 90조 원’라는 주장은, 법안이 2012년까지 애초 계획대로 전개됐을 때를 전제로 시뮬레이션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매년 유예되거나 부분적 증세 조치가 계속 이뤄졌다. 처음엔 유예되고, 그 다음엔 소득세 최고구간 38%가 신설되고, 법인세 최저한세율(기업들이 각종 비과세, 감면, 공제 등을 통해 세금이 깎이더라도 반드시 내야 하는 최소한의 세율)이 인상되고, 2011년엔 금융소득종합과세가 4000만 원에서 2000만 원으로 낮아지고…. 2008년 빼고는 부분적 증세가 계속 이뤄진 것이다.
야권이 구호로 내세우는 ‘MB 부자감세 100조 원’은 과대 추계된 것이다. 사실 조금 우습다. 사람들이 무조건 부자감세 철회하라고 한다. 그런데 소득세는 최고구간을 오히려 높였다. 아래 구간 세율은 낮췄다. ‘부자감세 철회’를 외치는 이들이 아래 구간 서민들 감세한 것도 되돌리자고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정부가 2012년 중반 발표한 감세 규모가 64조 원이다. 그 중 ‘부자 감세’는 31조 원이다. 약간 과소추계가 있지만 대체로 이 수치가 맞다고 본다. 100조 원이라는 주장은, 2008년 원안대로 했을 경우다. 심지어 정부 수치도 2012년 말 증세가 반영되지 않은 자료이기 때문이다. 2013년에도 증세 개정이 됐다. 만약에 지금 시점에서 2008년 이전으로 되돌아가자고? 되돌아 가봐야 야권이 주장하는 세수는 확보되지 않는다.
‘부자감세 철회’가 정치적 프레임으로는 살아 있지만, 정책적으론 의미가 약하다. 오히려 부작용이 있다. 그러니까 오히려 진보 진영이 증세 논의를 절실하게 안 하는 것이다. 증세가 더 절실한 것은 진보 진영이다. 여기서 비전이 안 나오면, 2017년 선거에선 복지 공약을 못 내건다. 그런데 우리는 복지에 쓸 돈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자감세 철회하면 되는데, 뭣 하러?” 이런 식이다.
재정에 대해 ‘도깨비 방망이’가 두 개 있었다. 여당이 믿었던 ‘도깨비 방망이’는 ‘지하경제 양성화’였다. 야당이 믿는 ‘도깨비 방망이’는 ‘부자감세 철회’다. ‘도깨비 방망이’ 두드리면 돈이 나올 줄 알지만, 실상은 아니다. 두 개의 ‘도깨비 방망이’ 모두 '증세 착시'를 준다. ‘복지증세’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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