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이 다가왔을 땐, 실은 가슴 한 구석에 ‘기대’란 놈이 살짝 부풀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동의하는 서명을 350만이나 모아 국회로 갈 때, 저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큰 관문을 하나 통과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00일이면 곰도 사람이 된다는데 ‘성역 없는 진상조사’라는 국민적인 요청이 법으로 안 만들어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기대를 품은 게 저 이카루스가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에 다가간 것만큼 잘못이었을까요. ‘150일’이 지나는 지금 기대는 날개 잃고 추락하고, 가족들의 하루하루는 지켜보기에 가슴이 아픕니다.
얼마 전, 한 반사회적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이 가족들 앞에서 ‘폭식투쟁’을 했다지요.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능력이 얼마나 마비되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한 작가 프리모 레비는, 나치에 의해 강제로 통역을 맡게 되어 괴로워하는 한 수인(囚人)에게 본능적인 존경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가 우리들보다 먼저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레비는 씁니다.
세월호 사고는 선별된 소수만 탑승한 우주선 사고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기에, 희생자 가족들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에 앞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호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자기 아이는 갔어도 남은 아이들을 위해” 싸우는 가족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간혹 도저히 인간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우슈비츠에서도 동료 수인을 멸시함으로써 자신이 그보다 낫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있었습니다.
저는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으로 ‘법정 기록’을 위해 매주 화, 수 열리는 재판을 방청합니다. 6월 10일 첫 재판이 열리던 날, 재판장은 희생자 가족들에게 약속했습니다. 반드시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고 책임질 사람들이 책임지게 하겠다고. 하지만 석 달이 지난 지금 그 약속이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 재판은 꼭 ‘폭탄 돌리기’ 게임 같습니다. 선원들은 구조 책임이 해경에게 있다며 떠넘기고, 해경은 선원들이 초동대응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합니다. 상습적인 화물 과적으로 돈벌이를 해 온 회사의 직원들은 자기는 과적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게다가 정부․여당은 ‘교통사고’ 운운하며 국가는 책임이 없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세월호 사고 이후 구속된 140여 명 가운데 정부 공직자는 해경 일부와 항만청 직원 등 10여 명이 채 안 되고, 그들 모두 말단 공무원에 불과합니다. 그나마도 불철저해서, 선내 진입지시를 안 하고 했다고 거짓말한 해경 123정 정장이 “증거 인멸, 도주의 우려가 없다”며 구속영장이 기각되었습니다.
재판에서 진실과 책임이 조금씩 밝혀지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재판엔 큰 한계가 있는데, 검찰이 애초에 정한 공소장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검찰의 입증과 공방은 그 안에서만 분주합니다. 더 본질적인 문제들, 즉 그런 부실한 배가 버젓이 돌아다니도록 누가 규제를 풀어주었는지, 해운업자들과 그들로부터 정치후원금을 받은 정치인들이 어떤 부패의 카르텔을 맺었는지, 왜 국가의 구조 업무가 민영화되었는지, 누가 재난대응 시스템을 이런 참혹한 지경으로 붕괴시켰는지, 청와대는 왜 승객들이 수장되는 동안 컨트롤 타워로서 역할을 손 놓았는지, 검찰은 이런 문제로는 단 한 뼘도 올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꼬리’만 잡고 흔들 뿐 이 사태를 낳은 ‘몸통’에는 칼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이 법정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매번 재판마다 방청석에서 한숨과 울음과 분노가 새어나오는 것을 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가족들이 바라는 특별법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검찰수사를 피한, 훨씬 책임이 무거운 자들을 법의 심판대에 올려야 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특별검사가 아니라 독립적인 특별위원회가 수사·기소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특별위원회는 참사가 재발되지 않도록 제도적·문화적 개선 조치를 연구하여 행정부와 입법부에 제시하고, 그들이 조치를 이행하도록 강제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족들이 거리에서, 언론에서, SNS로 주장해온 특별법의 내용입니다. 저는 꾸준히 세월호 재판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가족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걸 확신합니다.
세월호 가족 여러분, 저는 가족들을 보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대심문관’ 편에 나오는 예수를 떠올립니다. 중세 스페인의 한 도시, 예수의 이름을 내건 종교재판으로 이단자를 화형시키던 그때 실제 예수가 나타납니다. 민중은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고 그 손에 입 맞추지만 대심문관은 예수를 체포해 지하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내일 너를 화형에 처할 것”이라 선고하지요.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너는 민중에게 천상의 빵을 약속했지만 우리는 지상의 빵을 약속했다. 민중은 우리가 준 빵과 자신들의 자유를 맞바꾸었다”고 말합니다. 물질로 복종을 얻어낸 권력자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설파하는 예수는 불편한 존재일 뿐이지요.
세월호 사고의 진상이 밝혀지지도, 재발방지 대책이 세워지지도 않았는데 ‘경기 회복’을 위해 그만 세월호를 잊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언제 또 다른 ‘세월호’에 탈지 모르는데 빵 몇 덩어리에 우리의 기억할 권리, 질문할 권리를 포기하라는 자들, 그들이 바로 이 시대의 대심문관이고 이단재판관들이 아닐까요? 소설 속에서 예수는 대심문관에게 다가가 조용히 입을 맞춥니다.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고도, 그 고통을 준 이 사회를 끌어안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자”고 설득하는 가족들에게서 저는 우리 시대의 ‘예수’를 봅니다.
편지의 서두에서 ‘기대’를 잃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기대’와 ‘희망’을 구분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해주리라 생각하는 것이 ‘기대’라면, 스스로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희망’이라고. 세월호 가족들이 그 자리에 계시는 한, 우리는 여전히 인간과 사회에 대한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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