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의 69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내놓은 대북제안은 내용상 드레스덴 선언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필자는 남북 간 경색국면을 풀 수 있는 획기적인 제안이 이번 8․15 경축사에 포함되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는 작은 사업부터 하나씩 추진해 나가겠다"며, 환경의 통로, 민생의 통로, 문화의 통로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자고 했다.
필자의 기대는 좌절되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 8․15를 계기로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이 1970-80년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 흐름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북한의 70~80년대 단골 메뉴였던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실시 주장까지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올해 8․15 경축사에는 긴장 완화나 평화체제 수립과 같은 근본문제에 대한 방향제시도 없었고, 연초부터 계속 제기되어온 북한의 대남 요구를 배려하는 구절도 담겨있지 않았다. 결국 박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즐겨 제안했던 기능주의적 접근 차원의 대북제안만 내놓았다.
1970~80년대 북한은 정치·군사적 문제 선결을 주장했고, 남한은 정치·군사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경제·사회·문화분야의 교류·왕래·협력부터 하자고 주장했다. 이론적으로 보면, 북한은 정치군사적 접근론 입장이었고 남한은 기능주의적 접근론 입장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 들어서면서 70-80년대 남북성명전 시대가 재현되는 느낌이다. 남북의 성명전은 사실 국민을 피곤하게만 만들 뿐이다.
북한은 14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성명을 통해, 5·24조치 해제, 7·4-6·15-10·4공동선언 등 기존 남북합의 이행, 한·미연합군사훈련 등 적대행위 중단을 요구했다. 북한이 부랴부랴 14일에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성명을 발표한 것은 아마도 박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북한의 기대나 요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이 극력 반대하는 드레스덴 선언의 연장선상에서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 대북 3대 제안 중 두 번째인 '남북 공동 번영을 위한 민생인프라 구축'과 세 번째 제안인 '남북 주민간 동질성 회복'과 관련된 문제를 중심으로 남북관계를 풀어나가자고 제안했다. 지금까지 북한은 드레스덴 선언이라면 막무가내로 반대해 오고 있다. 경축사에 대한 북한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사실 드레스덴 선언의 연장선상에 있는 제안을 둘러싼 남북 간 성명전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성면전의 이면에는 남북관계에 대한 철학과 정책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은 부쩍 '근본 문제'부터 다루자고 주장하고, 남한은 '작은 문제'부터 풀어나가자고 응수한다. 북한은 '탑 다운'(top down)을 주장하는데 박 대통령은 '버텀 업'(bottom up)접근을 하자고 한다.
이렇게 화살표 방향이 정반대가 되면 남북 간에는 접점을 찾기 어렵다. "반대 방향의 화살표끼리 중간에 만나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방향이 다르다는 것은 철학과 정책 기조가 다르다는 뜻이다. 앞으로 이렇게 남북이 서로 계속 '탑 다운'과 '버텀 업'입장을 고수한다면 남북 간에는 공허한 내용들로 가득 찬 성명들만 판문점을 넘나들 것이다.
그리고 경축사 중 "남북을 가로지르는 하천과 산림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협력사업을 확대"하자고 한 박 대통령의 대북제안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의 심각성을 무시하거나 외면한 제안이라고 본다. 사실 남북 간에는 이미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후속조치의 하나로 임진강 수해방지 사업을 하기로 합의했었다. 그리고 2002년부터 2009년까지 그 문제를 놓고 5차례나 회담이 열린 바 있다. 2003년과 2005년에는 북한의 댐 방류계획 사전 통보에 합의했었다. 2004년 남북경제협력추진위(약칭 경추위) 8차 회의에서는 임진강 유역에 대한 단독 및 공동조사 실시, 홍수 예·경보시설 설치, 묘목 제공 등을 내용으로 하는 '임진강 수해방지 합의서'를 채택하기도 했다. 그 합의를 이행하는 차원에서 2005년에는 양측 단독 조사결과 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8월에 임진강 북측 구간에 대한 남북공동조사를 하기로 합의해 놓고도 막판에 북측이 "군사적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동조사를 무산시킨 적이 있다. '군사적 보장'이라는 말에는 남북대결의 최전방인 비무장지대 바로 북쪽 지역의 군사능력과 군사기밀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북한 국방위원회 쪽의 강한 우려와 반발이 포함되어 있다.
박 대통령은 공유하천문제를 환경문제 차원에서 제안했다. 그런데 위에서 지적한 대로 임진강이나 북한강 등 남북공유하천 문제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군사적 신뢰구축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합의·이행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남북관계 경색국면에서는 우선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운 문제다. 아니 사실은 제일 껄끄러운 문제다.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공유하천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남북관계가 정치·경제적 측면에서도 화해협력 국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판에는 북한의 군사능력과 군사기밀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요컨대 남북 간 정치적 신뢰구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군사지역을 흐르는 남북공유하천 문제는 아무리 환경문제로 포장을 하더라도 북한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문제의 성격이 이와 같기에 8월 17일 북한은 노동신문을 통해 환경, 민생, 문화 분야 협력을 강조한 박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해결책이 없다고 에둘러 비난했다. 5·24조치로 꽉 막혀 있는 남북 간에 '작은 통로'를 통한 접촉과 왕래를 하자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비난도 빠뜨리지 않았다. 남북 간에 성명전 공방만 계속되는 이 상황에서, 과연 5․24조치 해제 없이 남북 간 접촉과 협력이 가능한지, '작은 통로'를 통한 '작은 시작'이 가능할지에 대해서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진정으로 경색된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통일의 기반을 다져 나가고자 한다면, 좀 더 실질적인 제안을 했어야 좋았을 것이다. 북한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배려해주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대북제안을 했더라면, 그것이 설사 자그마한 제안이라 할지라도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셨다. 방문 기간 중 교황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몸소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필자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작은 감동과 사랑에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느꼈다. 교황께서 8월 17일에 하신 말씀 중 "상대 마음 못 열면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라는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말씀은 바로 지금의 남북관계에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마음을 열 때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말씀도 두고두고 새길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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