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 광장의 중심에 선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지난달 14일부터 흰 천막들이 줄지어 세워졌다. 그곳에는 단식 농성에 들어간 고(故) 김유민 학생의 아버지 김영오 씨, 그리고 김 씨를 응원하는 시민들이 기거한다. 그들이 자신의 밀실을 버리고 광장에 나온 이유는 하나,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대한 절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지난 6일부터 7일까지 그들의 '광장 24시'를 곁에서 지켜보았다. 편집자.
6 PM~8 PM. "우리 늦둥이 생각 나서 서명했어요"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에 서명해주세요."
퇴근길. 광화문 광장의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시간이다. 휴대전화를 받으며 바쁘게 걷는 샐러리맨, 두리번거리며 맛집을 찾는 연인들, 피서 나온 가족들. 사람들이 많아지자 서명 용지를 들고 다니는 자원봉사자들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서명 용지를 내밀었다. 눈길 주는 사람 반, 무시하고 지나가는 사람 반이었다.
서명 용지를 물린 한 중년 부부가 "한 번 둘러보자"하며 아이 손을 잡고 천막 주변을 걸었다. '유가족 단식장' 천막 앞에서 멈춰 선 아이 어머니가 "단식해서 뭐 하느냐"며 조용히 혀를 찼다. 단식 24일째를 맞은 유민이 아버지가 소금통에 손가락을 찍어 입에 넣었다.
세 가족을 본 유민이 아버지가 "들어오시라"고 했다. 쭈뼛하던 부부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아이 아버지가 유민이 아버지 손을 잡았다. 유민이 아버지는 맞잡은 손에 노란 배지를 쥐여줬다. 곧 이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혀를 차던 어머니 쪽의 눈가에 눈물이 괴어있었다. 부부는 다시 서명 부스로 가 사인했다.
"(유민이 아버지가) 아이 잘 키우시라고, 그리고 안전한 나라 만들 수 있다고 도와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 애가 분수대를 좋아해서 왔다가 저분 보니 짠하고, 또 우리 애가 늦둥이인데 나중에 이런 사고 나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서명했어요."
서명을 받는 한 자원봉사자는 "특별법에 대해 처음 듣는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분들을 보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설명을 듣거나 광장 둘러보신 다음에 서명해주실 때 가장 뿌듯하다"며 "제가 서명 운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라고 했다.
8 PM~12 PM. "고작 '딴따라 사인' 하나로도 서명하러 와주신다면야"
해가 거의 졌는데도 날이 후끈했다. 천막동 뒤 설치된 분수대에서는 여전히 물줄기가 시원하게 뿜어져 나왔다. 아이들 사이에서 물을 튀기던 대학생 김수민 씨와 김의현 씨가 천막동으로 와 수건을 꺼냈다. 이들은 슬리퍼를 벗고 발을 닦은 뒤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방학을 맞아 부산에서 올라온 두 사람은 '광화문 국민 휴가'에 나왔다며 이날 하루 노숙할 준비를 다 해왔다.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는 시민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지난 9일까지 '국민 휴가' 이벤트를 진행했다. 서울 시내를 돌며 '몸자보' 산책을 하고, 가족과 대화를 나누고, 릴레이 1일 단식단에도 참가할 수 있는 행사다.
"둘 다 캠핑하는 걸 좋아해서 여름 캠핑 겸 응원 왔어요. 오후에는 서울 구경할 겸 몸에 자보 붙이고 종로 한 바퀴 돌다 왔어요. 단식은 세 끼째인데 내일까지 여섯 끼 하려고요. 유민이 아버지는 20일 넘었고, 김장훈 씨도 삼 일째인데 하루 이틀 굶는 게 대수인가요."
물기를 말린 이들은 가슴팍에 '세월호 참사 국민 단식 1일째'라고 적힌 노란 천을 달고 다시 '저녁 산책'에 나갔다. 천막 주변을 거니는 이들 대다수가 같은 천을 달고 있었다. 동조 단식 신청을 받는 한 자원봉사자는 가수 김장훈 씨가 지난 4일 단식단에 합류한 이후 단식 참가 인원이 크게 늘어났다고 했다. 그는 "엊그저께까진 100명도 안 됐는데 어제 109명, 오늘은 140명"이라며 "아무래도 김장훈 씨 영향이 큰 것 같다"고 했다.
저녁 시간 내내 자리를 비웠던 김장훈 씨가 오후 10시께가 되어서야 천막에 돌아왔다. 인천에 있는 일반인희생자분향소에 다녀왔다고 했다. 천막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 페이스북에 올린 '단식 일기'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했다.
"댓글 대부분이 저랑 유민이 아버지 응원한다, 세월호 특별법 꼭 돼야 한다는 내용이에요. 이게 민심이죠. 그런데 언론에서는 가족들이 보상금, 특례입학을 요구한다고 했다느니 이상하게 보도하더라고요. 제가 페이스북을 직접 한 게 언론을 못 믿어서였어요."
그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어떤 인터뷰든 마다하지 않았다. 인터뷰 사이사이는 시민들과의 즉석 만남 시간이다. 광장을 찾은 시민들로부터 휴대폰 '셀카'와 사진 요청이 쇄도했다. 지난 3일간의 단식으로 힘들 법도 하건만 내내 웃는 낯이었다.
"낮에도 시민들이 엄청나게 구경오세요. 앉을 틈도 없이 몇 시간씩 사진 찍고 사인하고 그러니까 주변에서 걱정하시는데요, 제발 좀 더 오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고작 딴따라일 뿐이지만 그래도 사인 하나 받으러 오신 김에 서명에 동참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더 해드려야죠."
12 AM~5 AM. "아내가 <명량>도 못 보겠대요. 바다 나와서…"
어둠이 짙게 깔리자 시민들의 방문이 뜸해졌다. 유민이 아버지 천막이 닫혔다. 단식 참가 시민들과 유가족들도 천막 안에 모기장을 치고 잘 준비를 했다.
단원고등학교 희생자 학부모들은 짝수, 홀수 반을 나눠 교대로 천막을 지킨다. 이날은 짝수 반 학부모들 순번이었다. 8반에서는 제훈이, 세호네 아버지가, 10반에선 소진이, 가영이, 지아네 어머니가 왔다.
새벽 1시가 되자 소진이 어머니가 "빨리 화장실 갔다 오자"며 다른 어머니들을 앞세운다. 새벽 1시 30분이면 지하철 역사가 문을 닫아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으니 그 전에 다녀와야 한다. 인근 24시간 카페를 이용해도 되지만, 유가족들은 최대한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다들 화장실도 다녀오고 잘 준비를 마쳤지만, 광장의 불은 꺼질 줄 몰랐다. 한쪽에서는 자원 봉사자들의 노란 리본 만들기 수공업이 한창이었다.
고(故) 박예슬 학생 전시회가 열리는 서촌갤러리 지킴이 김미숙 씨는 기자들에게 리본을 예쁘게 매는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기왕이면 오시는 분들이 서명하고 기분 좋게 돌아가시면 좋잖아요."
다른 한쪽에서는 유가족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제훈이 아버지 김기현 씨는 생전의 제훈이가 얼마나 멋진 남자였는지 자랑했다.
"키가 186센티미터였어요. 몸도 좋고. 같이 목욕하는 걸 싫어하던 애가 사고 나기 이틀 전에 갑자기 등을 밀어달라고 하더라고요. 등을 보는데, 남자가 봐도 반할 만한 몸매였어요. 몸도 좋은 애가 성격은 완전 순둥이였어요. 동생이랑 한 살 차이 나는데, 둘째가 그러더라고요. '천사 형아가 있어서 행복했다'고요. 심부름도 안 시키고 자기가 짜증 내면 형이 다 받아줬다고.
매년 첫째, 둘째랑 다 같이 여름에 캠핑을 많이 다녔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둘째라도 데리고 어디 다녀오려고 하는데 집사람이 바다는 싫다고 하더라고요. 어제도 영화 <명량> 보러 갔는데, 못 보더라고요. 바다 자체를 못 보겠대요."
제훈이 아버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참 답답해요. 저희는 진상규명하고 재발방지대책 만들자는 것뿐인데 그게 왜 어려운 건지…. 그래도 광장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저희 뜻에 공감해주시고, 서명하시는 걸 보면 너무나 고맙죠. 나쁜 놈도 많지만, 또 그만큼 따뜻한 분이 많아서 대한민국이 돌아가는 것 같아요."
세 어머니도 시간 늦은 줄 모르고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팔뚝 탄 것 봐봐. 예전에 KBS 갔다가 청와대 간 날 이렇게 탄 거야. 다음날 오후까지 뙤약볕에서 아주 죽는 줄 알았어."
"맞아, 그때 엄청 더웠어. 그게 5월이었으니 벌써 옛날 얘기네. 그만큼 시간이 흐른 거야. 변호사님 말이 '우리'니까 이만큼 끌어 올렸다고. 특별법 얘기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라고 그러더라고."
"우리도 그렇지만 진도 분들도 대단하지, 얼마나 피해를 볼 거야. 너무 고맙더라니까. 그래서 진도랑 안산시랑 6월에 농수산품 직거래 장터를 열어서 도연이 엄마랑 잽싸게 가서 멸치랑 다시마랑 사가지고 왔어. 다행히 거의 다 팔았다더라고."
유가족들의 이야기는 푸념과 한탄으로 시작해 인심 좋은 시민들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내는 것으로 끝났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유가족들은 이순신 장군의 가호 속에 잠이 들었다.
5 AM~12 PM. "협상이 잘 돼야 유민이 아버지가 단식 그만하실 텐데…"
광화문 광장의 밤은 늦고 아침은 빨리 찾아왔다. 어슴푸레한 새벽, 하나 둘 천막 밖으로 나왔다. 사위가 밝고 시끄러워 잠을 설친 탓인지 모두 찌뿌둥한 표정이다. 김수민 씨와 김의현 씨는 물티슈로 대충 얼굴을 닦은 뒤 아침 운동을 한다며 청계천으로 갔다.
매일 그렇듯 오전 9~10시께 다시 속속 자원봉사자들과 단식 참가자들이 모이고, 서명 부스가 차려졌다. 다른 날과 달리 이날 오전엔 약간의 긴장감이 맴돌았다. 새누리당-민주통합당의 원내대표 회담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 유가족 모두 이날 회담 결과가 어찌 될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정오 즈음, 안산에서 새 유가족들이 도착했다. 1반, 3반, 9반 학부모들이었다. 천막을 나서는 8반, 10반 유가족들이 유민이 아버지를 걱정했다. "오늘 잘 돼야 유민이 아버지가 그만하실 텐데"라며 기대 반, 걱정 반 섞인 목소리였다.
12 PM~6 PM. "분수대에서 뛰노는 저 아이들을 위한 거니까요"
단식 4일째, 드디어 고비가 온 듯 김장훈 씨가 한낮인데도 잠깐 드러누웠다. 옆 천막의 유민이 아버지는 여전히 흐트러짐 없이 정좌를 유지했다. 좀 전에 모인 다른 유가족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두 시 경, 갑자기 유족들의 언성이 높아졌다. 야당이 진상조사특별위에 수사권과 기소권, 특검추천권도 챙기지 못한 채로 회담이 마무리됐다는 속보가 뜬 뒤였다.
"인터넷에 나온 게 맞대요? 어떻게 해요?", "어휴, 이럴 줄 알았어."
유가족들은 자신들이 본 기사 내용이 맞는지 현장을 찾은 기자들에게 재차 물었다. 그리고 국회에 나가 있는 다른 유가족들에게도 전화해 확인했다. 낙담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원봉사자, 단식 참가자들도 소식을 전해 듣고 펄쩍 뛰었다. 그러나 이내 서명 용지를 들고, 또 자보를 몸에 붙이고 묵묵히 원래 제가 하던 일들을 했다.
"저희가 이렇게 뒤통수를 맞네요. 선거 때 잠깐 우리를 이용한 거라고 밖엔 생각이 안 들어요. 이제 유가족들은 가족들이랑 여기 오셔서 힘 주시는 국민들밖에 믿을 데가 없네요."
9반 경미 아버지 오태원 씨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회담 결과에 자극받아 더 열심히 서명 운동을 받는 자원 봉사자들 덕분인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셀카 찍기'에 나선 김장훈 씨 덕분인지 광장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차도 소음, 애타게 서명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섞여 시끄러웠다. 천막동 저편 분수대에선 물놀이에 신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경미 아버지에게 씁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뇨, 보면 좋아요. 애들 웃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잖아요. 저 애들 위해서 우리가 노숙자 취급도 받으면서 이렇게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광장이 저희만 쓰는 것도 아니고요. 좌절할 수도 없는 것 같아요. 별수 있나요. 더 열심히 싸우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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