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진심이 아니면 귀찮게 하지 마라'는 최근 중국의 방송 유행어까지 인용하면서 일본의 중‧일 정상회담 제안(7.14)을 거절했다. 그런데 '진심이 아니면 귀찮게 하지 마라'는 말은 요즘 남한과 북한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남북이 요즘 서로 거창한 제안들은 많이 하는데 접점이 안 생긴다. 피차 진정성이 없는 제안들을 하기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연초부터 '중대제안', '특별제안', '공화국 정부 성명'등의 형식으로 남북대화를 요구했다. 군사훈련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빠트리지 않으면서도 자기네는 동해 상으로 미사일을 쏘고 방사포를 쏘아댔다. 시기 면에서 북한의 이런 군사행동은 미 항공모함의 부산 입항, 8월 한미연합훈련을 의식해서 미리 엄포를 놓는 것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북한은 좀 시차를 두고 대남제의를 했어야 그나마 제안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북한의 헷갈리는 화전양면 전술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은 '진심이 아니면 귀찮게 하지마라'는 반응밖에 내놓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남한도 북한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던 지난 1월 초, 박 대통령이 갑자기 통일대박론을 터뜨렸다. 곧이어 남재준 국정원장이 지난해 말 국정원 간부 송년회 자리에서'2015년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예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자연히 통일대박론은 북한붕괴를 전제로 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 와중에 3월 하순 독일을 방문한 대통령이 북한에 많은 것을 주겠다는 내용의'드레스덴 선언'을 발표했다. 그런데 북한은 국방위원회 명의로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우리로 치자면 청와대가 직접 반박을 하고 나선 셈이다. 박 대통령은 진심으로 북한을 돕겠다는 취지였겠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드레스덴 선언'도 흡수통일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굶주림에 떠는 아이들이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아직도 탈북자가 계속 나온다"와 같은 말들이 북한의 자존심을 심하게 건드렸을 것이다. 없는 일을 꾸며낸 건 아니고 대북지원 제안 내용들이 설사 북한이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이런 토를 달고 주겠다고 하면 북한으로서는 그걸 받을 수 없다고 본다. 진정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드레스덴 선언에 대한 반발의 여파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5월 북한은 이미 몇 차례 민간단체들의 대북지원을 드레스덴 선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면 거절하겠다고 했다. 결국 대북지원이 성사되지 못했다.
6월 26일 민간단체인 '겨레의 숲'이 개성에서 북한과 만나 북한지역 산림 병충해 방제사업을 같이 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7월 14일 북한은 '겨레의 숲'의 대북사업이 '드레스덴 선언'의 일환이라는 언론보도가 있었다는 이유로 남쪽의 지원을 안 받겠다고 통보해 왔다. 필자는 이런 반응이 북한의 편협성 때문에 나온 것만은 아니고 우리 정부 쪽에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 외형은 번드르르 하지만 북한에게는 위협적으로 읽히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제안을 많이 해왔기 때문이다.
남북관계가 꽉 막혀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통일준비위원회 발족도 통일대박론처럼 북한붕괴와 흡수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의심을 할 수 있다. 그런데다가 통일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킨 날 정부는 드레스덴 선언 이행 차원에서 북한의 진료소 지원, 온실 지원, 낙농 지원에 남북협력기금 30억 원을 쓰겠다고 발표했다. 통일준비원회부터 출범시켜 놓고 며칠 있다가 그런 발표를 해도 좋았으련만, 통일준비위원회가 출범한 날 정부가 3개 분야 대북지원은 드레스덴 선언과 관련 있다고 공표해 버렸다. 따라서 '겨레의 숲'의 선례를 감안할 때, 북한은 처음부터 관련 협의 자체를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정부의 조치는 생색내기도, 체면치례도 못 된다.
필자는 우리나라 외교의 기본 축은 한미동맹 강화보다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남북관계를 잘 관리해나가야만 한미동맹도 한중동반자 관계도 국익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정부는 남북관계를 지금처럼 가져가면 안 된다. 북한에게 진정성을 요구하기 전에 우리부터 진정성을 가지고 대북제의도 하고 대내조치도 취해야 한다. 주는 입장이라고 해서 받는 쪽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 주려고 하면 안 된다. 받는 쪽의 체면이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토를 달면 결국 생색만 내고 실제로는 주지 않으려는 것이라는 비난을 해도 할 말이 없어진다.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대통령과 정부가 뭐에 쫓기듯이 대북제안을 자꾸 내놓는다. 그러나 진정성이 없으면 북한도 움직이지 않는다. 북한이 싫다고 하면 대북정책이나 제안은 아무 소용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새것을 자꾸 내놓으려 하지 말고 차라리 취임 초에 발표한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차분하게 추진해 나가기 바란다. 당면해서는 대승적 자세로 북한의 대화제의를 받아 드리기 바란다. 군사문제에 대한 북한의 일방적 요구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들어갈 것이다. 인천 아시안게임 참가에 대한 지원 문제 협상을 계기로 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지난 17일 인천 아시안 게임 참가 북한 선수단․응원단 지원문제 협상이 결렬됐지만, 아마도 북한은 다시 나올 것이다. 다음번 접촉이 이뤄지면 지원문제는 전례대로 해주는 것이 좋다. 국제기준이 어떻다느니 핑계를 대는 것은 모양새가 안 좋다. 선수단과 응원단 규모를 좀 줄이라는 요구는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치러지는 국제 체육행사에 북한이 참가를 하지 않는 일이 생긴다면, 국격이 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가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진심이 아니면 귀찮게 하지 마라"는 말을 북한에 떳떳하게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도 북한을 좀 넉넉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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