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가 4월 16일 침몰했다.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침몰된 상태로 몇 시간을 물 위에 머물렀던 그 배에서 이렇듯 300명이 넘는 이들이 죽음에 이르리라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했다.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사고사가 아니라 '사건'이고 심지어 '수장'으로 보였다.
눈뜨고 번연히 목격한 수장의 장면, 그리고 우리들의 무력함. 그것은 너무도 충격이었다. 이후에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알아내고 그 죽음의 원인제공자들을 밝혀내고 처벌해야겠지만, 많은 이들은 이미 세월호의 죽음이 '사회적' 혹은 '제도적 타살'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었다. 더불어 세월호에 탔다가 죽은 이들 300 여 명 중에 230명가량이 학생이었다는 점에서 생때같은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의 비통함에 대한 공감과 애도의 심정은 이른바 애도 정국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점차 정치적 분노로 번지고 있다. 온 나라가 상중이다. 그리고 사회적 애도를 하는 중이다. 그런데 나는 궁금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정의감을 분출하는데,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강한 분노와 절망을 드러내는데, 이나라는 왜 계속 이 모양이(었)지? 이 사회는 왜 이 모양이(었)지? 나는 계속 이것이 궁금했고 지금도 궁금하다.
지금 정부나 언론이 뭐라고 말을 해도, 대한민국의 대중은 2008년 촛불에 이어 다시 한 번 놀라운 '집단지성'의 면모를 보이면서, 정부와 언론보다 앞장서서 그리고 그들이 '유언비어'로 치부했던 추론을 점차 사실로 확인시키고, 나아가 이 과정에서 감춰진 진실을 규명하고 있다. 또한 "침몰은 자본 탓, 구조는 국가 탓"이라는 구호가 대변하듯이, 그들은 이 사건의 진정한 주범은 바로 이윤추구의 자본과 그를 방조해온 반생명적인 국가, 나아가 무능과 무책임과 부패의 냄새를 잔뜩 피우며, 침몰된 배에서 단 한 사람도 구해내지 못한 정부라고 보고 있다. 그렇듯 대중은 세월호 사건과 그로 인한 죽음에 대해 초기의 감정적인 발산을 넘어서, 매우 빠른 시간 내에 꽤나 정치한 사건 분석을 제공하는 가운데 사건의 원인 제공자에 대한 지목에 이르렀고, 나아가 이 사회체제의 모순에 대한 분노와 절망, 나아가 정의감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나는 궁금한 것이다. 이렇듯 언론과 정부의 여론 조작에도 휘둘리지 않는 이성을 갖추고, 그리고 이들 사회적 죽음에 이토록 흡인력 있는 공감력을 보이며, 실천하는 정의감을 갖춘 우리들의 사회는 왜 이 모양일까. 혹은 이렇게 이 사회의 문제점을 즉각 알아채면서 여태껏 우리는 이 사회를 이 상태로 방치했을까. 그들을 죽게 했을까.
이 질문에 바로 직접적으로 대답하겠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이유는, 여전히 이른바 '우리'의 정의감이 그리고 그 분노와 절망이 모호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복수적이고, 다층적이고, 분열적이고 심지어 자기충돌적이(었)기 때문이다. 배가 침몰한 이후 1명도 구조해내지 못하는, 아주 수상한 해경과 그들을 지휘하는 이 정부, 그리고 그런 정부의 말을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언론이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저들이 아니라, 우리가 항상 문제적이(었)다. 즉 '우리'라는 이 집단적이고 구성적인 존재 말이다. 과연 이 '우리'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이 죽음에 대해서 과연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입장 그리고 하나의 방향으로 갈 수 있나. 즉 '우리'는 구성되어 있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금 세월호 참극 앞에서 우리가 보이는 슬픔, 집단적 애도는 그렇게 순결하지도 않고,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다. 모두가 공분하고 공감하고 함께 하자일 듯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이다. 그 슬픔과 애도는 각자의 존재 조건 속에서 천차만별이며, 각자가 이미 가진 세계관과 정치관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한 자세 속에서 또 한 번 굴절되며, 종국에는 다양한 방향을 지향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각자의 존재조건이고, 각자의 세계관과 정치관, 이 사회에 대한 자세다. 그것들이 현재의 집단적 애도에 깃들어 있는 사회적 맥락이다. 그리고 애도의 정치학이다.
그럼 우리는 '이번에는'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즉 세월호 침몰사건 혹은 참극은 우리를 기존의 삶의 방식으로 폐기하고 새로운 삶의 자세로 이끌어줄 수 있을까. 진정 한국사회는, 누군가들이 말하듯, 2014년 4월 16일 그 침몰의 시점 전과 후로 나뉠 수 있을까. 달리 말하면 우리는 정말 애도와 추모 국면을 넘어서 보편적인 각성에 이르러 새로운 사회적 연대의 서사를 써낼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사회를 재구성하는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까. 잊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들의 죽음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단락에서 나는 '이번에는'이라고 말했다. 그럼 이전에도? 나는 어떤 반복되는 과거를 말하는 것일까. 맞다. 흥미롭게도 나는 세월호 침몰과 이 사회와 이 국가로부터 구조되지 못한 죽음들에서 용산 참사를 연상했다. 용산 참사. 우리의 눈앞에서 죽어간 사람들. 번연히 눈을 뜨고서 목도한 죽음들. 그리고 노동의 죽음을 연상한다. 2012년 12월 23일, 바로 대통령 선거 다음날부터 시작된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 또한 최근에는 송국현이라는 이름의 3급 장애인은 집에 불이 나자 마비된 몸으로 침대 밖으로 걸어 나오지 못해 그냥 불에 타 죽어야 했다. 마치 세월호의 선실에 갇힌 아이들처럼, 번연히 밖에 구조랍시고 와서 설쳐대는 해경들이 모르는 채….
이들의 죽음 역시 이 사회와 이 국가로부터 구조되지 못한, 혹은 방치된 죽음이다. 이런 죽음들만이 아니다. 보다 더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틀 속에서 매일 죽어가는 노동자들이 있다. 우선 대량 정리해고로 해고당한 노동자들이 있다. 그 정리해고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중 알려진 죽음만 해도 25명에 다다를 만큼, '사회적 타살'로 알려져 있다. 그 죽음들은 또 무엇을 남겼을까. 또 산업재해로 하루에 5명씩 사라지는 노동의 죽음은 또 어떠한가. 세월호 참극이 우리 모두를 분노케 할 때, 울산 저 차가운 바다 속으로 또 한 명의 현대중공업 비정규 사내하청노동자가 떨어져 죽었다.
벌써 한 달 새 6명, 이 해 들어 8번째 현대중공업 내 죽음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는 그때 그 순간에도, 전주의 해고 버스 노동자 진기승은 회사의 인격모독과 노조파괴 공작에 항의하며 목을 매 투신하여 사경을 헤매다 결국 절명했다. 그의 죽음은 아직도 장례를 지내지 못한 채 구천을 헤매고 있다.
사람들은 세월호의 삼백여 명이 넘는 죽음들을 매우 안타까워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 죽음과 이 죽음들의 차이를 모르겠다. 나는 이 노동자들의 죽음과 장애인들의 죽음과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의 차이를 모르겠다. 그리고 세월호 아이들의 죽음과 세월호에서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인 20세 비정규직 일당 승무원으로 일하다 죽은 이들의 죽음의 차이를 모르겠다. 왜 이 사회가 이 죽음들의 등가성을 인정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왜 이렇듯 억울한 죽음에, 사회와 국가가 타살한 죽음에, 구조하지 못한 죽음에 안타까워하는 이른바'우리들'이 동일한 애도와 추모를 표시하지 않는지 묻고 싶다. 내 눈엔 다 똑같은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죽음들인데 말이다.
하지만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죽음도 평등하지 않다. 우선 세월호에서 일당 고용된 20세 승무원들은 승선자 명단에도 누락됐다가 포함됐고, 일당 승무원이기에 선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회사의 장례비 상조를 받지 못했으며, 심지어 안산의 합동분향소에 안치되지도 못한 채 쓸쓸이 사라졌다. 죽음만도 억울한데, 죽고 나서도 애도와 슬픔에서 제외된다면 얼마나 쓸쓸하랴. 더구나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은 또 어떤가. 그리고 서울 시청광장 너머 한귀퉁이 골목에 차려진 장애인 송덕현의 분향소는 또 어떤가. 그리고 지난해부터 시작된 노동자 죽음의 행렬이 노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기운 속에서 멈추길 기대했으나, 결국 쌍용차에서는 25번째 죽음이 벌어진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한국에서 벌어진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나는 한국인들이 이때껏 벌어진 일상적인 죽음들이 세월호와 어찌 연결되는지, 그 죽음들의 일체성을 깨닫기를 바란다. 나아가 지금껏 이렇게 도사린 위험과 상존하는 죽음에 대해 무심했던, 자신의 안위와 안녕을 위하고 걱정했던 우리의 이기심을 숙고하길 바란다. 그 죽음들의 등가성을 이해하는 것은 사회적 애도를 사회적 연대로 모아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자!", "더 이상 죽이지 말라!"라고 외쳤다.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 죽음들을 막지 못해서, 즉 이윤추구 기계 자본의 일방적인 폭주를 저지하기는커녕, 자본을 향한 규제를 다 풀면서 이 사회는 더욱 더 위험하고 불안정한 사회가 되었다. 시장에서 자본의 감시자 노릇을 하면서 사회와 인민을 방어해야 할 국가는 그들의 직무를 방기하였다. 그래서 이들 죽음의 원인은 똑같은 것이다. 이들 죽음도 똑같은 것이다. 결국 이들 죽음들 사이의 거리를 좁혀서 사회적 연대의 정치학을 새로이 쓸 때 우리는 반복되는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과정이다. 즉 너무도 자명하게 여겨지는 우리의 애도에서, 애도 말고 '우리'를 문제화해야 한다. 이들을 애도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이들 죽음을 평등하게 대하지 못하는가. 애도와 추도는 어떻게 하여 사회적이고 또 심지어 계급적이기도 한가. 그래서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사회적 죽음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정치학을 구성할 수 있을까. 즉 '우리'를 재구성할 수 있을까.
* 이 글은 <황해문화> 2014년 여름호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 "'우리'의 정치적 재구성을 위한 사회적 연대의 정치학" 중 머리말을 수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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