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큰 태풍이 지나간 느낌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방한으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더니 이제야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시진핑 방한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갔을까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다.
이번 시진핑 방한 기간 양 정상은 성숙한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하면서 주로 정치안보 분야와 경제 분야, 인적·문화적 교류 분야에서 구체적 사업들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북핵 문제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다. 의제 면에 있어서 이번 시진핑 방한은 당초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경제, 인적·문화적 교류 분야에서는 다양하게 수확한 반면, 정치외교 분야에서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오히려 서로의 입장 차를 확인하는 실망스런 회담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신원롄보(新闻联播)에 나타난 중국의 본심
이번 정상회담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은 무엇보다 양국이 발표한 공동성명 및 그 부속서의 합의 내용, 그리고 양 정상의 공동기자회견 발언 및 중국 관영 언론의 보도 내용 등을 입체적으로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3일 오후 한중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 양국 정상은 청와대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을 공동성명의 형식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중국에서는 대표적 관영 언론인 <신원롄보(新闻联播)>가 첫 뉴스로 한중 정상회담 관련 보도를 내보냈다. 그런데 의아했던 것은 이 보도 내용 중에는 공동성명이나 공동 기자회견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원롄보(新闻联播)>는 시진핑 주석이 정상회담 자리에서 양국이 몇 가지 방면에 중점을 두어 노력을 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하면서 그중 하나로 "내년은 세계의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이면서 중국의 항일전쟁승리 및 조선(한)반도의 광복 70주년이기도 하다. 양국은 (공동)기념 활동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했음을 밝혔다.
공동성명에는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 중국 관영언론에서는 강조됐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공동성명은 양국 정상이 합의한 내용만을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양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국익의 마지노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중국에서 관영 언론은 당과 정부의 방침을 따르는 선전도구로서 중국 당국이 강조하고 싶은 내용들이 담기게 된다. 즉, 중국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국에 내년에 항일 기념활동을 공동으로 진행할 것을 제안했지만, 한국이 이를 부담스러워해 결국 공동성명에는 넣지 못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한국이 무엇을 부담스러워 했을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문제는 이런 정황이 이번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 곳곳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시진핑 주석의 방한 전부터 민감한 의제가 될 것이라고 점쳐졌던 한국의 아시아기초시설투자은행(AIIB) 가입 문제가 공동성명이나 공동기자회견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중국 관영언론에서는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보도됐다. <신원롄보(新闻联播)>는 "중국은 아시아기초시설투자은행(AIIB) 및 아태자유무역지대(FTAAP) 건설 등 방면에서 한국과 협력을 강화하길 원한다", "한국은 중국이 제안한 아시아기초시설투자은행 건설에 대해 높이 평가하며, 중국과 관련 사안에 대해 계속 소통해 나가기를 원했다"라고 공개한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 박근혜 정부가 가장 공을 들였던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다. 청와대 및 정부는 공동성명에 담긴 "양측은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개발에 확고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는 내용을 강조하며 사실상 중국이 지금까지 가장 높은 수위로 북핵 반대를 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공동기자회견에서 "오늘 회담에서 두 정상은 북한의 비핵화를 반드시 실현하고 핵실험에 결연히 반대한다는데 뜻을 같이 하였습니다"라고 북한을 특정하여 비판했다.
하지만 시진핑 주석은 공동기자회견에서 기존대로 "한반도의 비핵화"만을 언급했으며, 6자회담 재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게다가 그날 저녁 중국 관영언론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중국은 조선(한)반도 문제에 있어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조선(한)반도 비핵화 목표 실현을 위해 견결히 노력할 것이고, 조선(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견결히 노력할 것이며,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견결히 노력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고 보도했다.
즉, 우리 사회 내부에서 시진핑 주석이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방문하는 것에 대해 흥분하며, 이번 방한 기간 중국이 북핵 문제에 대해 강경한 메시지를 나타낼 수 있다고 잔뜩 기대했지만 결과는 빗나갔다. 이 대목은 우리 사회에 두 가지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는 우리가 중국의 힘을 빌려 북핵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의존성이 다시 한 번 드러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아직 중국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질의응답 없는 기자회견
이 밖에도 공동성명과 기자회견 내용, 그리고 중국 관영언론의 보도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번 한중 정상회담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이 없었던 공동기자회견이 아닐까 싶다.
청와대의 설명에 따르면 정상회담이 길어져서 기자회견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중 사이에 중요 현안이 이렇게 많은데 기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혹시 민감한 질문에 답변하기가 곤란했던 것은 아닐까? 기자들로부터 북핵문제라든지, 일본 우경화, AIIB 가입 문제 등등 민감한 질문을 받을 것이 예상되었지만 이에 대해 한중간에 뚜렷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대답하기가 곤란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흔은 남았지만, 어쨌든 G2시대의 큰 태풍 하나가 지나갔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곧 제2, 제3의 태풍이 다가올 것이라는 점이다. 이번 태풍을 계기로 우리가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지 숙고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주 외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균형', '중립'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나 이론은 쉽지만 실천이 어렵다는 게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자주나 중립을 주장하면 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군부는 미국 쪽으로, 재계는 중국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도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다. 북한을 실질적인 '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미국에 군사적으로 의존해야 하고, 중국의 대북 영향력으로 뭔가 해보려고 망상에 빠져있는 것 아닌가. 북한과의 관계가 멀어질수록 우리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더 많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이번 시진핑 방한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가장 큰 교훈은 "시급한 남북 관계 개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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