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각국의 플랜-B 외교
영리한 토끼는 굴을 세 개 준비한다는 교토삼굴(狡兎三窟)이라는 고사성어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다양한 대비책을 마련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위험이 닥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하는 토끼의 지혜는 선택이라기보다 처절한 삶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맹수가 우글거리는 정글과도 같은 동북아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외교에 이런 전략이 절실하게 요구되지만 우리의 현재 모습은 딴판이다.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그리고 스스로의 역량으로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울수록 백업 플랜(Back-up Plan) 또는 플랜-B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만 손 놓고 있는 사이 다른 국가들은 앞다투어 다양한 플랜-B 마련에 나서고 있다. 세계 최강 미국과 중국도 강온전략을 모두 사용하고, 세계의 외톨이 북한과 동북아의 외톨이 일본조차도 플랜-B를 마련하는 대화에 나서고 있지만, 유독 한국외교만 친미일변도 외교의 플랜-A 외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본격화된 북·일 관계개선 움직임은 한국외교의 단순·무식·과감한 사고체계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조합일 것이다. 일본과 북한은 한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에도 알리지 않고 비밀회담을 통해서 일본인 납치자 재조사와 독자적인 대북제재의 일부를 해제하는 스톡홀름 합의를 전격적으로 이끌어냈다. 지난 수년간 미국의 아시아재균형전략의 선봉대를 자처하며 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신(新)냉전적 대중봉쇄를 노골화해왔던 일본의 플랜-A와는 전혀 다른 행보로써 최근 한-미-일 3각 군사협력을 구축하려는 한미 양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물론 미국정부에 고위당국자를 파견하고 대북공조균열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는 등 진화에 나섰지만 북-일 정상회담의 가능성까지 거론할 정도로 양국의 접근은 일본의 플랜-B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다. 어쩌면 한국보다 더 친미적 자세를 견지해온 일본임에도 세력 전이의 불확실한 동북아정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정책의 논리를 앵무새처럼 대변하며 대미충성심과 대북적개심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 한국외교의 현주소다. 일본은 대러시아 관계개선에도 적극적인데, 크림반도사태로 주춤했지만 2차대전 종전을 위한 평화협력과 북방 4개 도서 문제의 해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북한 역시 핵실험 이후 국제사회의 공공의 적으로 압력과 제재에 직면한 상태에서, 여러 개의 대안적 '굴 파기'를 통해 고립을 탈출하고 생존을 모색하고 있다. 일본 국내정치를 위해 아베 정부가 가장 원하는 납치자 문제에 전향적 자세를 보임으로써 대북압박 공조의 한 켠을 허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더 나아가 러시아와의 협력도 점차 활성화되고 있다. 북한은 러시아 극동개발의 욕구를 인지하고 나진항을 둘러싼 개발협력을 적극 추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러시아 하원이 1980년대부터 축적되어온 북한의 대러시아 부채의 90%에 해당하는 98억 7천만 달러를 탕감했을 뿐 아니라 투자협정까지 체결하였다.
미국과 중국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 들어 미국의 대중봉쇄가 상당히 가시화되고, 중국 역시 과거에 비해 미국의 전략에 대해 훨씬 더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어느 하나의 전략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니다. 양국관계가 불신과 협력이 교차하는 양상 속에서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만 움직여왔다. 즉, 양국의 이익이 충돌하는 지점도 많지만, 동시에 미·중 갈등이 결코 위험수위에는 이르지 않도록 조절 중이다. 그들은 여전히 공세와 협력 사이에서 '간보기'를 하면서 국익의 최대화를 위해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대미중독의 플랜-A만 있는 박근혜 외교
반면에 박근혜정부의 외교는 지난 16개월 동안 '친미반북'이라는 단 하나의 전략에만 집착하고 있다. 지지파와 반대파를 막론하고 적어도 재난에 가까운 외교실패를 범했던 이명박 정부와는 다를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는 시작부터 흔들리더니 이제는 우려와 실망감만 안겨주고 있다. 진보정권 10년과 이명박 정부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며 대북강경정책을 완화하고, 친미일변도의 외교를 벗어나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시도한 적이 없다.
일견 망가진 한중관계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외교는 한미동맹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맹을 신성시하면서 남북대결구조는 강화하는 패턴이 박근혜정부에서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외교의 대미중독현상의 기저에는 두 가지 사고가 깔려있다. 하나는 한국과 미국의 이익은 어떤 경우에도 같을 것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어떤 경우에도 미국이 한국의 편에 서서 한국을 도울 것이라는 사고다. 둘다 국제정치 현실을 모르는 치명적 착각이다.
물론 강대국의 세력재편이 치열한 동북아에서 미국은 지켜야 할 우방이며 관계심화를 통해 얻을 이익이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연히 한국과 미국은 별개의 국가이며 이익은 반드시 수렴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미국도 자신의 이익을 희생해가면서 우리를 도우라는 법은 없다. 동북아안정이나 북한비핵화 등 포괄적인 부분에서는 이견이 없을지라도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나 디테일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그 수단이나 디테일이 더 중요할 경우가 많음에도 한국외교는 거의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행보는 또 두 가지 점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먼저 우리가 스스로 대미외교의 레버리지를 사실상 포기했다. 한국은 사우디와 함께 미국무기의 최대 수입국이지만, 구입과정에서 우리의 요구사항이 반영되거나 반대급부를 요구한 적은 거의 없다. 가장 좋은 예로 전투기구매에서 한국이 원하는 방식으로의 개조와 기술이전을 약속하고 있는 유럽을 뒤로하고, 정비조차 우리 독자적으로 할 수 없는 최악의 조건에서도 100퍼센트 미국의 전투기만을 구입해온 것을 들 수 있다. 공동개발의 파트너대접을 받으며 기술이전을 고스란히 받는 일본과는 천양지차다. 그 외 양국의 주요 현안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원자력협정, 주둔분담금 협상, 그리고 MD 참여문제 등에서 우리는 거의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대미중독외교가 초래하는 또 다른 문제점은 미국의 전략적 인내 및 대북강경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는 지금까지도 사실상의 무(無)전략이자 방치였으며 최근에는 더욱 강경해졌다. 전임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책의 키워드였던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원칙까지 부활시킬 정도다.
더 심각한 것은 미국 대북전략의 우선순위가 이제 해결보다 북핵위기를 이용해 아시아동맹네트워크를 강화해 중국을 견제하는 데로 무게중심이 옮겨간 것으로 판단된다는 점이다. 위기상황을 디폴트화 시켜서 계속 끌고 가는 것은 다른 국가들에게는 혹시 이익이 될지 몰라도 정작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는 결단코 바람직하지 않다.
플랜-B로서 북한과의 대화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미국의 대화 거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근거가 불분명한 북한급변론만 붙들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을 포함하여 최고위층은 반복적인 최후통첩식 발언으로 북한을 자극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안보불안을 과장하는 구태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데, 이런 행보가 계속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진짜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지금까지 제의한 신뢰프로세스, 동북아평화협력구상, 통일대박론, 드레스덴 선언 등이 발표하자마자 곧바로 추동력을 상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외교란 결국 국가 간 신뢰가 힘든 국제정치에서도 상대방을 설득해 국익을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외교이며, 더욱이 현실의 국제관계에서는 '신뢰'관계보다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 또한 신뢰는 협상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당사자 사이에 우선 대화나 합의가 있고, 그것을 이행해나가면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플랜-B가 될 수 있는 중국에 대해서는 한국의 계속되는 친미일변도 노선으로 그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지난 1년간 워싱턴과 평양을 빈번하게 오가며 대화 재개를 위해 노력했던 중국은 한미 양국이 대화재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을 대북압력수단으로만 바라보는데 대해 한계를 느끼고 반발하고 있다. 최근 주미 중국대사 추이텐카이(崔天凱)가 미국이 중국에 요구하는 대북압력 역할은 "불가능한 미션(mission impossible)"이라고 언급한 것은 이러한 중국정부의 좌절감을 대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 재개를 위한 한국의 이니셔티브 발휘가 절실하게 요구되지만 한국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동맹중독의 무능외교에 희망은 있는가?
북한의 핵포기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지고, 포기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점점 커지고 있다. 조나단 폴락(Jonathan Pollack)의 말처럼 김일성일가가 통치해온 방법에 의존하지 않은 다른 형태의 체제와 리더십이 들어서기 전에는 북핵문제는 아예 '출구가 없을(no exit)'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할 것이 아니라면 대화를 통할 수밖에 없다. 당장의 핵폐기가 어렵다면 일단 핵물질을 추가 생산하고 실전 배치하는 것을 동결하거나 지연시켜야 한다. 그리고 핵폐기를 위한 회담을 이어가면서 북한을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그런 의지와 전략이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북한과 주변 4강의 복잡한 이해관계의 방정식을 냉정하고 철저하게 분석함으로써 다양한 대비책을 마련하려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대통령 자신이 대미의존성향이 심한 데다 전쟁을 일상적인 용어처럼 사용하는 안보과잉과 친미의식에 젖은 친미엘리트들이 핵심에 포진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국내정치적 기반이 강력한 보수친미 세력에 있기 때문에 한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미국을 설득해 대화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친미 및 대북강경정책을 주도해 온 육사 출신 3인방 중 국정원장 남재준과 안보실장 김장수가 물러났지만 김관진 국방장관을 안보실장에 기용한 것을 보면 변화보다는 문제의 지속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나폴레옹은 "작전을 세울 때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겁쟁이가 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위험과 불리한 조건을 과정해보고 끊임없이 '만약에'라는 질문을 되풀이한다"라고 했다. 한국 외교가 현시점에서 반드시 곱씹어봐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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