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탈취'. 군사독재 시절에나 거론됐던 이 험악한 단어가 근래 사람들 입에 다시 오르내리고 있다. 염호석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양산분회장이 지난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벌어진 일련의 상상 밖 일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복기하자면 이렇다. 염 분회장은 강원도 정동진 인근 해안도로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 주십시오. 지회가 승리하는 그날 화장하여 이곳에 뿌려주세요'라는 유서가 공개됐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라고도 해 오랜 요구인 생활임금 보장과 노동조합 인정이 현실이 되기를 염원하기도 했다.
애초 고인의 양친은 비보를 접한 직후, 고인의 유서에 따라 장례 절차 일체를 노조에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부친은 하루 만에 석연치 않은 정황 속에 돌연 '가족장'으로 입장을 바꾼다. 이 과정에서 30년 전 헤어진 고인의 모친과는 어떠한 협의도 없었으며 '삼성으로부터 거액의 제안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이가 여럿 나왔다.
경찰은 고인의 유서와 어머니의 만류에도 '아버지 요청'대로만 움직였다. 경찰 300여 명이 18일 고인이 안치된 서울의료원 장례식장에 난입해 조합원 25명을 연행하며 시신 빼돌리기를 도왔고, 20일에는 '유골함이라도 돌려달라'며 울부짖는 생모와 동료들을 향해 캡사이신을 살포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모친과 동료들은 지금도 고인의 유해가 어느 곳에 뿌려졌는지조차 모른다. 30일 오후, 허망하게 아들을 잃은 어머니 김 모(65) 씨를 만났다. 쉽지 않았을 텐데도 공개 석상에 나선 이유를 묻자 "석이한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씨와 한 인터뷰를 정리했다. <편집자>
지난 20일 경남 밀양 공설화장터에서 벌어진 일은 김 씨에게 '공포'로 남아 있다. "아직도 그날 생각만 하면 무서워서 몸이 부르르 떨린다"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는 김 씨. "그런 일은 영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복잡한 듯 보이지만, 사실 간단한 상황이다. 고인의 유서를 두고 친모와 친부의 의견이 엇갈렸다. 친부는 애초 노조장에서 가족장으로 돌아섰고, 친모는 처음부터 계속해서 노동조합장을 원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찰은 '중재'가 아닌 일방적으로 부친 편을 드는 '개입'을 택했다.
"(친부와 장례 방식에 관한) 협의 과정은 전혀 없었어요. 한 번도 애 아빠하고는 얘기도 제대로 못 나눠 봤다니까. 밀양에서도 내가 경찰한테 그랬어. 협의를 하게 해달라고. 그러니까 경찰이 애 아빠를 데리고 오긴 했는데, '이분을 아시느냐'고 묻더라고요. 애 아빠가 나를 보고 '모릅니다'라고 하대. 경찰이 그러자 '상황 끝'이라고 했어요, 상황 끝."
김 씨는 이에 강하게 항의했다. '내가 낳았다'며 경찰 가슴팍에 염 분회장의 유서를 밀어 넣었다. '네 아들이 죽어도 이럴 수 있느냐'고 소리도 질러 봤다. 그러나 밀양경찰서 정보과장은 정작 친부에게 '공식적으로 (신변) 보호 요청을 하라'는 제안을 먼저 하기까지 했다.
"왜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느냐고, 왜 나는 말도 못하게 하느냐고 막 따지는데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화장터)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리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경찰들이 갑자기 막 에워싸고 최루액을 쏘고. 순간적이었어요. 순간."
김 씨는 이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꺼내 보였다. 아랫입술이 찢긴 사진을 보여주며 "그날 경찰 팔꿈치에 맞아 이렇게 된 것"이라고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날 이후로 몸살이 와서 일주일간 앓으며 병원을 다녔다"고도 했다.
"경찰들이 양팔을 꽉 틀어쥐고는 화장터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하더라고. '내가 엄마'라고, 들어가겠다고 해도 에워싸고 잡아끌고 그래서 팔에 멍이…. 결국 유골함엔 손도 못 댔어요. 그전에 영안실에서나 애 볼때기 한 번 만져봤지, 유골함엔 손도 못 대봤어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죽은 후에야 만난 아들
김 씨는 30년 전, 여섯 살 난 어린 염 씨를 뒤로하고 집을 떠났어야 했던 이유도 설명했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했는데 (애 아빠가) 너무 때리고 노름하고 여자를 만나 견딜 수가 없었다"며 "애가 보고 싶어도 잘 살기만을 기도했다"고 말했다. "(애 아빠가) 다른 여자 만나 잘 사는데 괜히 내가 나타나면 분란만 일으키는 것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숨졌다는 경찰의 연락을 받게 됐다. 급히 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동 중에 노조를 통해 친부의 연락처를 파악하고 상황을 묻는 전화를 걸었다. '석이가 어떻게 됐는데'라는 질문에 부친은 '나도 모른다'고 한 후 두 사람은 더는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고 김 씨는 말했다.
"강릉에 있던 애를 노조에서 서울로 옮겼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서울로 가서 애 유서 보고 위임장에 서명하고 얼굴 보려고 하는데, 거기(서울의료원 장례식장)서 핏자국 있다고 안 보면 안 되겠느냐고 하더라고.
내가 엄만데, 마지막으로라도 애 얼굴 한 번 보려고 왔는데 봐야지, 당연히 봐야지. 오랫동안 못 봤는데도, 보니까 그 꼬맹이 얼굴이 큼지막해졌어. 볼때기하고 이마하고 만져보고,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어릴 때 얼굴이 있더라고. 그런데 차갑고, 입술은 보라색이고…."
김 씨는 마지막으로 본 아들의 얼굴을 이야기하며 참지 못하고 울먹였다. 비록 고인이 어렸을 때 떠나야 했지만 , '이제는 죽었으니까 내가 데려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지금 서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게 아니잖아요. 애가 유서를 그렇게 썼는데. 그거대로 따라주면 되는 거잖아. 순리대로 하면 되는 건데. 저들(부친과 부친 측 가족들)이 그렇게 휘둘리지 않았으면 경찰이 그처럼 폭력적으로 굴진 않았을 거잖아요."
김 씨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인터뷰 중간중간 '시신 탈취'라는 상황까지 일이 커진 데 대해 "내 죄"라는 한탄도 적지 않게 했다. "내가 (염 분회장을) 낳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며 "그래도 내 새끼니까, 내가 애 엄마니까 가는 것은 내가 거두고 싶어요"라는 마음을 밝혔다.
김 씨와 김 씨의 남편은 이날 인터뷰를 마친 후 염 분회장의 동료들이 12일째 노숙 농성 중이던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 앞을 찾아 고인의 분향소를 조문하고 금속노조 주최 집회에도 합류했다.
고(故) 염호석 분회장을 비롯한 삼성전자서비스 하청 노동자들은 지난해 설립된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에 가입해, 삼성과 각 하청업체들을 상대로 생활임금 보장, 노동조합 인정, 근로기준법 준수 및 조속한 임금·단체 협상 체결 등을 요구해 왔다.
특히 불안정하고 열악한 근로 조건을 만드는 핵심 원인인 수리 '건당 수수료 체계'와, 노조 위축을 목적으로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는 '해운대·이천·아산 센터 폐업' 문제가 주요 현안으로 대두해 있다. 노조는 염 분회장의 죽음 이후 19일부터 총파업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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