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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직업병, 원진레이온 해법 따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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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직업병, 원진레이온 해법 따를 수 있을까

[안종주의 건강사회] 삼성전자, 직업병 해결 모범 사례 만들길

모든 재난과 사고, 산재와 직업병은 나쁘다. 하지만 인간은 실수하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만들어낸 제도와 시스템은 완전할 수가 없다. 어찌 보면 이런 사건들은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측면이 있다. 그래도 우리의 궁극적 바람과 목표는 사건 제로이다. 즉 위험 제로다.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선진국이나 후진국을 막론하고 그 어느 사회에서나 이런 나쁜 일들은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현실이다.

재난과 사고, 산재와 직업병 가운데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막을 수 없었다면 그것은 정말 나쁜 것이다. 용서할 수 없는, 용서해서도 안 되는, 나쁜 것이다. 그 가해자나 예방할 수 있었던 곳이 기업이든 정부든, 위험 관리를 허투루 한 곳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예방을 위한 투자나 교육을 하고, 시스템과 제도를 충분히 마련할 능력이나 여건이 되는데도 게을리했다면 그것은 악마와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때문에 인간의 존엄한 생명이 한둘도 아니고 수십, 수백 명씩 한꺼번에 스러져간다면 말이다.

이런 점에서 세월호 참사나 삼성전자 노동자의 백혈병 등 희귀병 집단 발병 사건은 닮은 점이 많은, 악마적인 사건이다. 참 나쁜 사건이다. 관련자들도 참 나쁜 사람들이다. 선장과 선주, 기업주와 정부 모두 말이다. 이들을 죽게 한 우리 사회도, 나를 포함한 언론인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는 남영호 침몰 참사(1970년), 서해 위도 페리호 침몰 참사(1994년)와 인재라는 측면에서, 사고의 규모 측면에서 매우 흡사하다. 또 삼성전자 백혈병 사건은 여러모로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직업병 참사(1988년)와 닮은 점이 있다. (☞관련 연재 : 삼류 기업으로 전락하는 삼성, 왕회장은 뭐하나!)

원진레이온 사건은 이미 환자가 1980년대 초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등 대형 직업병 사건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였지만, 기업이나 정부, 전문가 등 누구도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삼성전자 노동자 백혈병 사건에서도 2005년부터 피해자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기업이나 정부, 전문가 등 누구도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 삼성전자 LCD공장에서 일한 뒤 뇌종양 치료를 받는 한혜경 씨. 힘겨운 병원 생활을 하고 있는 한 씨는 지난해 12월 '산재 인정 소송' 1심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현대 의학상 뇌종양의 발병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산재 입증 책임은 노동자에게 있다는 점이 판결 요지다. 패소 판결을 받은 날, 한 씨는 '내가 직업병이 아니라는 생각을 전혀 안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프레시안(최형락)

같은 듯 다른 우리 직업병 역사의 두 사건 :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과 삼성 직업병

이 두 직업병 사건은 모두 언론 보도로 문제가 드러나고 그 논란과 참상이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산재·직업병 문제에 관심이 있는 전문가들이 노동 운동가와 함께 결합해 피해자와 그 가족들 편에서 헌신적인 해결 노력을 보였다는 점도 비슷하다. 아울러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야당 또는 진보 정치인이 나섰다는 점도 20년이 넘는 시차가 있기는 하지만 닮은꼴이다.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직업병 사건은 일본 등에서 특히 관심을 보였다. 삼성전자 노동자 백혈병 사건은 삼성전자 자체가 세계적 기업이다 보니 세계 곳곳, 특히 선진국의 산업보건 전문가와 노동·인권단체 등이 깊은 관심을 보여 왔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원진레이온 사건은 회사가 정부 기업이었다는 점에서, 삼성전자 백혈병 사건은 이른바 세계 일류라고 하는 대한민국 대표 민간 기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라는 점이 그 하나다. 원진레이온 사건은 피해 노동자를 위한 민간전문병원과 민간연구소 설립, 재단설립 등으로 이어져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해결 성공 사례로 꼽히지만, 삼성전자 백혈병 사건은 이제 해결을 위한 걸음마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난다.

삼성전자, 구체적으로는 반도체 사업장 노동자들의 백혈병 집단 발병과 관련해 14일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기자회견 형식을 빌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지난 3월 내놓은 중재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직접 밝혔다. 사건 해결에 청신호가 일단 켜졌다. 이전까지는 삼성전자 쪽과 반올림의 실무협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데 이어, 양측이 지난해 12월 본 협상을 벌였으나 피해자 위임 문제로 갈등을 빚어 사실상 결렬 상태였다. (☞ 관련 기사 :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

<또 하나의 약속>과 심상정 의원, 삼성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다

▲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가 지난 4월 26일 서울역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및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제'에 참석했다. 황상기 씨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프레시안(김윤나영)
그러다 지난 2월 삼성전자 백혈병을 소재로 한 실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돼 국민 사이에서 뜨거운 화제가 됐다. 이 영화로 삼성이 곤경에 처한 데 이어, 다시 심 의원이 지난 4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사업장 직업병 피해자 및 유족 구제 결의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삼성전자가 해결을 위한 전향적인 자세로 태도를 바꾸었다. 다시 말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 건강과 인권 지킴이)과 피해자 가족이 요구해온 핵심 사항인 보상과 재발 방지 대책을 동일 선상에 놓고,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 <또 하나의 약속> 김태윤 감독 인터뷰 : "어떻게 삼성을 건드려…개봉 자체가 기적")

삼성전자 대표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언급한 것은 참으로 뒤늦기는 하지만, 어쨌든 바람직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전자의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 황유미(당시 23세) 씨가 2007년 3월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하면서 직업병 문제가 불거진 후, 삼성전자가 피해자 쪽의 대책 요구에 공식적으로 긍정적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 관련 기사 : 반올림, 삼성전자 측 사과에 '환영')

그동안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노동자 가운데 백혈병 등 각종 직업성 암과 직업성 질환 의심 사례가 쏟아져 나오는데도, 삼성전자는 한결같이 회사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 환자와 가족들을 대상으로 돈으로 회유하는 등 비도덕적인 해결을 모색하려다 가족과 여론의 따가운 질책과 비난을 산 바 있다. (☞ 관련 기사 : "죽어가는 딸에게 삼성은 백지 사표를 요구했다")

물론 삼성전자 쪽의 이번 조처가 삼성이 노동자들의 백혈병 등을 산재로 공식 인정한다는 선언은 아니다. 직업병 여부는 회사가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근로복지공단의 직업병판정위원회의 몫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쪽은 법원의 판단에 맡겨 최종 직업병 여부 판결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방어 소송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앞으로 법정 다툼에서 피해자 쪽이 과거보다는 더 유리한 위치에서 소송에 참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공식 사과, 사실상 직업병 피해자 인정

삼성전자의 이번 공식 사과 발표는 백혈병 등 산업재해로 의심되는 질환의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향적인 자세를 취했어야 하는데, 이를 소홀히 해 피해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 점에 대해 사과한 셈이다.

지금까지 몇몇 직업병 피해 노동자가 소송 끝에 산재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 패소했다. 이런 법정 싸움에 삼성전자는 근로복지공단과 이인삼각이 돼 피해자와 그 가족 쪽과 공방을 벌여왔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 쪽은 산재 사실을 부인하는 삼성전자 쪽의 행위에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심상정 의원은 '제3의 중재기구'를 통해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과거 많은 환경 갈등이나 직업병 갈등 문제를 푸는 데 사용된 것이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문제를 푸는 데도 이러한 방식이 적용됐다.

삼성전자 노동자 집단 백혈병 문제를 예방과 보상 등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 유사한 사례에서 있었던 경험을 공유하고 좋고 나빴던 점 모두를 낱낱이 학습해야 한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가장 모범적인 결과를 낳아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억울하게 죽은 노동자가 다시 살아오고, 그 피해 가족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수는 없다. 그래도 앞으로 벌어질 다른 분야의 산재나 재난, 사고에 전범(典範) 또는 모범이 될 길을 삼성전자 쪽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꼭 보여주길 바란다.

삼성전자는 한 해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이 천문학적이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돈을 아낄 이유가 전혀 없다. 당연히 보상과 관련해서는 치졸한 협상을 벌이지 않으리라고 보인다. 필자는 이보다는 재발 방지 대책, 나아가 기업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직업병을 예방하고 연구하는 재단 또는 민간 연구기관 설립을 통해 지난날의 과오를 씻을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주기를 삼성 쪽에 기대한다. 원진레이온 사건에서 이미 우리는 그 효과를 잘 알고 있다. 삼성이 그 규모를 이보다 몇십 배 더 통 크게 한다면 이는 정말 값진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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