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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볼 수 없을, 수다스런 귀족 탐정의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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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볼 수 없을, 수다스런 귀족 탐정의 황금기

[윤영천의 '하우, 미스터리'] 도로시 세이어즈의 <맹독>

1.
얼마 전,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미스터리 독서 모임에서 앤서니 버클리 콕스의 작품을 함께 읽은 적이 있다. 의견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 번역가분이 이런 말을 남겼다. "하여튼 그 시대 미스터리 속 사람들은 참 잘 살아."

재미있는 지적이다. 이상적인 미스터리 세계에서는 먹고사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만약 중요하게 다뤄진다면, 아마 그것이 수수께끼와 관련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스터리 장르는 태생부터 심리적인 보수주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범죄는 반드시 해결되며 마침내 사회 질서는 회복된다'라는 메시지는 장르 자체에 계급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격렬하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탄생한 하드보일드는 그 한계를 보란 듯이 허물어뜨렸다. 1차 세계대전이 지나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 미스터리 장르의 분화는 가속화된다. 미스터리 서사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탐정의 계급적 하락도 피할 수 없었다.

▲ 오귀스트 뒤팽이 활약하는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 삽화. ⓒFrederic Lix

최초의 탐정 오귀스트 뒤팽은 몰락한 귀족이었다. 마땅한 직업도 없는 불우한 처지이나 왠지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세계 최초의 자문 탐정이었던 셜록 홈즈만 해도 참을 수 없는 권태만이 그를 괴롭힐 뿐, 삶의 문제는 결코 심각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황금기 미스터리의 주된 특질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인 '상류층 탐정(Gentleman Detective)' 역시, 말 그대로 상류층이었다. 19세기 영국을 주도했던 '젠트리(Gentry)' 계층에서 유래한 이들은 대부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신분에 절대 어울리지 않는 (범죄학 같은) 취미를 지녔다. 그들은 아마추어였지만 자유롭게 수사에 참여했고(때로는 경찰 신분의 귀족 탐정도 있었다), 취미로서 범죄를 해결할 뿐 딱히 생계를 고민하거나 사회 정의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력한 이성을 지니고, 신의 영역에까지 닿은 듯한 이러한 유유자적한 탐정들은 하드보일드 세계에 이르면 하루 20달러의 수수료와 보스에게 보낼 보고서를 걱정하게 된다. 생계를 걱정하는 탐정들과 그렇지 않은 탐정들. 세상의 탐정은 이렇게 둘로 나뉘기 시작했다.

2.
상류층 탐정이 등장하는 황금기 미스터리의 모델을 제시한 작가는 도로시 세이어즈였다. 옥스퍼드의 서머빌 컬리지를 졸업한, 당시 최초로 학위를 받은 여성 중 한 명이었으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 계층에 속했던 그녀는 고딕 소설의 전통 아래 있었던 윌키 콜린스의 극적 구성과, 상업적으로 성공한 코난 도일의 미스터리에 매료됐다.

▲ <시체는 누구?>(도로시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시공사 펴냄). ⓒ시공사
도로시 세이어즈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학구적인 태도와 풍성한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미스터리 장르를 섬세하게 매만졌다. 세련된 대화에의 집착과 그로 인한 특유의 장황함은 현대 독자들이 낯설게 느낄 만한 요소이나, 그녀는 무엇보다 장르의 규칙을 정확히 이해했고 그것을 충실하게 구현할 줄 아는 빼어난 작가였다.

도로시 세이어즈의 페르소나 피터 윔지 경은 1923년 발표된 <시체는 누구?>(박현주 옮김, 시공사 펴냄)라는 작품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출신 자체가 아예 귀족이었던 피터 윔지 경은 하드보일드 탐정과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는 탐정이었다.

명문 덴버 공작 가문 출신. 영지나 작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는) 둘째 아들.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명문 코스. 졸업과 동시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이 시기에 첫사랑에게 차임), 무공훈장을 받고 소령으로 예편, 참전 당시 피폭으로 인한 신경증. 취미는 크리켓과 다과, 고서적 초판본 수집, 하프시코드 연주 그리고 범죄학. 다소 평범한 외모, 중키에 밋밋한 금발, 약간 둔해 보이지만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얼굴.

명예와 부, 여유로움과 낭만, 명민함과 자상함 그리고 애국심으로 인한 상처까지 갖춘 '외알 안경을 쓴 귀족 탐정'은 훗날 (주로 여류 미스터리 작가들에 의해) 수차례 변주되며 또 다른 탐정의 전형으로 자리 잡게 된다.

3.
피터 윔지 경은 11권의 장편과 몇 권의 단편집에서 활약했다. 그중 《Murder Must Advertise》(1933), <나인 테일러스>(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허문순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1934), 《Gaudy Night》(1935)는 각종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걸작들이다. 위 세 작품은 아쉽게도 아직 완전한 모습으로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국내 출간 작품 중에 도로시 세이어즈를 이해하기 위한 작품을 찾자면 1931년에 발표된 다섯 번째 장편 <맹독>(박현주 옮김, 시공사 펴냄)이 적절할 듯하다. 이 작품에는 여류 미스터리 작가 해리엇 베인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피터 윔지 경은 작품의 발표 시기와 비슷하게 나이를 먹는데, 마흔 즈음 그녀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 <맹독>(도로시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시공사 펴냄). ⓒ시공사
이야기는 법정에서 시작된다. 판사가 배심원에게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을 당부하는 장면에서 사건의 얼개가 천천히 드러난다. 여류 미스터리 작가 해리엇 베인은 동료 작가인 필립 보이스와 사귀다가 헤어지고 어중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요양에서 돌아온 필립 보이스는 해리엇 베인의 집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심한 구토와 고열로 시달리다가 죽고 만다.

사인은 비소 중독으로 밝혀지고, 해리엇 베인에게 불리한 증거가 무더기로 발견된다. 그녀는 마침 비소를 이용한 살인 사건을 구상하고 있었고 독의 입수 방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여러 차례 비소를 구입했던 것. 정황상 그녀가 범인인 것은 분명한데, 확실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에 재판은 뒤로 미뤄진다. 법정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피터 윔지 경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피터 윔지 경은 구치소에서 해리엇 베인에게 청혼까지 한 후에, 자진해서 변호인단에 참여한다. 남은 기간은 한 달. 피터 윔지 경은 자신의 지위와 능력을 모두 동원해 그녀의 무죄를 증명하고자 한다.

작품 초반 판사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다고 느껴질 무렵부터, 독자는 이미 해리엇 베인이 무죄라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다. 피터 윔지 경이 해리엇 베인을 보며 눈을 반짝일 즈음에는 그 직감은 아마 확신으로 바뀔 것이다. 따라서 <맹독>의 구조는 비교적 간단하다. 피터 윔지 경은 다음을 증명하려 한다.

'누가 왜 어떤 방법으로 필립 보이스에게 비소를 먹게 했는가.'

4.
<맹독>에는 현대적인 여성들이 등장한다. 죽음을 앞두고도 당당한 해리엇 베인과 첩보원 못지않은 활약을 하는 캐서린 클림슨 양(윔지 경의 조력자)을 보면, 당대 여성에 대한 도로시 세이어즈의 혁신적인 생각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탐정은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한다. 이러한 플롯은 점잖은 (척했던) 당대 미스터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도로시 세이어즈는 1928년에 직접 엮은 앤솔로지 <탐정, 미스터리, 호러 걸작 단편선>의 서문(박스 기사 참조)에서, 미스터리 소설 속 '연애 감정'에 대해 확고한(?) 의지("이런 유별난 경우를 제외하곤 탐정 소설에는 사랑이 적게 나오면 적게 나올수록 더 좋다.(Apart from such unusual instances as these, the less love in a detective-story, the better)")를 표명했기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왜 굳이 '유별난 경우'를 선택했는지, 그 의문은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개인사에서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 있을 듯하다. 같은 글에서 도로시 세이어즈는 "추리소설은 고상한 수준의 문학적 성취를 이루지도 못했고 가설적으로 그런 수준에 다다를 수도 없다.(It does not, and by hypothesis never can, attain the loftiest level of literary achievement)"라고 단언한다. 미스터리 장르는 형식적인 완결을 추구하는 숙명을 거부할 수 없기에, 더 나아갈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녀는 온전히 종교 연구에만 매진하는데 장르에 대한 이런 비관적인 분석도 한몫했을 것이다.

▲ <치명적인 은총>(루이즈 페니 지음, 이동윤 옮김, 피니스아프리카에 펴냄). ⓒ피니스아프리카에
도로시 세이어즈는 미스터리 소설에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자평했고, 다른 학문적인 저작들과 분리하고 싶어했다. 미스터리 소설 자체가 그녀에게 있어 불행한 현실에 대한 도피처였다고 생각하면, 이런 모순적인 태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탁월한 지성을 가졌고 비교적 일찍 독립했지만, 도로시 세이어즈가 처한 경제적 현실은 불우했다. 게다가 첫사랑은 실패했고, (마치 해리엇 베인처럼) 형식적인 관계를 이어가던 두 번째 남자는 아이만 남긴 채 그녀를 떠났다. 결국 피터 윔지 경은 그녀가 현실에서 만나지 못했던 이상적인 남자였고 미스터리 소설은 현실의 스트레스에 대한 예술적 승화였던 것이다.
도로시 세이어즈는 <맹독>으로 피터 윔지 경 시리즈를 끝내려 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소신과는 상관없이, 피터 윔지 경에게 '행복한 결혼'이라는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나도 개인적으로 보이는, 작가와 탐정의 이러한 관계는 훗날 다양한 작품 속에서 비슷하게 재연된다. 가장 최근 작품을 찾자면 루이즈 페니의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스틸 라이프>(박웅희 옮김, 피니스아프리카에 펴냄), <치명적인 은총>(이동윤 옮김, 피니스아프리카에 펴냄))를 들 수 있다.

Box 함께 읽어볼 만한 작품들

<시체는 누구?>
1923년 작. '외알 안경을 쓴 공작가의 둘째 아들' 피터 윔지 경이 서적 애호와 범죄학의 취미를 한껏 뽐내며 처음으로 등장하는 작품. 피터 윔지 경은 코안경만 걸친 채 욕조에 누워 있는 시체의 정체를 밝혀내야만 하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에 말려든다. 도로시 세이어즈 특유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장황함이 '아직 젊고 발랄한' 피터 윔지 경과 어우러져 묘한 시너지를 이룬다.

<탐정은 어떻게 진화했는가>(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북스피어 펴냄)
도로시 세이어즈가 엮은 앤솔로지 <탐정, 미스터리, 호러 걸작 단편선>의 서문으로 쓰인 글이다.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이지만 당대 미스터리에 대한 개괄은 물론, 장르의 기원과 분석, 전망까지 한데 담겨 있어 도로시 세이어즈의 넓고도 세밀한 지식을 확인할 수 있다. 글의 말미에서 스스로 미스터리 장르 자체에 대한 한계를 언급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의혹>(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김순택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흔치 않은 도로시 세이어즈의 단편 모음으로, 여러 단편집에서 뽑아 재구성한 작품이다. 표제작 '의혹'과 피터 윔지 경이 활약하는 여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공포와 불안을 독살이라는 방법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다룬 '의혹'은 지금 판단해도 걸작이라 할 만하다. 기묘한 사건과 맞닥뜨리는 피터 윔지 경은 셜록 홈즈에 낭만을 더한 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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