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역시 잔인했다. 세월호 침몰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진 국민들의 눈과 귀가 모두 언론보도에 집중되어 있던 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서울을 다녀갔다. 원래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만 순방하려 했던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 정부의 강력한 요청으로 4월 25일, 1박 2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오바마를 서울까지 끌어들인 건 아마도 일본까지 온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오지 않으면 6월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불리해질 수도 있다는 국내정치적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의 방한 9일 전, 세월호 침몰이라는 비극이 일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정부가 사고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여론이 매우 악화되고 정부와 여당의 지지도가 떨어졌다. 결국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오바마 방한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지방선거에서 여야의 정치적 유불리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남북관계가 세월호처럼 침몰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한미정상은 이명박 정부 이후 지난 3월 헤이그 한미정상회담 때까지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핵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선행동'을 요구했다. 한미정상은 부시 정부의 북핵정책인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까지 요구했다. 부시 정부 때는 CVID를 요구하면서도 협상은 계속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한미는 북핵에 관한 한 후진(後進)한 셈이다.
한미정상은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한다면 더 강력한 대북제재를 하겠다는 경고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은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KAMD)' 구축에도 합의했다. 이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압박인 동시에 한국이 자기 돈 들여가면서 미국의 대중견제용 미사일 방어체제에 편입되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오바마는 한미일 동맹 차원에서 한일 간 군사정보 공유체제도 강력히 권고했다. 두 정상이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전작권 전환 시기를 다시 늦추기로 합의한 것도 북한에는 큰 압박이다.
4월 26일, 이렇게 진행된 한미정상회담의 결과 발표 당시 대북 압박성 메시지들도 적지 않게 나왔다. 이에 북한은 그 다음 날인 27일부터 박 대통령에 대해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욕설을 늘어놓으면서 앞으로 박 대통령 임기 동안 남북관계는 더 기대할 것이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화해와 대결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양자택일을 요구한 이 부분은 일단 유념할 필요가 있지만, 우리 정부가 국내정치적 필요와 한미동맹에 집착한 나머지 오바마 대통령을 억지로 서울까지 끌어들인 결과, 득보다는 실이 더 커졌다. 특히 우리 돈 들여가면서 미국의 대중포위 전략을 도와주게 되었다. 북한은 오바마 방한 이후에도 대남 비난을 계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박 대통령이 연초에 언급한 ‘통일대박’에 대해서도 다시 날 선 공격을 시작했다. 한마디로 오바마 방한과 한미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침몰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지금 미국은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의 힘을 빌려 중국을 견제하고 아시아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미국이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와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Asia)'을 대외정책 목표로 표방하고는 있지만, 미국 대외정책의 중점은 아직도 유럽에 놓여 있다. 그런 데다가 미국은 앞으로 10년간 국방비를 매년 500억 달러씩 삭감해 나가야 할 만큼 '돈'도 없다. 내막으로 유럽을 아시아보다 더 중시하면서도 크림반도 문제가 러시아 뜻대로 결말이 나는 과정에서 미국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러시아 비행기가 미 항공모함 머리위로 수차례 비행을 해도 미국은 그걸 저지하지 못했다. 미국이 외교도 힘으로 밀어붙이던 시대는 이제 지난 것 같다.
국제정치의 현실이 이렇다면 박 대통령은 서울에 온 오바마에게 이득을 안겨주는 대가로 6자회담도 재개하자고 설득하는 외교적 지혜를 발휘했어야 한다. 오바마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한국과 일본의 힘을 빌리려 하고,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는 '중국 역할론'만 강조하고 있다. 돈 없고 힘 빠진 오바마 행정부를 상대하는 박근혜 정부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다. 박근혜정부가 대미외교에서 기회를 잡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우리가 중심을 잡고 상황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 미국에게 남북관계를 안정시켜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2월 하순부터 4월 말까지 예년에 비해 강력하게 진행되면서 남북관계를 일촉즉발의 위기까지 몰아넣었던 한미합동훈련도 이제 끝났다. 을지-프리덤가디언(UFG)훈련이 예정되어 있는 8월까지는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예고한 바 있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 징후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걸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북한과의 대화는 필요하다.
'화해와 대결 중 하나를 선택하라', "좋은 계절에 마주 앉을 수 있을 것" 이란 북한의 상반된 언사를 조화시키는 지혜가 발휘되길
대화를 해야 한다면 남북 간 긴장을 일으킬만한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5월이 가능한 시점일 수 있다. 한미정상회담 이후 나온 북한의 대남발언 표현만 보면 거칠고 위협적이어서 그들과 다시 마주 앉고 싶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는 그 거칠고 위협적인 언사들의 행간에서 북한의 의중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남북관계 현장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에 따르면, 북한의 대미-대남 험한 언사와 '벼랑끝 전술'은 때로 북한이 그만큼 접촉과 대화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지금 북한이 남한을 향해서 험악한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마도 북한이 그만큼 남북협력을 절실히 갈망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북한의 대내 경제사정은 매우 안 좋다. 그래서 북한은 남북대화와 협력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역이용하면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시작하는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통일대박론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 높아질 것이다. 지난 1월 초, 박 대통령이 제안한 이산가족 상봉을 한미합동군사훈련 때문에 거절하면서 북한이 했던 말이 있다. '좋은 계절에 마주 앉을 수 있을 것' 이라 하지 않았던가.
한미동맹을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북한과의 접촉과 대화를 끊고 압박을 가하면 한반도 상황만 불안해진다. 그렇게 되면 가진 것이 많은 우리, 특히 국민들이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4월까지 대대적으로 진행된 한미 합동군사훈련도 이제 끝났다. 그리고 계절의 여왕 5월이 되었다. 이 5월에는 거친 북한 언사의 행간을 읽어 내고, 우리 정부가 먼저 북한에 손을 내밀어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가져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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