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3주를 넘어가고 있다. 연휴 기간에 팽목항을 다시 찾았다. 팽목항은 남은 실종자 가족보다 방문객과 봉사자들 숫자가 더 많은지 오래다.
거칠었던 바다는 다시 소조기가 찾아왔다. 햇볕 따사한 봄날이 끝으로 달려가는 팽목항 18번 국도변 나뭇가지에는 거의 어김없이 노란리본 하나쯤은 달려있다. 무심히 따라가다 보면 팽목항 방파제 난간에서 절정을 이룬다.
낙조의 명소이기도 하다는 팽목항 너머 어느 섬을 이제는 아름답게만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한 사진기자의 걱정을 들으며, 이번 진도 팽목항 취재 중 가장 곤혹스럽고 견디기 어려웠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사고 초기 5일간 팽목항 해경 선착장 주위에 천막으로 마련된 '1차 검안소' 부근을 지날 때다. 이 곳은 사고 해역에서 수습된 아이들의 시신이 신원 확인을 거쳐 부모님들과 처음 만나는 장소다. 여기서 그 어떤 재난 취재 중에도 경험한 적 없는 아이 엄마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비명인지 괴성인지, 정말 울음인지도 구별되지 않는, 아니 표현할 수조차 없는, 오히려 짐승 소리에 더 가까운 젊은 엄마들의 '통곡과 절규'였다. 그 소리는 검안소 위치상 팽목항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한동안 긴 거리를 걸으며 지속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미증유의 참극인 세월호 사고 발생 3주 만에 팽목항은 사회적 기억에서 어느새 정리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이제 그 ‘통곡과 절규’는 팽목항에 간헐적으로 흐르는 흐느낌으로 바뀌어있다. 현장 화면과 사진들은 팽목항 낙조와 방문객의 기도 장면을 여느 경치 좋은 해변사진처럼 멋진 실루엣으로 각색되어 전송된다. 석탄일에는 수십개의 풍등이 팽목항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 모든 것이 팽목항의 뉴스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불편하다. 우리는 지난 수십여 년 간 서서히 이 땅에 구축된 유례없는 '지옥의 체제'를 완성해 나가는데 일조하지 않았나. 최소한 뒤쳐지지 않으려 '살인 체제'의 막차는 늘 놓치지 않고 탔던 '침묵의 동의'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내 귓전에 이명과도 같은 그 통곡과 절규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 무엇 하나도 해결과 대안의 실타래조차 만져보지 못했다.
오늘 내가 팽목항에서 분명히 목격한 것은 무엇일까. 세월호 참극과 이 거대한 '살인의 체제'가 오랜 시간 나의 의지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수많은 일상의 선택들과 '공모관계'였다는 사실에 대한 거듭된 확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림이 되는 팽목항을 찍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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