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세월호 참사 같은 인재만이 위험한 게 아니다. 식량문제도 심각하다. 우리 국민이 나눠 먹을 식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만일 식량을 외국에서 수입할 수 없다면 국민 둘 중 하나는 굶어야 한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양정자료에 따르면, 2012년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45.3%로 사상 최저치다. 1970년만 해도 80%가 넘었다. 식용과 사료용을 포함한 곡물자급률을 보면 사태는 더 심각하다. 23.6%에 불과하다. 두 지표 공히 역대 최저치를 경신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식량자급률은 OECD 국가 중에서도 최하위권이다. 나라가 총체적인 식량위기, 위험에 처해있는 셈이다. 100%를 넘겼던 주식인 쌀 자급률마저 86.1%로 떨어져 역시 역대 최저 수준이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벼 재배면적은 2012년보다 1.9% 줄어든 83만2625㏊로 역대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10년 전보다 17만ha가 줄어들었다. 식량을 생산할 농지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주된 원인은 농지 감소 등 국내 생산기반이 크게 약화하고 해외곡물의 도입 여건도 순탄치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적 기상이변, 곡물수출 통제, 투기자금 유입 등 국제곡물시장에 상존하는 공급불안 요인이 중요한 이유다.
근본적으로 민생과 인권을 도외시하는 박근혜 정부는 농정도 뒷전이다. 실천은 없고 오로지 공허하고 무책임한 목표뿐이다. 2015년 식량자급률 57%, 곡물자급률 30%, 2020년 각각 60%, 32%로 자급률 목표치를 상정해놓았다. 하지만 실현을 기대하기 어렵다. 애초 연차적으로 자급률을 끌어올린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역행하고 있다. 지금의 추세와 정황으로는 목표 달성은 어림도 없다. 현상유지도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식량주권은 고사하고 낮은 단계의 식량안보(Food Security) 전선에도 ‘빨간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그럼에도 농정 당국 등 정부 부처의 대처는 안이하고 무기력하다. 심지어 무모하게 낙관적이기까지 하다. 농민과 국민들의 정책적 대안 제시에는 부정적이고 비협조적이다. 익숙한 ‘살농 정책’을 공공연히 지속하고 있다. 농민들이 목을 매는 쌀 직불금 인상, 밭 직불제 확대는 매년 소귀에 경 읽기다. 예산당국은 재정부담 타령만 늘어놓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는 다른 대책이 없다는 말이다.
국민이 먹을 식량은 나라와 정부가 책임지는 게 맞다
식량자급률을 높이는 해법은 어쩌면 지극히 단순하고 자명하다. 적정 농지면적 확보, 농가소득 안정, 소비기반 확충 등 식량안보 차원의 종합대책으로 크게, 근본적으로 풀어야 한다. 무엇보다 식량안보, 식량주권의 문제는 ‘식량자급’이라는 양적 측면만 고려해서는 안 된다. 어설픈 반쪽 정책이 되고 만다. 농산물과 ‘먹거리 안전’이라는 식품의 안전성을 놓치면 안 된다. 질적 측면의 식량안보까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한다.
물론 농정 당국도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곡물(식량)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쌀 등 주요 곡물 공공비축제도, 다양한 농수산물 및 식품 안전 인증제도 등을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성은 부족하다. 실효성도 떨어진다. 2004년 WTO 이후 추곡수매제도가 폐지되면서 농산물 수요 및 공급 시스템은 왜곡되고 붕괴하고 말았다. 오로지 시장과 상인들이 가격을 결정하고 있다. 농민이나 일반 국민들이 개입할만한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통로는 사라지고 없다.
근본적으로 농산물은 외부의 자연재해에 의해 치명적인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수요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고유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시장을 통한 가격결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속성이 있다. 시장가격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할 수밖에 없다. 농산물 가격안정을 위한 장치로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어쨌든, 국민이 먹을 식량은 나라가, 정부가 책임져야 마땅하다.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 수매가격 상하한제도, 주요 곡물 공공비축제 등이 농민들에게, 그리고 국민 모두에게 절실한 이유다. 일정한 기초농산물을 국가가 수매하고 비축하면 곡물자급률 상승, 농산물 가격안정, 농업인 소득안정도 동시에 도모할 수 있다. 아울러 국민기초식량보장을 위한 기본계획을 통해 식품안전관리제도를 확립하면 안전한 농산물 및 식품의 생산 및 공급 기반도 보장할 수 있다. 이게 식량 생산자인 5%의 농민뿐 아니라, 식량소비자인 95%의 국민을 위해 국가의 감당해야 할 의무이고 책임이다. 정부로서 제 역할이고 마땅히 해야 할 도리다.
우리 식량주권의 역사는 '파괴와 상실의 시대'
식량주권(Food Sovereignty)은 한마디로 “식량에 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뜻한다. “식량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통해 자연과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닌 생태환경과 자연자원을 지키는 시스템이며, 생산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는 거대곡물 기업, 초국적 농식품복합체들의 식량투기에서 비롯되었다. 식량위기는 '식량값 폭등으로 물가가 인상되는' 애그리플레이션(Agriflation)으로 발전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사막화, 홍수, 폭염도 농업에 가장 직접적이고 심대한 피해요인으로 작용한다. 개발지상주의 경제개발 모델은 기후변화, 지구환경 파괴를 가속화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세계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농업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토지수탈과 수출 농업으로 이익을 보는 자는 초국적 기업들뿐이다. 또 식량주권은 수출 지향적인 무역을 반대한다. 식량주권을 실현하기 위해 상품화된 식량생산이 아니라 '좋은 먹을거리'로서의 식량 생산자로 농민은 거듭나야 한다. 세계화된 식량시스템은 지역생산과 지역소비를 중심으로 한 공공정책에 기반을 둔 지역식량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의 식량주권 역사는 한마디로 '파괴와 상실의 시대'로 대변된다. 일찍이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미곡 공출로 식량주권은 파괴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이은 분단으로 작부체계는 완전히 붕괴했다. 미국의 잉여 농산물과 구호물자 원조로 밀 농사, 목화농사 등 주요 작물의 명맥마저 사라졌다.
1970년대 개발독재는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로 탈농이 가속화되면서 이른바 녹색혁명과 자본주의적 상업농 체계가 이식되었다. 1980년대부터는 신자유주의 농업 체계와 개방농정이 본격 전개되었다. 종자 산업은 외국의 초국적 기업에 넘어갔다. WTO, FTA, IMF로 농업의 보호장벽이 사라지면서 신자유주의 농정과 ‘살농’ 구조조정 작업은 본격화되었다. 농민들은 임노동자로, 채무노예로 전락했다. 맞추어 1970년대 개발독재 정권 아래 '식량안보'란 개념이 등장했다. FAO가 도입한 국가주의적 지배개념으로 민중 또는 국민을 염두에 둔 식량주권보다 하위개념이다. 적절치 않은 개념이다. 더욱이 오늘날 외국농산물과 GMO 수입식품으로 장악된 시장에서 식품의 안전성은 보장받기 어려워지고 있다. 고용불안, 사회 양극화, 사회안전망 부재로 식량접근권도 점차 국민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식량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현장농민들의 노력은 1986년 가톨릭 농민회가 서울 제기동에 낸 작은 쌀가게에서 발아되었다. 이후 원주의 한살림 등 생산자-소비자직거래운동, 경인지역 노동운동가들이 주도한 소비자 생협운동으로 발전되었다. 1994년에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에 따른 대안으로 통일농업, 환경친화적 농업, 소득보장형 농업 실현, 남북농업교류, 남북공동농업, 비무장지대공동경작 등의 제안이 전농 등 진보적 농민단체에서 정책제안으로 제기되었다.
2000년대 넘어 활성화된 학교급식 운동을 통한 조례제정과 학교급식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전국여성농민회를 중심으로 소농 생산방식의 전형인 '텃밭', '주는 대로 먹는 신뢰'와 '생산자 중심'의 관계를 통한 '꾸러미' 사례가 본격화되었다. '윤리적인 소비자'와 '윤리적인 생산자'가 만나는 접점에서 식량주권이 실천됐다. 1993년 결성된 범세계적 농민운동조직 비아캄페시나를 통한 토종 종자지키기 활동도 전국적인 차원의 농민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식량주권의 주적은 '초국적 농식품복합체'
식량주권을 침해하는 주범 또는 주적은 이른바‘초국적 기업(농식품복합체)’다. 미국계 카길 등 5대 곡물 유통회사(메이저)가 전 세계 유통량의 75%를 차지하고 있다. 초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전 지구적 범위의 독점 식량체계다. 전 세계의 농업, 농민, 농촌, 그리고 농산물 시장은 이들 초국적 독과점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초국적 기업들의 면면은 농화학기업, 곡물기업, 식품기업, 유통기업들이다. 실제로는 이들 업종을 통합한 ‘초국적 농식품복합체’가 시장지배자다. 농업의 생산과 수집, 유통, 판매, 가공에 이르는 식량체계 전반을 지배하고 이윤 극대화를 오로지 추구한다. 초국적 농식품복합체는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문제를 초래한다. 농업생산의 획일화, 농업의 유전적 자원 다양성 감소, 농업의 지속가능성 감소 등이다.
마침내 종자의 상품화와 독점을 통해 세계 농업의 지배를 획책한다. 그래서 마침내 GMO 종자를 개발하기에 이른다. 종자에 대한 농민의 권리를 근원적, 구조적으로 박탈한 것이다. 부작용과 폐해가 인류와 자연생태계에 끼치는 위해성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예측조차 불가능할 정도다.
2000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도 식량 소비가 생산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식량 생산 절대량이 부족해진 것이다. 이전처럼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상대적 식량위기는 더욱 심화됐다. 생산이 소비에 따라잡힌 원인은 1차적으로 소비량의 증가에 있다. 특히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인구 대국에서 육류 소비가 급증했다.
동물은 사람보다 많이 먹는다. 육류 공급원인 가축도 마찬가지다. 소는 12~14배, 돼지는 6~7배, 닭은 2배 정도 사람보다 더 먹는다. 사람이 육류를 많이 먹을수록 곡물 등 식량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최근에는 바이오디젤연료를 생산하기 위해 옥수수 등 곡식을 소비하고 있다. 2005년 이후에는 곡물소비량 증가 추세를 바이오디젤이 주도하는 양상이다.
반면 곡물 생산량은 더 늘어나지 않고 있다. 농업기술의 발전, 농업생산성의 향상도 별 효과가 없다. 이유는 기후변화와 세계화 때문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농지의 사막화, 세계화(Globalization)로 인한 농산물의 자유무역이 원인이다. 그 결과 전 세계의 소농들은 동반 몰락했다. 농업 선진국 미국과 유럽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이후부터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식량 부족 사태가 고착됐다. 자연스레 식량 가격은 상승했다. 애그리플레이션이 일상화됐다. 식량자원은 점차 무기화되고 투기자본화됐다. 구조적인 애그리플레이션은 기본적인 가격상승과 함께 수출통제, 곡물투기 등을 초래한다. 2007년, 2008년도의 급격한 곡물가격 폭등은 해당 시기의 작황의 문제에서 비롯됐다.
'식량자주율'은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식량대책 부재를 고백하는 것
국내의 식량부족 문제를 해외 수입으로 해결하려는 발상은 근본적인 방법이 아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국외 생산량까지 포함한 '식량자주율’'라는 허구적인 개념과 구호까지 만들어냈다. 해외에서 수입하는 식량까지 국내 생산·공급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한국이 해외농업개발을 통해 확보한 곡물이나 한국형 곡물메이저를 통해 확보한 곡물도 국내 자급과 동등하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전 정부의 농정기조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당연히 사용하고 있다.
2011년 7월 농식품부의 식량대책 발표에 따르면, 2020년까지 식량자급률을 32%로 올리고 해외에서 33%의 식량을 확보해 65%의 ‘식량자주율’을 확보하겠다는 내용이다. 해외 도입물량 33%에서 138만 톤은 해외 농업개발로, 400톤은 독자적인 곡물조달시스템으로 조달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비현실적이다. 허구다. 거짓말이다. 무엇보다 수입식량까지 포함해 지표를 부풀리려는 의도의 ‘식량자주율’은 기만적이다. 정부로서 ‘식량자급률’은 자신 없다는 자기고백에 불과하다.
애초 해외농업개발은 수지맞는 장사가 아니다. 비용이 과다하게 투입된다. 몽골이나 시베리아의 불모지 같은, 사실상 한계농지를 농지로 개발하는 일부터 난제다. 설사 해외에서 생산해 도입한다고 해도 수송하고 보관하는 시설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데 또 돈이 들어간다. 해외에서 안정적으로 식량을 조달하는 사업은 타당성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설사 해외농지에서 생산에 성공했다 한들 국내로 도입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2007년 이후 미국, 유럽, 호주를 제외한 모든 곡물수출국들은 수출통제 정책을 취했다. 중국,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지금도 부분적으로 수출 통제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작황이 안 좋고 흉작으로 가격이 올라가면 수출통제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다. 자국의 이익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일본처럼 작은 곡물메이저 기업을 육성해 국제곡물조달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주장도 빈틈이 많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공급량이 소비를 초과하던 시기인 40여 년 전부터 마루베니, 미쓰이물산 등을 통해 여유 있게 공을 들인 산물이다. 한국이 뒤늦게 기존 초국적 곡물메이저 기업과 경쟁해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와 관련해 이미 막대한 국가 예산을 헛되게 낭비해 지난 국감에서 질타받은 바 있다.
애초 식량자급률 지표도 왜곡된 것이다. ‘식량자급률(사료용 제외)’은 사람이 먹는 식용곡물(쌀, 보리, 밀, 콩, 옥수수, 조, 수수 등)의 국내소비량 중 국내생산량을 말한다. 201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은 45.3%다. ‘곡물자급률(사료용 포함)’은 사료용 곡물을 포함한 각종 곡물의 국내 소비량 중 국내 생산량이 차지하는 비율이다. 곡물자급률은 서류(감자, 고구마)의 자급률 수치도 포함한다. 따라서 자급률이 83%에 달하는 감자나 92%에 달하는 고구마 등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의 곡물자급률은 더 떨어진다. 2012년 곡물자급률은 23.6%다.
결국 자체적으로는, 자국의 생산기반으로는 국민들에게 공급할 식량의 절반도 자급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나머지 절반 이상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심각한 처지다. 외국의 경우 OECD 주요국들의 곡물자급률은 2009년 기준으로 스위스(205.6%), 프랑스(190.6%), 캐나다(143.5%), 미국(129.4%) 순으로 높다. 일본은 30.7%다. 한국이 역시 최하위다(농업전망 2013, 농촌경제연구원).
곡물 이외에 육류와 과일채소류 등 농산물 일반을 모두 포괄하여 자급률을 산출하기도 한다. 무게를 기준으로 계산할 수 없어서 에너지 열량(칼로리. kcal)을 기준으로 계산한다. 한국도 최근 관련법을 개정해 ‘식량칼로리(열량)자급률’을 보조적인 자급률 지표로 발표하기로 했다. 2011년 한국의 식량칼로리 자급률은 약 40.2%이다. 그런데 식량자급률, 식량칼로리자급률 등의 보조지표는 정부 등 신자유주의 개방론자들이 주로 활용한다. 다소 높은 수치를 내세워 국민들의 위기의식을 희석하려는 의도가 깔렸다. 그래서 곡물자급률을 실질적인 '식량자급률'으로 이해하는 게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인식방법이다.
식량자급률을 법제화하고 50%까지 올려야 한다
결국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한다. 현재 23% 수준인 식량(곡물)자급률 지표를 최소한 50%로 높여야 한다. 무엇보다 나머지 50%도 기존의 글로벌푸드시스템이나 곡물메이져 기업에 부당하고 불안하게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가령 남북 간 농업협력, 이른바 통일농업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남한의 쌀과 북한의 잡곡을 거래하면 된다.
무엇보다 이를 위해 국가단위 식량보장 협력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인근 국가들끼리 식량보장 문제를 상호호혜적으로 협력하는 방법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가장 오래된 식량보장 협력체계인 유럽연합의 경우다. 유럽경제공동체 시절의 공동농업정책은 유럽 내의 식량안보는 유럽국가들이 공동으로 책임진다는 것이다.
해외농업개발 방식도 근본적인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몽골, 시베리아, 연해주 지역에서의 농업개발을 기업이나 민간에만 맡기지 말아야 한다. 엄연한 공공의 영역이니 국익을 우선 고려해야 하는 국가가 나서서 책임지는 게 마땅하다. 이때 국가 간 협력 방식을 통하면 된다. 그래야 수출통제 같은 문제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 안정된 식량안보시스템 구축이 가능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경제공동체 구상은 곧 식량자원을 공동개발하자는 것에 불과했다. 그 대상지역은 시베리아, 연해주, 중국 동북 3성 등이다.
이를 위해서는 식량자급률을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농어업·농어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은 농어업·농어촌 및 식품산업 발전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고, "정부는 내우외환,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 시 최소한의 식량과 주요 식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식량증산, 유통제한 및 그 밖에 필요한 시책을 강구"하도록 하는 게 골자다.
하지만 농민단체의 오랜 숙원인 ‘식량자급률의 법제화’ 조항은 이번에도 빠졌다. 농민단체는 "농정의 신뢰회복과 농업·농촌대책의 실효성 증진을 위해 자급률 목표치를 설정해야 한다"고 지속해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농식품부는 법제화에 일관되게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식량자급률을 1% 끌어올리는 데 수천억 내지 1조 원의 예산이 필요하고, 목표치를 정할 경우 적정수치 도출 과정에서 엄청난 논란을 벌여야 한다"는 게 반대의 논리다. 또"자급률 목표치만 법제화해놓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동의할 수 없다. 전혀 그렇지 않다. 식량자급률은 곧 식량안보, 식량주권의 지표다. 사막에서 농사를 짓는 이스라엘은 전체 인구의 3% 정도의 농민이 국민식량의 95%를 책임지고 있다. 나아가 연간 10억 달러 어치의 농산물을 수출하고 있다. 스위스는 평상시 65% 수준의 식량자급률을 유지하지만 비상시에는 100%(최저 칼로리 기준)로 높일 수 있는 식량안보 계획을 수립해놓고 있다. 쿠바는 1989년 이후 농업혁명에 성공해 식량 자급률이 98%에 달한다. 게다가 대부분 유기농 생산이다. 식량 자급률이 40% 수준인 일본도 2015년까지 식량자급률을 45%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정책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공공비축제와 식량자급률 목표를 설정해 운용하고 있다.
이렇게 주요 국가들은 정부의 강력한 정책의지로 식량을 자급하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 개발도상국은 식량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도 식량주권 측면에서는 개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든 자연재해나 경제 불황이 닥치면 식량부족으로 국가는 혼란에 처하게 된다. 정부는 농정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주요 곡물의 자급목표를 설정하고 유지 의무를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농민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면 된다.
식량주권 확보는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로부터
현재 제기된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식량주권 정책은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라 할 수 있다. 정부 측에서는 WTO 협상으로 인해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농민단체의 해석은 다르다. 국가에서 농산물을 수매하는 것은 WTO 금지사항이 아니라 감축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WTO 협정에서 정해진 농업지원보조금의 총액한도 내에서는 얼마든지 집행 가능하다는 논거다.
전농 등 농민단체에서 제시한 대처방법은 2가지다. 일단 WTO협정의 허용범위인 감축대상보조금 총액한도로 직접수매 방식을 취한다. 나머지 물량은 생협, 농협 등과 계약재배 방식을 취한다. 정부가 국가수매제 시행 예산을 전적으로 책임질 필요도 없다. 기존 정부의 가격관련 정책 예산과 기금 약 3조5000억 원을 우선 활용하면 된다. 부족한 예산은 약 66조 원에 달하는 농협의 상호금융 운용자금에서 차입할 수 있다. 단 이때 차입이자는 정부가 차액지원으로 보조해 주면 된다. 이러한 자금 운용 방식은 WTO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게 농민단체의 주장이다. 차제에 농업과 먹거리 문제에 대한 사회적 협약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각 사회구성원의 주체들에 대해 역할부담을 명기하고 점검과 평가를 위한 협약기구도 만들어 감독하는 것이다.
이 같은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의 법제화는 식량자급을 목표로 하는 양적 식량주권 대안이라 규정할 수 있다. 현재 ‘국민기초식량보장법’이 국회에 발의되어 있다. '5년마다 국민기초식량보장 기본계획 수립', '국민기초식량보장위원회 설치',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 실시', '농산물 품목별 수매가격상하한제도 실시', '농산물국가수매기금 설치' 등이 주요 골자다.
발의안은 "국민의 생활에 중요한 기초농산물의 일정 부분을 국가가 수매·비축함으로써 안정적인 국내 생산기반을 마련하고 곡물자급률을 제고하며, 농산물의 가격안정과 농업인의 소득안정 등을 도모"하려는 목적이다. 무엇보다 "농산물 공급은 외부의 태풍, 가뭄, 홍수 등의 재해에 의하여 크게 영향을 받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시장을 통한 가격결정 시스템은 농산물 가격안정 및 농가소득 안정을 달성함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으므로, 국민기초식량보장위원회에서 수매가격과 수매량을 결정할 경우 이러한 문제를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아울러 "식량수매제를 통하여 농업인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고 그에 따라 곡물생산이 증가함으로써 2011년 22.6%로 하락하고 있는 곡물자급률 제고에 일정 부분 기여 할 수 있다"는 취지가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기초농산물 수매제'는 "기초농산물의 취약한 국내 생산기반을 강화하고, 농산물의 가격안정과 농업인의 소득을 보장하는 안정적인 농산물 공급체계를 구축”하려는 목적이다. 또 농산물국가수매기금은 “기초농산물 국가 수매제를 원활하게 운영하고 수매가격 수매가격상하한제도의 실시에 따른 손실을 보전하기 위한 재원을 확보"하려는 목적이다.
구체적으로 수매대상 품목은 총 16개 품목이다. 5대 곡물(쌀, 보리, 밀, 옥수수, 콩), 7대 채소(배추, 무, 마늘, 고추, 양파, 대파, 당근), 3대 과일(사과, 배, 감귤), 한우 등이다. 수매방식은 정부직접매입, 농협위탁매입, 농협계약재배 등이고, 수매량은 곡물과 채소는 30%, 과일은 20%, 한우는 수매가 결정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수매가는 품목별 수매가 결정위원회에 농민의 참여를 보장하는 상하한가 설정 방식이다.
전농 등 농민단체는 "농민에겐 가격보장, 국민에겐 농산물 가격 안정, 나라는 식량자급률 향상"이라는 1석3조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농식품부는 이 법률안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우리나라의 감축대상 보조금(AMS) 한도(1조4900억 원)를 초과하게 되어 WTO 협정상 보조금 감축 의무를 위반할 가능성이 높고, 정부의 재정부담이 대폭 증가하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농민단체는 정면으로 반론을 펴고 있다. "감축대상 보조 총액은 1조4900억 원이 아니라, 최소 허용보조 약 4조 원"이라는 것이다. 또 예산이 많이 소요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반박이다. "곡물 채소 30% 이상 수매, 과일 20% 이상 수매, 한우 20만 두 수매를 기준으로 초기 투자비용은 약 8조 원"이라는 것이다. 이 때 농협은행 상호금융특별회계 중 10%, 6조6000억 차입으로 자금 조달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또 "2013년 농업예산 전체 예산 대비 1.4%, 국가 전체 예산 상승률 5.1%만 적용해도 매년 1조 원 정도를 수매제에 쓸 수 있다"고 한다.
또 직불제 확대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2005년부터 2011년까지 매년 평균 1조9000억 원을 고정직불금(6800억 원) 변동 직불금(4200억 원), 공공비축미 사업(8000억 원)에 쓰고 있으나 쌀 소득은 지속해서 하락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매년 평균 1조5000억 원씩 쌀 소득은 감소했다. 근본적으로 전농 등 농민단체는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는 '농민 인간 선언운동', '농민조직 강화 운동', '식량독립운동', '자주적 농정개혁운동'으로 규정한다. 쌀, 배추, 감귤 등 생산농가가 가격결정에 참여하고, 품목별 연합회, 농민회가 가격 결정 주도권을 쥐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수입농산물 78% 중 미국산이 60%로 전체 국민 농산물 소비의 46%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농산물 시장이, 국민의 식탁이, 미국에 예속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수매제 실현의 힘으로 농가부채 해결, 농지개혁, 농자재값 반값 실현, 농어업재해보상법 제정, 농협은행장 직선제 쟁취 등의 농정 개혁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수매제에 반대하는 입장의 정부도 이미 부분적으로나마 수매제를 시행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를 통해 고추, 배추, 마늘, 콩, 소고기 등을 수매하고 있다. 또 농협은행은 2015년까지 전체 채소의 50%를 산 지매입해서 유통할 계획이다.
공공비축제 확대 등 식량주권운동은 곧 국민주권운동
공공비축제 확대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지난해 '양곡관리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마련됐다. 이 법률안에서는 "국민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공공비축미곡(公共備蓄米穀)을 비축운용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개정 이전에는 쌀 이외의 양곡은 공공비축제도의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지 않았으나 식량주권 확보 차원에서 공공비축제도의 대상을 밀, 콩 등 여타 기초농산물까지 확대하게 된 것이다. 우선 식량자급률 개선을 위해 공공비축 대상을 쌀과 함께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양곡으로 확대했다. 정부관리양곡의 수급계획에는 공공비축양곡의 운용에 관한 사항을 포함했다. 개정안은 미곡(米穀, 쌀) 이외의 양곡도 공공비축 대상품목에 포함하되, 대상품목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명시했다.
특히 "국제곡물시장의 불안정성 증대에 대응하고, 재해나 비상시에 대비하여 국가가 일정수준의 재화를 비축하는 공공비축 제도의 취지에 비추어 볼 때, 미곡 이외에도 국내 소비량이 많고, 수급·가격의 변동성이 커서 비축을 통한 대응여력이 있는 곡물에 대하여는 미곡과 마찬가지로 비축할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다"고 공공비축제도의 필요성과 효용을 인정,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등은 공동으로 식량주권포럼을 출범시켰다. 최근 '식량주권과 먹거리안전을 위한 범국민 운동본부'로 확대, 발전했다. "쌀, 방사능 오염 식품 문제 등 안전한 먹거리가 크게 위협받는 상황에서 각종 FTA와 TPP 등 통상협정이 우리의 식량주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자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 운동이다.
전농 등 식량주권 운동가들은 "식량주권운동은 시민운동 진영의 다양한 활동이 그물망처럼 엮이면서 국민과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또 "소비자인 국민과 함께하려면 먹거리라는 관점뿐 아니라 생태위기 속에서 자연생태계와 전통문화를 보전하는 농업을 얘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전 지구적 차원의 식량위기 앞에 준비되지 않은 '식량 개발도상국' 한국은 풍전등화의 형국이다. 곡물의 해외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 이쯤 되면 최소한 식량주권에 있어서 주권국가라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그나마 86%대의 자급률을 유지하고 있는 주곡 쌀마저 2015년 쌀 시장 전면 관세화 개방으로 값싼 수입쌀이 밀려 들어와 시장과 생산기반이 교란되면 자급률 유지를 장담하기 어렵다.
식량 문제는 단순히 먹거리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정치적·문화적 문제로 직결된다. 식량주권을 잃은 나라는 사회적인 주권, 정치적 주권, 문화적인 주권을 보장받기 어렵다. ‘사람답게 사는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1. [농민] '귀농촌'의 협동연대 대안 - 도시난민에서 '마을시민'으로
2. [농민] '농촌복지'의 사회적 서비스 해법 - 100세시대 '협동사회경제형'으로
3. [농민] '농민운동'의 연대 전략 - '사회연대적' 농민운동으로
4. [농민] '공익농업'의 국가기간산업화 -공익농민에게 '월급 기본'을
5. [농민] '여성농민'의 가치 - 여성농민에게 '절반의 영농권 소득을
6. [농업] '6차농산업화'의 정도 - 중소농 중심 '협동화 6차산업'으로
7. [농업] '기업화 농산업'의 대안 - '마을·지역 공동농업'으로
8. [농업] '먹거리 정의'의 중요성 - '농도상생형 사회복지'의 열쇠
9. [농업] '농산물 유통'의 혁신 대안 - 도시민이 책임지는 '농민의 생활'
10. [농업] '친환경농업'의 실천 방안 - '잘 먹고, 잘 사는' 지름길
11. [농촌] '농촌교육공동체'의 전망 - 마을을 살리는 '학교'
12. [농촌] '협동조합'의 사회적 경제 - '을(乙) 중심'으로
13. [농촌] '농촌마을만들기'의 출구전략 - 사회생태적 '마을살리기'로
14. [농촌] '농정협치(거버넌스)'의 가능성 - '한국형 농업회의소'의 법제화를
15. [농촌] '에너지자립마을'의 전환 - '지역순환농업' 기반으로
16. [농정] '식량주권'의 정책목표 - '양적 식량자급'과 '질적 먹거리 안전'
17. [농정] '농정 재정'의 개선 방향 - 중앙집중에서 '지방분권'으로
18. [농정] '도시농업'의 역할 -'국민농업'의 학교이자 전진기지
19. [농정] '지역공동체'의 발전전략 -'지방재정'의 균형부터
20. [농정] '농협'의 개혁 해법 - '경제협동조합'으로 환골탈태를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