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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제학이 걸었던 길 ④ : 예송(禮訟)의 논리들
청개구리의 추억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뜬 뒤, 인조 왕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의 상복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 하는 전례(典禮) 문제로 시작한 것이 기해예송이었다. 정태화, 송시열은 자의대비가 이미 장자인 소현세자의 장례 때 삼년복을 입었기 때문에 차자인 효종에 대해서는 기년복(期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에 대해, 허목은 차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장자가 되었다는 차장자설(次長子說)에 주장하여 삼년복이 옳다고 하였다. 윤휴(尹鑴)는 그도 저도 틀렸고 왕에게는 어머니도 신하라는 신모설(臣母說)에 따라 삼년복을 주장했다.
한동안 예송을 놓고 대표적인 허례허식으로 치부하던 때도 있었다. 쓸데없는 논쟁에 매달려 조정이 실질적으로 백성들에게 필요한 일은 안 하고 허송세월했다는 해석 아닌 해석, 단정(斷定)이다.
그런데 어쩌랴! 사람은 죽는 것을. 죽으면 묻어야 하고, 그래도 죽어서 묻기까지는 뭔가 보내는 절차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사람들은 그를 추모하며 보내는 뭔가의 수습 과정, 마음을 추스르고 빈자리를 메우는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묻는다고 끝나는가? 사흘이든 닷새든, 산소에 묻었든 화장을 했든, 그 며칠로 망자와의 이별이 정리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러하다. 부모님 여의고 사흘, 닷새 만에 속이 후련해지는 사람은 없다.
상복=망자와의 거리
그래서 사람들은 사흘, 닷새의 장례 기간과 별도로 마음을 추스르고 망자의 빈자리를 메우는 연착륙에 필요한 상례 기간을 정하였다. 물론 상례의 방식, 절차 그리고 기간은 사람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조선시대 유가(儒家)들은 '산 자들의 의례'를 발달시켰다. 유가는 죽음에 대해 초월적으로, 즉 천당이나 지옥, 환생, 윤회 같은 관념으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적, 현실적으로 죽음을 생각한다. 몸은 생물학적으로 죽음과 함께 썩어서 사라진다. 망자의 기운은 이미 자손을 통해 계승되었고, 그의 행적은 그가 남긴 자취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역사'로 남는다.
당연히 상례의 방법과 절차도 망자와 산 자의 관계에 따라 차이가 난다. 관계라 함은 친하냐 조금 머냐, 얼마나 머냐를 말하는데, 이에 따라 오복(五服), 즉 다섯 종류의 상복이 결정된다. 즉 상복은 곧 망자와 나의 관계를 정리하는 상례의 외적 표현인 것이다. 이 오복은 참최(斬衰)·자최(齊衰)·대공(大功)·소공(小功)·시마(緦麻)의 다섯 가지인데, 각각 3년, 1년(기년), 9개월, 5개월, 3개월이 된다.
예를 들어, 대공은 상기가 9개월이다. 이 상복을 입는 대상은 종형제, 즉 사촌(四寸)의 상, 조부모가 손자·손녀의 상을 당했을 때, 시부모가 맏이가 아닌 며느리의 상을 당했을 때, 시삼촌이 조카며느리의 상을 당했을 때, 손자며느리가 시조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해당된다. 그러면 한두 가지 문제를 내볼까 한다. 여러분 같으면 다음과 같은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답은 없다. 다만 조선의 경우 어떠했는지, 이 글 맨 끝에 있다.)
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② 외조카가 세상을 떴을 때
③ 손자가 할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도덕주의가 아니라 유물론
가끔 상례의 번쇄함에 대한 논의를 볼 때마다, 거꾸로 생각해본다. 만일 상례가 없다면 어떻게 장사를 치를까? 이건 조의금을 얼마 낼지의 문제 수준이 아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금지옥엽 사랑하는 자녀가 먼저 세상을 떴다고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산 자들의 비극이다. 너무 뻔하고 그러기에 슬프디 슬픈 말이,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어쩌겠는가? 살아야지.
살려면 평상 활동으로 돌아와야 한다.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사업을 하다보면 노래방도 가야 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드라마도 보고 개그 프로그램도 보아야 한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작동하는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부모를 떠나보냈는데, 자식을 떠나보냈는데 편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살아야 한다. 소중한 이를 잃은 슬픔과 평범한 일상의 어디쯤에서 화해하기 위해 사람들이 만든 것, 그 중 하나가 상례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禮)를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라고 불렀다. 천리, 타고난 본성, 우주의 질서라는 뜻이다. 절문, 마디마디에 드러나는 문채라는 말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상황, 상황에서 본성대로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정리하는 활동이나 방식을 예라고 불렀다. 우리는 상황 속에 있다. 회식 때 앉는 자리, 버스 기다리며 줄 서는 방법, 남의 집에 가서 하는 행동…….
1년이면 곡식도 새로 나니까, 3년상이 아니라 1년상만 해도 되지 않느냐는 제자의 말에, 공자는 "그래도 네 마음이 편하다면 해라. 1년 만에 맛있는 음식 먹고 좋은 옷 입어도 네 맘에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고 대답했다.(물론 여기서는 경멸하는 느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제자가 나간 뒤에, (뒤에 대고), "저 놈은 3년 동안 부모 품에서 젖 먹으며 자라지 않은 모양이지!" 라고 말했다.
3년상은 도덕규범이 아니다. 적어도 사람 꼴을 갖추려면 누구나 적어도 3년은 젖 먹으며 보호를 받아야 한다. 잠깐. 실은 3년이 아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첫째. 3년은 만 2년이다. 그래서 2년상이 없는 것이다. 둘째, 사람 노릇을 하려면 3년 가지고는 어림없다. 세 살짜리가 어디 가서 혼자 살겠는가? 실제로는 십수 년 걸린다. 결국 인정(人情)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별을 정리하면서 산 자들의 활동이 가능하게 했던 기간이 상례 기간을 결정하고 그것이 상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이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관계와 생물학적 조건에 입각한 유물론(materialism)이다.
과거 전통적인 상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요즘에도 문상(問喪)을 할 때 뭔가의 절차와 표시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개 ○○상조회에서 와서 도와주는 모양인데, 상주는 완장 비슷한 걸 차고, 상주와 아닌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 한 줄짜리 완장, 두 줄짜리 완장이 있는 것도 보았다. 군대 당직사관 완장에서 착안한 듯하다. 빈소에서 상식을 올리는 것도 어디서 왔는지 족보가 애매한 의례를 상조회 직원들의 '지도' 아래 수행한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을 추스를 수도 없고, 그 시간을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재된 사화(士禍), 기해예송
기해예송은 실로 중요했지만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만 결정하면 되었다. 절차의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절차는 효종-자의대비의 관계에 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당연히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사회적, 정치적 함의를 담은 사안이라고 해서 다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있을 수 있는 논의나 논란'이 '심각한 정쟁'으로 바뀌었다면, 이렇게 질적으로 상황이 달라질 때는 항상 뭔가의 계기가 있다.
기해예송에서 그 계기는 윤선도의 상소였다. 윤선도는 윤휴의 삼년복을 지지했지만, 논리가 전혀 달랐다. 윤선도가 기년복설이 효종의 정통을 부정하는 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예송논쟁은 전례 논쟁에서 졸지에 가장 민감한 정치문제로 비화했다.(<현종실록> 권2 1년 4월 18일) 이 논쟁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정 신하들에 의해 일단 덮어졌다. 결국 윤선도가 함경도 삼수(三水)로 귀양 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윤선도가 세상을 뜬 뒤에 효종비인 인선왕대비(仁宣王大妃) 장씨(張氏)가 세상을 떴을 때 그때까지 아직 살아 있던 대왕대비 조씨의 상복 논쟁으로 재론되었다. 이를 현종 15년(1674) 갑인년에 일어난 예송이라 해서 갑인예송(甲寅禮訟)이라고 하는데, 현종이 송시열의 기년설을 오례(誤禮)로 판정하고 승하함으로써 숙종은 그에 따라 송시열 등을 귀양 보내는 조처를 취하게 되었다. 전례 논의가 사화로 악화되었던 것이었다.
예송의 바탕, 실용주의
당초 효종이 승하한 뒤 조대비 복상기간이 논의되었을 때, 정태화 등 대신들이 국제(國制), 곧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라 기년상으로 정한 바 있었다. 송시열은 삼년복을 입지 않는 네 가지 경우인 사종설(四種說)을 말하며, "인조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현(昭顯)의 아들은 바로 '정이불체(正而不體, 장손이지만 몸을 받은 아들은 아님)'이고, 대행 대왕(효종)은 '체이부정(體而不正, 몸을 받은 아들이지만 장자는 아님)'인 셈입니다."라고 했다. 실록에 따르면, 효종은 장자가 아니라는 송시열의 말을 듣고 정태화가 놀라 사종설이 아닌 국제에 따라 기년복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영의정 정태화는 오해한 것이다. 그 오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생겼다. 송시열의 의견은, 효종이 '체이부정', 인조의 몸을 받은 아들이지만 장자는 아니므로 어머니 자의대비가 삼년복을 입지 않을 뿐, 효종이 종통을 이은만큼 성서탈적(聖庶奪嫡 임금을 이은 중자=서자, 곧 효종이 인조의 종통을 가져감)에 따라 효종의 아들인 현종으로 왕위의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견해였다. '체이부정'이든, '정이불체'든 이미 왕위의 정통성은 효종에게 있는 것이고, 여기서 논점은 그렇게 왕위에 오른 국왕의 상례 때 입는 상복의 문제였던 것이었다. 즉, 효종이나 현종이 정통성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오히려 그 정통성을 상복에 어떻게 정리하는가, 합리화하는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반면, 정태화는 이런 논리를 모르고 '체이부정'이라는 송시열의 말에 놀라서 국제를 택하여 논의를 미봉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가 불일치하는 상황 자체에, 즉 종법(宗法)의 논리를 오해하는 상황 자체에 장차 진행될 예송의 불씨가 내재해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기가 하는 짓을 알아야
잘 알려진 대로 허목은 차장자설의 연장에서 송시열의 말하는 서자(庶子)는 첩의 자손이라고 하면서 효종은 중자(衆子 적처의 아들)이므로 자최 삼년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체이부정의 서자는 중자(여러 아들)라는 말이지 첩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허목의 견해에는 약점이 있었다. 여기서 제기된 것이 윤휴의 신모설(臣母說)이었다.
그러나 윤휴의 설은 역사적 사실을 오해한 것이고, 또 부모와 자식 간의 천리를 부정하는 견해로 귀결되어 버리기 때문에 말았다. 이때까지 예송은 복제 논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런 예송 논쟁의 성격을 심각한 정치 현안으로 전환시킨 것이 윤선도의 예설이었다. 윤선도는 삼년상 여부가 임금과 국운에 관련된다고 못 박음으로써 논쟁을 극단화했다. 물론 극단적인 논쟁은 더 이상 논쟁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윤선도를 제외한 누구도 이 사안이 더 이상 확대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권시(權諰)도 삼년상을 옹호하기는 했지만 윤선도의 과격한 언사를 비판했고, 원두표 등 대신들은 물론, 논쟁 당사자였던 윤휴마저도 사안이 사화(士禍) 수준으로 전개되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역사에는 불길한 예감이 현실화되는 경우도 많다.
윤선도는 귀양을 갔고 현종 12년에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가 기년복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군주를 비하하고 종통을 두 갈래로 나눈다.[卑主貳宗]"고 비난했던 논거는 윤선도 자신이 개입할 수 없었던 갑인예송의 씨앗이 되었고 악화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사화로 갈 일이 아니었는데
훗날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라는 학자는 <기해의례변(己亥議禮辨)>이라는 글에서 예송에 대하여 알기 쉬운 해석을 내린다. 위백규가 말하는 핵심은, "두 번 참최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이미 장자에 대해 참최복을 입고 또다시 차장자에게 참최복을 입거나, 이미 장자에게 참최복을 입고 또다시 장손에게 참최복을 입는 경우, 이렇게 되면 두 번 참최복을 입는 경우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세 번, 네 번 참최복을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를 이었다고 해서 모두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면, 장손(長孫)에서부터 적증손(嫡曾孫)․적현손(嫡玄孫)에 이르기까지 모두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차장자(次長子)에게 모두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면, 차장손(次長孫)에서부터 차증손(次曾孫)․차현손(次玄孫)에 이르기까지 모두 참최복이 끊이질 않아 장차 여덟 번, 아홉 번 참최복에 이를 것이니, 이것이 과연 의리에 맞겠느냐는 것이 위백규의 생각이었다. 이는 송시열의 팔대군(八大君)에 관한 설(說)에 대한 보론, 증손(曾孫)․현손(玄孫)에 관한 설에 대한 보론의 성격을 띤다.
팔대군에 대한 설이란 송시열이 허목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제시했던 논리이다. 세종과 왕후 심씨는 8남 2녀를 낳았는데, 8남은 문종(文宗), 수양대군(首陽大君), 안평대군(安平大君), 임영대군(臨瀛大君), 광평대군(廣平大君), 금성대군(錦城大君), 평원대군(平原大君), 영흥대군(永興大君)이고, 2녀는 정소공주(貞昭公主)와 정의공주(貞懿公主)였다.
허목의 견해대로라면, 가령 세종이 장수하여 문종이 먼저 승하하였다면 세종이 마땅히 참최복을 입어야 하고, 첫째 대군(大君)을 세워 적자로 삼았다가 첫째 대군이 또 불행하게 되면 또 참최복을 입고 또 둘째 대군을 세워서도 이와 같이 하여 팔대군(八大君)에 이르도록 모두 참최 삼년복을 입어야 되는 불합리성이 있게 된다고 송시열은 비판하였다.
비록 가정이기는 했지만 송시열의 팔대군설은 생각해볼 지점을 제공해준다. 바로 상례의 출발점이 슬픔의 정리, 일상의 회복이라는 점이 그것인데, 자꾸 삼년복을 입을 경우 인사(人事)에 지장이 있으니까 더 이상 확대하지 않는 것이 예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칫 산 사람이 상례만 치르다 죽을 수 있게 예를 실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받아들였는가!"
현종 원년(1660) 윤선도의 상소가 올라올 당시 문곡은 도승지로 있었다. 그러므로 문곡은 윤선도의 상소를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고, 실제로 이은상(李殷相), 오정위(吳挺緯), 조윤석(趙胤錫), 정익(鄭榏), 박세성(朴世城) 등 다른 승지와 함께 윤선도의 상소를 보았다. 그리고 6승지가 함께 현종에게 계를 올렸다.
금방 부호군 윤선도 상소가 승정원에 도달하였습니다. 그 상소 내용을 보았더니, 예(禮)를 논한다는 핑계로 마음 씀씀이가 음흉하였고, 어지러울 정도로 남을 속이고 허풍을 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말의 출납에서 오직 진실을 요하는 도리로서는 이러한 소문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될 일이오나, 다만 생각기에, 성상께서 보시면 시비와 사정이 판가름 날 것입니다. 상소문이 대전에 들어간 뒤 성상께서 그의 정상을 통촉하시고 분명히 가려서 호되게 물리칠 일이지, 신들이 지레 퇴각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이 상소문을 받아들인 뜻을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현종실록> 권2 1년 4월 18일)
참고로 이 계를 같이 올린 승지 중, 오정위, 정익, 박세성은 당색으로 보면 남인(南人)이었으므로 승지들의 계가 당색에 따라 편파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기록도 남인들이 편찬한 <현종실록>에 나오는 기사이다.
승정원 승지들은 국왕에서 올라오는 상소나 보고를 올릴지 말지 판단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왕의 명이라도 사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때는 거부할 수 있는 복역(覆逆)이라는 제도적 장치도 있었다. 아무튼 승지들의 말은 윤선도의 상소가 음흉하고 받아들여서는 안 될 듯하나 현종이 시비를 판단하기를 바라면 올렸다는 것이다. 이 말은 들은 현종은,
"그런 상소문을 알면서 왜 받아들였는가? 도로 내주어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전 참의 윤선도는 심술이 바르지 못하여 감히 음험한 상소문으로 상하의 사이를 너무도 낭자하게 헐뜯고 이간질하였으니, 그 죄 빠져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중한 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겠으나 차마 죄주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 그냥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내쫓으라." 하였다. 이렇게 정리된 예송은 15년 뒤에 사화로 이어졌다.
[본문 과제 참고자료]
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 3년상
② 외조카가 세상을 떴을 때 : 소공 5개월
③ 손자가 할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 자최 기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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