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과 차악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은 난감하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문제가 그랬다. 무엇이 최악이고 무엇이 차악인지조차 분명치 않았다.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얽힌 갑론을박을 살피다보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야당의 무공천 철회를 촉구하는 글을 몇 차례 썼다. 이유는 단순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선거를 '두개의 룰'로 치렀다는 나라는 들어보지 못했다. 한쪽만의 무공천이 선거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는 유권자들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민의 왜곡을 전제로 한 약속 지키기는 모순이다. 아직도 그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무공천 방침을 버렸다. 비정상이 정상화됐다. 6.4 지방선거는 하나의 룰로 치러진다. 정당공천 찬반 논쟁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잦아들고 있다. 이 협소한 제도 논쟁이 정치권의 블랙홀이 되는 일은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개운치 않다. 최악을 피해 차악을 마주한 느낌이 이런 건가 싶다. 차악의 실체는 야당 혁신의 가능성이 또 한 움큼 줄어든 것이다. 무공천과 새 정치는 어울리는 조합이 전혀 아니었으나, 무공천이 빠진 자리에서 새 정치는 다시금 갈 길을 잃었다.
당초 무공천의 기대효과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정치의 체면이다. 제 살 깎아내면서까지 약속을 지키는 것은 우리 정치에서 흔히 보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번지수 잘못 짚은 약속이 정상적인 선거보다 우위에 설 순 없는 일, 이에 관해선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둘째는 야당 내부에 온존하는 기득권의 토양을 갈아엎는 효과였다. 만약 무공천이 관철됐다면 새정치민주연합의 하부구조는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즉, 기초선거에 무공천한 야당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겠지만, 이는 야당 내부의 기득권 순환 고리가 끊기는 효과도 냈을 것이다. 자해적이나마 정당 개혁의 부수효과다.
기득권의 순환과정은 이렇다. 국회의원들은 지방선거 때면 자기사람을 공천하려 혈안이다. 그렇게 공천 받은 이들이 다음 국회의원 선거 때 지역구 선거운동의 중추가 되기 때문이다. 역으로 따지면, 지방선거 출마자들에게 현역 국회의원은 '슈퍼 갑'이라는 말이 된다. 이번 지방선거를 무공천으로 치러 지역조직이 무너지면 다음 총선에도 악영향을 받는다는 논리는 그래서 성립됐다. 다수의 야당 의원들이 그토록 무공천 방침 철회를 주장한 속내는 자기 선거와 무관치 않았기 때문이다.
무공천 철회가 결정되자 김부겸 전 의원은 "중앙정치권과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을 계속 움켜쥐겠다는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고 했다. 정당공천과 중앙정치의 기득권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현실'을 지적한 말이다. 야당 혁신이 정치 혁신의 한 축이라는 건 두말 할 나위없다. 그러하기에 야당 혁신의 기회라는 점에 주목하면, 무공천 철회를 '최선'이라고는 말 할 수 없었던 이유다.
개운치 않은 뒷맛은 점차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다. 공천권을 다시 손에 쥔 새정치민주연합은 '개혁 공천'을 입에 올렸다. 말은 옳다. 공천이라는 정당의 기능을 여론에 힘입어 회복했으니 여론의 눈높이에 맞는 개혁적인 공천을 해야 할 책임이 누구보다 무겁다. 그러나 공천 개혁은 주체 의지의 문제요, 대중들이 수긍하느냐의 문제다. 정해진 기준이 없다. 편의적으로 잣대를 들이댈 여지가 많다는 얘기다.
개혁 공천의 일환이라며 새정치민주연합은 현역 서울시 구청장과 광역의원의 20%를 교체하겠다고 발표했다. 다른 시도당도 이 같은 방안을 참고해 공천에 반영할 것으로 보인다. 20%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지분 나누기로 비쳐지면 개혁 공천은 허사다. 벌써부터 안철수 대표와 가까운 사람들을 심기 위한 포석이 아니냐는 반대진영의 볼멘소리가 나온다.
광주도 시끄럽다.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광주지역 국회의원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새 정치 바람을 확산시켜야 한다"며 윤장현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광주지역 국회의원 7명 중 5명이 안 대표와 가까운 윤 후보를 공개 지지한 것이다. 그러자 광주지역 경선에 나선 이용섭 의원과 강운태 시장이 "나눠먹기식의 구시대 정치"라고 반발했다.
경기도에선 경선 룰을 둘러싼 논란으로 몇 차례 파행 직전까지 갔다. 여론조사에 새누리당 지지자들을 포함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둘러싸고 김상곤 후보, 원혜영, 김진표 의원이 날카롭게 대립했다. 가까스로 봉합되긴 했으나, 이 역시 안 대표의 공천 지분 문제와 결부된 진흙탕 싸움으로 비쳤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위촉된 거물들도 엇박자를 냈다. 문재인 의원은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오찬에서 "개혁 공천이라는 것도 우리가 실천으로 보여드릴 일이지 개혁 공천을 해야 한다는 말로 너무 논란이 안 됐으면 한다"고 했다. 손학규 고문은 "민주화 성지인 광주에서 개혁 공천이란 이름으로 줄 세우기가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개혁의 깃발이 되기엔 너무 취약한 안철수 세력과 기존 대주주들의 이해관계가 부딪히며 공천 개혁이 시작부터 산으로 가는 모양새다. 무공천 논란의 긴 터널에서 방금 빠져나온 야당치고는 한가해도 너무 한가한 다툼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자신들이 수행한 정당공천 관련 조사 결과를 다시 들여다보기 바란다. 국민들의 50.25%가 공천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했다. 당원들 중에서도 무려 42.86%가 무공천에 찬성했다. 밥그릇 지키기와 지분 싸움으로 얼룩진 공천에 넌덜머리난다는 의견은 그 정도였다. 혁신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명제는 보다 선명해졌는데, 무공천 방침을 거둬들인 뒤로 야당은 다시 우리가 알던 그 모습 그대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