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스처럼 ‘세계’를 짊어졌던 버냉키
주말 내내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와 금융위기를 말하다>(벤 버냉키 지음, 김홍범․나원준 옮김, 미지북스 펴냄, 이하 <벤 버냉키>)를 읽으며, 필자는 뜬금없게도 '세계'를 짊어지며 처참한 고통까지 감내해야했던 헤라클레스를 떠올렸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의 간계로 에우리스테우스의 부하가 되어 성공할 가망이 없어 보이는 '열두 가지 노역'을 치른다. 네메아의 무서운 사자와의 싸움, 히드라의 퇴치, 아우게이아스의 마구간 청소, 아마존족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 뺏기, 게리온의 소 탈취 등.
이 중 가장 어려운 노역은 헤스페리스들이 지키고 있는 황금사과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헤라클레스는 황금사과를 얻기 위해 양 어깨에 무거운 창공을 짊어지고 있는 아틀라스를 찾아가 대신 그 일을 하겠다고 말한다. 이를 수락한 아틀라스는 황금사과를 가지러 갔고 헤라클레스는 잠깐이지만, 창공을 짊어지는 노역을 견딘다. 이윽고 아틀라스가 황금사과를 가져오자, 헤라클레스는 잔꾀를 부려 다시 아틀라스에게 창공을 맡기고 맡은 바 임무를 완수했다.
잠시이기는 하지만 세계를 짊어지고 있던 헤라클레스는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 그리스 작품을 모조한 2세기 로마의 복제품, <창공을 지고 있는 아틀라스>라는 조각에 형상화된 아틀라스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데, 이를 보면 세계를 짊어졌던 헤라클레스의 고통도 간접적으로 나마 짐작할 수 있다. 힘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그였지만, 창공을 짊어질 때 잠시 휘청거리기까지 했다니 말이다.
이 일화를 유비해 보면 1929년의 대공황 이후 가장 심각한 공황이라는 2008년 세계대공황을 온 몸으로 떠안으며 세계를 짊어져야 했던 연준 의장인 벤 버냉키(Ben Bernanke)도 헤라클레스처럼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노역을 감당하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워했겠는가?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행간에서 숨겨진 버냉키의 고통을 읽어내며 뜬금없기는 하지만 버냉키와 헤라클레스의 연관성을 상상해 보았다. 게다가 덩치로 보나 수염으로 보나 그와 헤라클레스의 외모도 비슷하니, 필자의 뜬금없는 생각이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중앙은행과 2008년 세계대공황에 관한 간결하고 깔끔한 지침서
이 책은 2012년 3월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버냉키가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연한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총 4회의 강연을 묶은 이 책은 중앙은행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2008년 세계대공황 시기 연준의 대응을 소개하고 있다. 제1강은 역사적 측면에서 연준의 기원과 역할을 소개하고 연준의 최종대부자 역할과 금융안정의 기능을 설명한다. 제2강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연준의 활동, 특히 1970년대 고인플레이션 시기의 연준의 대응에 초점을 맞춰 공과를 논한다.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은 제3강의와 제4강의에 집중되어 있다. 버냉키는 제3강의에서 2008년 세계대공황의 원인과 전개과정, 그리고 연준의 대응을, 제4강의에서 세계대공황 이후 금융시장의 안정과 실물경제 회복의 문제, 그리고 향후의 대응 방안에 대해 강연한다.
그런데 이러한 찬사는 서평을 쓰는 사람의 곤혹스러움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간결하고 깔끔한 책인데, 서평은 써서 뭐하겠는가? 그리고 이 정도라면 서평도 간단하게 끝낼 수 있지 않겠는가? "독자 여러분, 한번 읽어보시면 다 아실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서평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필자는 이쯤에서 이 노역을 마치고 싶은 심정이다. 심지어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반론은 각 강의의 말미에 있는 학생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에 거의 다 나와 있으니 말이다.
버냉키의 고뇌와 결단
그럼에도 필자가 이 곤혹스러움을 이겨내며 노역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서평을 쓰는 것이 좋은 것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필자는 <벤 버냉키>의 행간에 숨겨 있는 버냉키의 고뇌와 결단을 읽어내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행간에 숨겨진 버냉키의 고뇌와 결단을 읽어내 그가 취한 행동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이 책을 더 입체적으로 파악해보자는 의도였다.
우선 2008년 세계대공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버냉키는 '대마불사(大馬不死)'를 허용하더라도 시스템 붕괴를 막을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붕괴되더라도 시장 규율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 문제는 연준이 2008년 9월 15일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신청을 받아들이고 다음 날, AIG의 구제금융을 결정한 이틀간에 벌어졌다는 점에서 엄청난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이를 버냉키 자신의 증언으로 들어보자.
"리먼브러더스는 그 자체로만 보면 아마도 대마불사 식의 접근이 필요했을지 모르겠습니다. 리먼의 파산이 글로벌 금융시스템에 엄청나게 부정적인 영향을 실제로 미쳤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회사가 사실상 지급불능 상태였기 때문입니다."(169쪽)
"AIG가 만약 도산했더라면, 기본적으로 모두가 끝장났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입니다. AIG는 너무나도 많은 서로 다른 기업들과 거래 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153쪽)
"이런 조치는 무엇보다도 최종대부자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담보를 확보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대부였기 때문이지요."(154쪽)
"그래서 우리는 둘 중 차악을 선택했습니다. AIG의 파산을 막은 것이지요."(155쪽)
버냉키는 AIG의 파산이 금융시스템 전반을 붕괴시킬지도 모른다는 점을 두려워한 듯하다. 그 결과 그는 AIG라는 대마를 살려 주기로 결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종대부자의 원칙에 따라 양질의 담보 여부로 리먼의 파산과 AIG의 구제를 결정했다. 이틀 사이에 상반된 결정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당시는 급박한 상황이었고 이 상반된 결정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점이 이 결정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논리인 것이다.
이러한 금융시스템 전반의 붕괴에 대한 고뇌와 함께 버냉키는 중앙은행으로서 연준이 경제에 어느 정도 수준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듯하다. 이번 대공황은 전통적인 은행공황과는 달리 자산시장과 금융시장에서 공황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는 점에서 기존 공황과는 차이가 났다. 따라서 대응도 전통적인 은행업의 맥락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금융업 전반에 걸쳐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다보니 전통적인 중앙은행의 금융안정 정책을 넘어서는 새로운 프로그램과 흔히 양적완화로 알려진 비관행적 통화정책까지 동원된 것이었다. 다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2008년 12월 시점부터는 전통적 통화정책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방자금금리를 더 이상 인하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 우리에게 회복을 지원할 뭔가 다른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다소 전통적이지 않은 통화정책에 의존하게 된 것입니다. (…) 이 방식이 어떻게 작동할까요? 장기 금리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연방준비제도는 대규모 자산매입을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입한 자산은 재무부 증권과 정부지원기업이 발행한 주택담보대출 관련 증권이었습니다."(183쪽)
연준이 사용한 새로운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과 비관행적 통화정책은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그럼에도 이 조치들은 기존의 중앙은행이 사용하던 전통적인 통화정책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상당한 고민 끝에 버냉키는 연준 100년의 역사에서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대규모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과 양적완화정책을 단행했다. 그리고 이 조치들로 2008년 세계대공황은 진정되었고 전체 경제시스템은 붕괴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결단이 반드시 틀렸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의 주장을 보면 그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전대미문의 붕괴 사태를 실제로 막아냈습니다. 생각해 보면, 글로벌 금융시스템 전체가 무너져 내릴 뻔 했던 상황을 피한 것입니다. 이는 분명 다행스러운 일입니다."(156쪽)
"대공황은 최근의 경기침체보다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2008년과 2009년 초에 금융시스템을 안정시킨 강력한 정책 대응이 없었더라면 경제 상황이 이보다 훨씬 더 악화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점점 더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157쪽)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간 버냉키
이번 대공황은 전례 없는 것이었으며, 이에 대한 대응도 유례없는 것이었다. 2008년 세계대공황은 '공연한 야단법석(much ado about nothing)'이 아니었다. 정말로 세계경제가 붕괴할 뻔했고, 이를 막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이 모두 동원되었다. 제임스 펠커슨(James Felkerson)의 추계에 따르면, 이번 대공황에 투입된 구제금융 자금은 29,000,000,000,000달러, 즉 29조 달러였다. 이 돈을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계산의 편의를 위해 1달러=1,000원), 29,000,000,000,000,000, 즉 2경 9,000조원에 달한다. 이 막대한 규모의 돈은 대한민국 사람 1,000만 명에게 29억 원씩 나눠줄 수 있는 돈이다. 상상을 해보시라! 1,000만 명이 한꺼번에 로또에 당첨된 것을.
인류 역사에서 이러한 막대한 돈을 뿌리고도 찬사를 받은 사람은 아마 버냉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쉽다. 마치 헬리콥터에서 마구 돈을 뿌리듯, 온 세상에 막대한 돈을 뿌렸는데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버냉키가 퇴임할 때, 언론들은 "전대미문의 경제공황에서 버냉키를 만난 것은 미국 경제의 행운이다"(<월 스트리트 저널> 2014. 01. 27), "(버냉키는) 오늘날 중앙은행장의 전형적인 모델이다"(<파이낸셜 타임스> 2014. 01. 21)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이러한 극찬을 받고 버냉키가 떠났다고 해서 어려운 세계경제의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막대한 돈을 뿌렸음에도 금융시장이 안정된 것 이외에 경기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부동산시장은 추락을 멈췄지만, 그렇다고 회복된 것도 아니다. 또한 실업률은 여전히 높고 경기회복도 요원하다. 정부 재정적자는 계속 늘고 있으며, 늘어난 국가채무로 그 한도를 늘려야만 하는 사태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연준은 기준금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최종대부자가 아닌 최초의 투자자로서 구매한 정부보증 주택담보증권은 연준의 대차대조표 상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자산을 사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 자산의 구매액만큼 초과지준이 연준의 대차대조표 상에 존재하며, 이 지준에 대해서는 이자가 지급되고 있다. 비정상적으로 비대화된 연준의 대차대조표는 여전히 해결해야할 엄청난 과제이며, 이 해결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다른 한편, 공황의 주범으로 지목되었고 대마불사의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월 스트리트의 금융자본들은 다시 활력을 되찾고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으며, 다시 수십억 원의 상여금 잔치를 벌이고 있다. 또한 공황이 나자 금융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때 강하게 들렸지만, 공황을 만들어낸 금융자본의 활동을 강하게 옥죌만한 강력한 금융규제 방안이 시행되고 있지는 않다.
이와는 달리 2008년 세계대공황으로 손실이 사회화되면서 대다수 국민들은 여전히 고통을 견디고 있다. 집을 잃고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 일자리를 찾지 못해 무료급식소를 찾는 사람들, 연금이 줄고 사회복지 혜택을 받지 못해 비참함에 빠진 사람들, 미래에 이번 대공황의 손실을 부담해야하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대공황의 여파로 수령에서 헤어 나오고 있지 못하다. 세상은 안정된 듯하지만, 세상에는 잊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버냉키는 이제 이 모든 상황을 뒤로 한 채 연준을 떠났다. 그렇지만 그가 고뇌에 찬 결단으로 행한 일련의 조치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비유하자면, 헤라클레스는 짊을 내려놓았지만, 아틀라스는 그를 대신해 다시 '세계'를 짊어지는 노역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이제 역사 속에서 내려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이 <벤 버냉키>를 읽으며 염두에 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단지 버냉키의 처지에서 2008년 세계대공황과 중앙은행의 역할을 평가한 것일 뿐이며 세계경제와 연준의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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