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싱글남 김성균(가명) 씨는 요즘 틈틈이 부동산 직거래 사이트에서 전세 매물을 검색한다. 손에 쥔 돈은 5000만 원뿐이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몇 주일 동안 서울에서 5000만 원대 전세를 찾다가 포기한 김 씨는 "빚지지 않기로 한" 결심을 깼다.
김 씨는 최근 몇 주간 발품을 팔았지만, 5000만 원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집'을 구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반지하 아니면 곰팡이가 피거나 외풍이 심한 곳뿐이라고 했다. "외곽으로 빠지지 않는 이상 별 문제가 없는 집은 서울에서 평당 1000만 원은 기본"이었다.
고민 끝에 김 씨는 서울에서 전세 7000만~8000만 원짜리 10평 다세대주택을 구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월셋집은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연봉이 3000만 원이 안 되는 그에게 월세 지출은 큰 부담이었다.
대신 그는 '근로자․서민 주택 전세자금 대출'을 받을 계획이다. 3000만 원을 빌렸을 때 이자는 월 9만 원. 30만~50만 원가량인 월세와 비교하면, 한 달에 최소 20만 원 넘게 저축할 수 있다. 그래도 고민은 남는다. 그는 "전세 물량이 드물어서 집을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월세 전환 요구하는 집 주인, 떠나는 세입자
맞벌이 부부도 월세를 기피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울 강서구의 한 전셋집에 사는 남민정(가명·여·33) 씨는 최근 집 주인에게 전세를 월세(반전세)로 바꾸자는 연락을 받았다. 지난 2년 동안 남 씨가 사는 아파트 전세 시세는 1억5000만 원에서 1억9000만 원으로 올랐다. 집 주인은 전셋값을 올리는 대신 월세 15만 원을 달라고 했다.
자녀가 국공립 어린이집에 당첨돼 웬만하면 전셋값을 더 내고서라도 눌러 살려고 했던 남 씨는 다른 전셋집으로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 그는 "2년마다 오르는 전셋값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걱정"이라면서도 월세는 절대 피하고 싶다고 했다. 이사하려면 기존 전세 자금 대출 6000만 원에 4000만 원 빚을 또 내야 한다. 하지만 빚을 더 내더라도 전세로 옮기는 게 더 이익이라고 했다.
월세 세제 혜택을 늘리는 이번 정부 정책에 대해 묻자 남 씨는 "나는 소득이 많지 않아서 원래 내는 세금 자체가 적은데, 월세로 산다고 한들 얼마나 돌려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중산층 이상이라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반면 아파트에서 월세(반전세)로 살면 불확실성이 커진다고 했다. 그는 "(처음엔 15만 원에서 시작해도) 2년 뒤에 또 전셋값이 오르면 집 주인이 그만큼 월세를 올려달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전셋값 올라도 전세는 나왔다 하면 바로 나가"
세입자들이 전세를 선호하는 것과는 달리, 집 주인들은 전세를 월세로 전환하는 추세다. 저금리 현상이 지속되면서 월세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탓이다. 여기에는 주택 매매 시장이 안정기에 접어든 것도 한몫했다. 집값이 오르리라는 기대가 떨어지면서 무리하게 빚을 내서 집을 살 일이 드물어졌고, 그만큼 목돈이 필요한 집 주인도 줄어들었다.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주인들은 월세만 내놓고 세입자는 전세만 찾는다"며 "월세는 길게는 1년 넘게 안 나갈 때도 있지만, 전세는 나왔다 하면 바로 나간다"고 말했다. 이 중개업자는 "집 주인들이 노후에 월세를 받아 생활비를 충당하기 때문에 월셋집이 1년 넘게 안 나가도 전세로 바꾸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전세 물량 품귀 현상이 지속되면서 전셋값은 올랐다. 이 지역 40제곱미터(12평) 다세대 주택 전셋값은 3~4년 전까지만 해도 3500만~4000만 원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6000만~8000만 원으로 올랐다. 비슷한 시기 1억7000만~1억9000만 원이었던 79제곱미터(24평) 아파트 전셋값은 2억3000만~2억5000만 원까지 뛰었다. 그마저 없어서 계약을 못 한다.
도심은 더 심하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부동산 중개업자는 "4~5년 전까지만 해도 월세와 전세 물량 비율이 반반씩이었다면, 2012년 하반기부터는 8 대 2에서 9 대 1이 될 정도로 전세가 귀하다"며 "주인이 전셋값을 올려 불러도 세입자들이 빚을 더 내고 눌러 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 지역 40제곱미터(12평) 다세대 주택 전셋값은 1억2000만~1억3000만 원에 달한다. 같은 주택의 월세 매물은 보증금 5000만 원에 월세가 55만 원이나 된다. 이 관계자는 "그마저 월세 찾는 사람이 없어서 5만 원 정도 내려간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월세는 소폭 하락했지만 기피 현상이 뚜렷했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부동산 중개업자는 "신축 오피스텔 월세가 2년 전에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55만 원이었다가 지금은 50만 원으로 떨어졌지만, 경기가 나빠져서 원룸 수요도 줄었다"며 "20대 직장인들이 많이 찾았는데 요즘은 손님이 드물다"고 말했다.
"전세 수요 매매로 전환? 서민과 아무 상관 없는 대책"
전세 수요와 공급이 엇박자가 나면서 전세 세입자들의 고통은 커질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KB국민은행이 발표한 '2월 주택시장 동향' 조사 결과를 보면, 서울 아파트 전세 가격 지수는 2012년 8월부터 지난 2월까지 1년 7개월 연속 상승세 (12.88%)를 보였다. 같은 기간 연립 주택은 6.36%, 단독 주택은 4.04% 올랐다.
주택 시장의 월세화 경향에 맞춰 정부는 지난 2월 26일 '임대차 시장 선진화 방안'을 발표했다. 월세 사는 근로 소득자에게는 세금 혜택을 늘리고, 전세 세입자 최대 11만 가구에는 11조 원을 대출해 전세 수요를 매매로 유도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밖에도 월세 임대 소득에 대한 과세 방식을 변경해 주택 시장을 투명화하고, 2016년부터는 2주택 보유자의 전세 보증금에도 과세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대책이 세입자의 고통을 줄이기에는 한계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강훈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변호사는 지난 14일 '주택 전월세 대책 긴급 진단 토론회'에서 "빚내서 집 사는 정책에 정부가 국민주택기금을 몇 조 원씩 쏟아 붓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셋값이 치솟았으니 매매를 활성화하자는 정책 방향은 집을 구입할 능력이 없는 세입자에게는 소용없는 대책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홍헌호 시민경제연구소 소장은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되는 추세가 세입자 입장에서 좋은 변화는 아니다"라며 "집 주인이 전세를 월세로 급격하게 전환하지 않도록 유도해야 하고, 특히 전세 임대 소득 과세는 가뜩이나 부족한 전세 물량을 더 줄어들게 만들 우려가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