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대한의사협회와 정부 간 협의 결과는 의사협회가 원격 진료와 영리 자회사 허용 등 정부의 '의료 영리화' 정책을 사실상 수용하고, 건강보험 수가를 결정하는 의사 결정 기구인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 개편을 얻어간 것이 핵심이다.
사실 의사협회 집행부가 총파업 명분으로 내걸었던 1차 의정 합의 결과와 거의 달라진 게 없다. 달라진 건 의협이 얻게 된 합의의 대가일 뿐. 의협 지도부가 '의료 영리화'를 반대하는 국민의 여론을 등에 업고, 건정심 구조를 의료 공급자에게 유리하게 재편하는 밀실 야합을 했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보건의료단체연합,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건강보험가입자포럼 등 노동시민사회단체는 17일과 18일 기자회견 등을 열어 '제2차 의정 협의 결과'를 일제히 비판했다.
"선진국도 10년 걸린 원격 진료 효과, 6개월 만에 검증?"
시민사회단체의 비판의 핵심은 의협 지도부가 '의료 영리화'를 사실상 수용하는 협의 결과를 내놨다는 것이다.
우선 의협은 의사와 환자 간 원격 의료 입법을 수용했다. 오는 4월부터 6개월간 "시범 사업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입법에 반영"하기로 했다. 원격 진료를 허용하는 입법 자체는 반대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두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는 17일 논평을 통해 "새로운 시범 사업을 통한 국회 입법 추진은 의협과 합의했다는 명분을 정부에 더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동안 의협은 입법을 하기 전에 안전성과 효과성을 입증하는 시범 사업을 먼저 하자고 주장했고, 정부는 입법 과정에서 시범 사업을 하자고 주장했다. 인의협은 "원격 의료 입법 여부를 결정하는 시범 사업이었다면, '시범 사업 후 그 결과에 따른 원격 의료 추진 여부 재검토'라는 문구가 협의문에 들어갔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6개월간의 시범 사업만으로 원격 진료의 안전성, 효과성, 경제성이 밝혀진다는 의협 지도부의 주장에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미 이명박 정부 시절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355억 원을 들여 3년간 원격 진료 시범 사업을 벌였으나, 효과성을 입증하지 못한 탓이다.
이상윤 인의협 기획국장은 18일 "선진국에서는 이미 10여 년에 걸쳐 원격 진료에 대한 시범 사업과 연구를 하고 있지만, 안전성·효과성·경제성이 검증 안 돼 아직도 논란 중이고 정확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영리 자회사도 '문제점 개선'만 하고 사실상 묵인"
의협 집행부는 의료법인의 영리 자회사와 병원 간 인수합병 허용, 신의료기술 허가 간소화, 병원 부대 사업 대폭 확대 등을 뼈대로 하는 '투자 활성화 대책'에 대해서도 사실상 묵인했다.
애초 의협은 총파업을 결의하면서 투자 활성화 대책에서 의료 부분을 제외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최종 의정 협의 결과에는 "영리 자법인 설립 시 문제점을 개선"한다는 내용만 들어갔다. 영리 자회사 허용은 수용하되, 문제점을 일부 개선하는 협의체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영리 자회사 허용은 비영리법인으로 규정한 의료기관 전체를 사실상 영리병원으로 바꾸는 행위"라며 "정부는 (병원을 비영리로 운영한다는) 의료법의 근본 취지를 바꾸는 정책을 법 개정 없이 가이드라인으로 추진하겠다고 하고, 의협은 이를 묵인했다"고 비판했다.
"의료 영리화 내주고 공급자 중심의 건정심 개편?"
'의료 영리화'를 수용한 의협은 정부로부터 건정심 구조 개편과 수가 결정 기구인 '조정소위원회' 구성을 얻어냈다.
이찬진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은 "의협이 의료 영리화를 저지한다는 대의로 집단 휴진을 했지만, 실질적으로 얻은 것은 국민 이익에 반하는 수가 인상 구조를 법 제도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에 대해서는 "의료 영리화 정책을 관철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의협의 반대를 제거하는 대가로 국민의 이익을 팔았다"며 "공공 의료를 강화해야 하는 책임을 방기하고, 의료 공급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거래를 한 반사회적인 합의를 했다"고 비판했다.
건정심은 건강보험 보장성, 건강보험료, 의료 수가를 결정하기 위해 국민-공급자-정부 3자의 위원들로 구성된 사회적 의사 결정 기구다. 국민건강보험법에 근거를 둔 기구로, 건강보험 제도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건정심 위원은 건강보험 가입자 위원 8명(경총·민주노총·한국노총·지역가입자 등), 의료 공급자 위원 8명(의협·병협·치협·한의사협 등), 정부 대표인 공익위원 8명(복지부·기획재정부·건강보험공단·건강보험심사평가원 관계자 4명 및 장관 위촉 교수·연구원 4명) 등 24명으로 구성된다.
의정은 공익위원 8명 가운데 정부가 추천하는 4명을 가입자와 공급자가 같은 수로 추천하도록 국민건강보험법을 개정하기로 한 협의 결과를 내놨다. 또 수가 협상이 깨질 경우 건정심으로 넘어가기 전에 가입자·공급자가 참여하는 '조정소위원회'를 통해 논의하는 장치를 올해 안에 마련하기로 했다.
이찬진 위원장은 "국민을 대표해야 하는 가입자 위원 8명 중에 경총 등 사용자 단체 2명과 자영업자 단체 1명이 들어간 탓에 건정심은 지금도 국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기 어려운 구조"라며 "공익위원 2명이 공급자 쪽으로 가면 국민은 건강보험 결정 구조에서 쫓겨난다"고 주장했다.
수가를 결정하는 중립적 조정소위원회에 대해서 이 위원장은 "정부를 배제하고 가입자와 공급자로 구성된 수가 결정 구조를 제도화하겠다는 합의"라며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추천하는 위원 2명 정도 들어가고 나머지는 비전문적 구성원이 들어가면, 공급자가 지배하는 수가 구조가 결정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참여연대는 "건강보험법을 제정할 때 국민적 합의로 만든 거버넌스의 법칙을 의정 합의만으로 무너뜨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건정심 구조 개편을 의사단체와 정부가 합의하는 것은 월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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