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열린우리당 탈당, 한명숙 총리의 당 복귀, 현 정부 임기 내내 청와대를 지켰던 이병완 비서실장의 교체 등을 계기로 청와대의 '임기 말 체제'가 갖춰져가고 있다.
비서실장과 총리 인선의 내용이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대통령의 의중 속에선 이미 낙점이 이뤄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실상 '마지막 진용'은 완비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전언이다.
따라서 임기를 1년 남긴 노 대통령이 이같은 하드웨어에 담아 낼 '소프트웨어'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통과 여부와 별개로 개헌안 준비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한미FTA 협상도 막바지 단계다. 게다가 아킬레스건이었던 부동산 문제도 최근엔 확연한 안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국정을 정리하는 단계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청와대 관계자든, 여당 딱지를 뗀 열린우리당 관계자든 모두가 "노 대통령은 마지막까지 '열심히' 움직일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어깨 가벼워지는 내각과 비서실
한명숙 총리의 후임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김우식 과기부총리, 한덕수 한미FTA지원위 위원장, 전윤철 감사원장 중에서 인선될 것 같다"고 밝혔고 이병완 실장의 후임으로는 문재인 청와대 정무특보가 한 발 앞서나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에 누가 최종적으로 발탁되든지 간에 정무적 분야에 무게가 실렸던 한명숙-이병완 시스템과는 확연히 다른 관리-실무형 시스템이라는 기조를 벗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기존 의제들을 충실히 관리하며 국정을 마무리하기 위한 진용이라는 것. 개헌안 발의-탈당 등 정치적 카드는 이미 다 사용한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 중립성 시비를 피하기 위한 고육책의 의미도 포함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진용에 담긴 의미를 뒤집어 보면 '내각과 비서실에는 충실한 마무리 외에 별로 기대하는 역할이 없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다시 모이는 '어제의 용사들'
내각과 청와대 비서실은 '마무리'에 집중한다손 치더라도 노 대통령 본인의 움직임은 또 다른 이야기다.
노 대통령은 지난 해 연말 국무회의 석상에서 "앞으로 할 말은 다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수 개월간 거침없는 '말의 정치'를 전개해 왔다.
그 와중에 범여권의 대통령선거 출마예상자 지지율 1위를 한 번도 놓치지 않던 고건 전 총리가 낙마했고 대통령은 불시에 개헌 카드를 꺼내들었다. 언론, 정치권과의 충돌이 이어지며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졌지만 대통령의 지지층은 오히려 단단해졌고 지지율도 소폭 상승했다.
여세를 몰아 노 대통령은 자신에 비판적인 진보진영에 '관념좌파'라고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기숙 전 홍보수석이 '유연한 진보'의 이데올로그를 자임하고 나섰고 전 노사모 대표 명계남 씨는 무가지를 매주 5만 부 씩 배포할 계획을 밝히며 기염을 토하고 나섰다.
노 대통령을 다시 엄호하고 나설 '어제의 용사들'이 결집하고 있다는 말이다. 청와대브리핑 같은 홍보창구나 정무 분야의 일부 청와대 참모들은 이 대열에 어쩔 수 없이 포함될 수밖에 없지만 내각이나 청와대 비서실은 이같은 흐름과 일정 정도 거리를 둘 것으로 보인다.
"선거중립은 지키겠지만 정치적 중립은 다른 이야기"라는 최근 노 대통령의 수차례 공언이 바로 이같은 기류를 뒷받침한다.
남북문제와 언론문제가 두 가지 축으로 떠오를 듯
개헌안 발의, 한미FTA 등 굵직한 현안을 마무리 지은 후 노 대통령의 관심 분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6자회담 초기 이행조치에 이은 남북문제, 북미 관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사철 집값동향 문제가 남아 있지만 4월부터는 남북 문제를 쭉 잡고 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노 대통령은 지난 달 6자회담 타결 이후 수 차례에 걸쳐 "북핵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정착과 동북아시아 협력과 통합의 질서를 열어갈 수 있는 역사적 계기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핵폐기 이상'이 목표란 말이다. 외부적 조건도 나쁘진 않다. 특히 이라크 수렁에 빠진 부시 미 대통령도 부쩍 북한에 유화적 태도를 보이며 "(휴전 상태를 넘어선) 종전선언도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두 번째는 노 대통령의 주요 화두 중 하나인 언론 문제. 지난 1월 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기자들이 기자실에 앉아 죽치고 앉아 담합이나 하고 있다"며 외교부와 국정홍보처를 향해 "해외의 기자실 운영 실태를 보고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국정홍보처 관계자는 최근 "대통령 지시사항을 이행하고 있다"며 "늦어도 4월 이내에는 해외 사례를 종합한 보고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노 대통령은 최근 인터넷신문협회와 공동기자회견에서도 기자실 시스템을 비판했고 일부 관계자는 이에 대한 여론수렴에 나선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이번엔 <조선일보> 등 일부 보수 언론와 대립각을 넘어선 전 언론에 대한 전방위적 공세일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노무현 발 의제'들의 정치적 의미
노 대통령이 정치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을 가능성은 물론 없다. 남북문제, 언론문제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 이는 고스란히 노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으로 남을 수 있다. 게다가 이 의제들은 그 자체로서도 반(反)한나라당 전선의 축이 될 수 있는 파괴력을 갖추고 있다.
5일 윤승용 청와대 홍보수석은 "당장은 비서실장에 이은 수석보좌관들의 교체 요인이 없다"면서도 "다만 수석들은 개인적 향후 일정에 따라서 당장은 아니더라도 교체소요가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일부 수석 보좌관들은 2008년 4월 총선 출마를 이미 공언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윤 수석의 이날 발언은 '이들을 2008년 2월 25일 퇴임 시점까지 붙잡아 두진 않겠다'는 말로 해석된다.
결국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노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은 범여권의 복잡한 상황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면 정치권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노 대통령의 복심으로 꼽히기도 한 유시민 장관은 최근 "의원 자격으로라도 공무원연금법안을 처리할 것"이라며 "언젠가는 국회로 돌아가지 않겠나"고 말한 바 있다.
결국 노 대통령이 환경을 조성한 이후 '노(盧)의 사람들'이 정치판으로 복귀하는 그림이 가능하다.
노 대통령 장악력 강화의 결과는?
현재로만 따져도 범여권 내에 노 대통령 만큼이나마 지지율을 가진 주자도, 친노진영 만큼 결집력을 지닌 세력도 없다. 노 대통령의 향후 행보가 성공적인 결과를 낳을 때는 이같은 현상은 더 심화될 수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장악력을 임기 끝까지 확대해 나가는 것이 과연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상상하긴 어렵지 않다.
한나라당의 최대 전략 중 하나가 범여권을 '노무현의 자장'에 묶어 두는 것이라는 점은 시사적이다. 또한 노 대통령 본인도 "나는 차별화를 한 적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전혀 다른 이미지를 구축한 결과, 당선에 성공했다는 점도 돌이켜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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