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사장단은 48명이다. 이 가운데 호남 출신은 한 명도 없다. 얼마 전 삼성이 대학별로 채용인원을 할당했다가 철회한 일이 있다. 그때 부각된 사실이다. 삼성은 호남권 대학 출신을 잘 뽑지도 않지만, 승진시키지도 않는다.
삼성전자 반도체·LCD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뇌종양 등에 걸린 노동자, 그리고 그 가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이 지난 26일 언론 시사회를 가졌다.
다큐멘터리를 보다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삼성 임원 가운데 영남 출신이 많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 출신 임직원은 이런저런 혜택을 누렸다고 한다. 또 경북대 출신 임원도 많은 편이다. 그런데 <탐욕의 제국>에선 경상도 사투리를 듣기 힘들었다. 고(故) 황유미 씨의 부친 황상기 씨의 강원도 사투리가 귀에 울릴 따름이다.
고 황유미 씨는 속초상고를 나왔다. 황 씨와 같은 조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고 이숙영 씨는 광주여상을 나왔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만난 남편을 백혈병으로 잃고, 반올림을 찾아왔던 정애정 씨는 군산여상 출신이다. 정 씨가 졸업하던 1996년, 이 학교에선 150여 명이 삼성전자 공장에 취업했다고 한다.
이쯤에서 그림이 뚜렷해진다. 삼성이 호남 사람을 뽑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관리직으로 뽑지 않았을 뿐이다. 위험한 물질을 맨몸으로 다루는 생산현장에는 호남 사람들이 많았다. 김대중 정부 출범 전까지, 호남 사람들은 국적만 한국인일 뿐 우리 내부의 식민지 주민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 사람들은 아무리 똑똑해도 고위직에 진출하기 어려웠다. 호남 사람들도 비슷했다. 정애정 씨가 삼성에 들어가던 1996년은 그런 때였다.
정권이 몇 번 바뀌었지만, 가장 위험한 현장에 가장 소외된 이들이 투입되는 구조는 더 강화됐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편한 일자리는 그 반대다. ‘억울하면 공부 열심히 하지’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서울 강남의 부유층 자제들은 아무리 공부를 못해도 반도체 공장에서 약품 만질 일은 없다.
위험도 양극화한 세상이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삼성 공장에만 있지 않다. 지금도 산업현장에선 사고가 잇따른다. 죽고 다치는 이들은 거의 전부 비정규직이다. 그들은 국적만 한국인일 뿐, 실상 무정부 상태에서 살아간다. 정부도, 노동조합도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소리 없이 죽어간다. (☞관련 기사:<변호인> 천만 관객,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 <프레시안> 기자는 왜 조선소 하청으로 취업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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