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L 선생님께,
굳이 거리를 둬도 될 처지가 아닌 사이에 이렇게 편지를 드리는 것은 이번에 '프레시안 books'에서 숙제로 내준 게리 워스키의 <과학……좌파>(김명진 옮김, 이매진 펴냄) 서평을 준비하면서, 선생님께서 지난번에 던졌던 짧은 감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이런 감상을 남겼었죠.
"좌파가 좌파스러우려면 과학적이어야 하듯이, 과학도 과학적이다 보면 자연스레 좌파가 되지 않겠는가!"
한 후배 학자(김명진)의 뚝심을 격려하면서 덧붙인 덕담에 괜히 토를 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과학……좌파>에서 다루는 20세기 과학 좌파 운동의 역사는 바로 선생님의 감상을 둘러싼 논쟁의 역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바로 그 얘기를 좀 자세히 해보려고 합니다.
좌파는 과학적이어야 하는가?
그런 사고방식을 접할 때, 제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바로 워스키가 <과학……좌파>의 전반부에서 소개하는 193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J. D. 버널, J. B. S. 홀데인, 조지프 니덤과 같은 좌파 과학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빨갱이' 과학자들이 바로 (정도의 차이는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버널은 이랬습니다.
"버널은 (…) 과학을 기술과 사회 변혁의 원동력으로 파악했다. 모든 진보는 과학과 과학적 방법의 응용에서 유래했다. 일단 과학 분야에 자금을 지원하고 조직과 인력이 적절히 충원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이 뒤따라올 예정이었다. 이런 전망은 과학 노동자(와 과학적 소양을 갖춘 기술 관료)들을 과학적 사회주의의 전진을 계획하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사회의 핵심이자 권력 중심에 데려다 놓았다." (69~70쪽)
이런 버널의 생각은 최근까지 여러 가지 버전으로 변주되었죠.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일부 과학기술자와 이공계 대학원생이 중심이 되어서 전개했었던 한국의 과학기술자 운동 역시 이런 문제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가장 속류 버전은 이공계 출신의 목소리가 좀 더 커진다면 인문계 출신이 망쳐놓은 나라꼴이 훨씬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지금 돌이켜 보면, 버널과 그의 동료들의 생각은 참으로 순진한 몽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20세기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분명히 사회를 바꾸는 동력 중 하나였지만, 그 방향은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더욱더 고도화된 '자본주의'였으니까요. 더구나 과학자 혹은 과학적 소양을 갖춘 관료가 세상을 더 낫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난센스에 가깝습니다.
과학자로서의 업적만 놓고 보면 결코 손색이 없는 많은 이들의 이념적 평균치는 왼쪽보다 오른쪽에 치우칩니다. (평소에는 그토록 합리적인 과학자가 사회운동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죠.) 이공계 출신을 과학적 소양을 갖춘 관료라고 본다면, 그들의 이념적 평균치가 인문계 출신의 관료보다 더 왼쪽에 있다고 말할 어떤 증거도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사정이 이럴진대, 왜 여전히 많은 이들이 좌파와 과학을 한 묶음으로 생각할까요? 만약 그런 생각이 '더 많은 과학자가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바람의 다른 표현이라면 그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의 밑에 혹시 버널과 같은 사고방식이 깔려 있다면 저로서는 도저히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과학, 그 자체를 성찰하다
어쩌면 그런 주장은 과학기술의 '이용/오용' 모델에 근거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과학기술, 특히 과학은 자연을 '모사'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는 가치중립적인 것일 뿐인데,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문제라는 식상한 생각이요. 하지만 워스키가 <과학……좌파>의 후반부에서 조명하는 1970년대의 과학 좌파는 바로 이런 통념에 도전했습니다. 이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죠.
"(베트남 전쟁 중에) 베트남의 농촌과 민중을 모독한 과학 지식의 이용과 오용, 거대 기업의 살충제가 환경에 일으킨 '침묵의 봄', 흑인과 여성의 종속을 사회생물학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 등을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일들이 (과학기술) 오용의 결과물이 아니라 전후 사회 속에서 과학과 사회의 관계, 지식, 특권적 지위의 바로 그 핵심 속에 주입된 가치가 빚어낸 결과물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127쪽)
이 새로운 과학 좌파는 "과학의 지배는 저 아래 실험실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산물"(127쪽)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 <급진 과학 저널(Radical Science Journal)> 등의 잡지로 대표되는 이들의 '급진 과학 운동'은 엘리트 과학자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당대의 엘리트 과학자가 권력의 재생산에 어떻게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기여하고 있는지, 과학 지식이 생산되는 실험실은 어떻게 운영되고 감독받는지 또 현재 진행 중인 가장 최첨단의 과학기술(핵 발전, 정보통신 기술, 생명공학)을 추동하는 사회적 동인은 무엇인지를 폭로하고 성찰했습니다.
1970년대 이들이 내놓았던 고민은 지금의 시점에서도 전혀 낡지 않았습니다. 과학기술이 사실상 자본주의 국가와 시장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한 상황에서, 과학(기술)자의 '자율성' 따위를 읊는 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워스키가 날카롭게 지적하듯이,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을 가속화하는 데 버널과 같은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더구나 과학기술이 고도로 분업화되면서, 또 과학기술의 존재 이유가 갈수록 응용 가능성으로 경도되면서 과학자 자신도 자신의 특정한 연구가 전체의 시스템 속에서 어디에 박힌 톱니바퀴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했던 이 절규처럼 오늘날 과학기술자의 사정을 설명하는 말도 없죠.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
새로운 과학 좌파의 탄생을 기대하며
<과학……좌파>의 역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는 단 한 번도 과학기술자가 중심이 되어서 현대 과학기술의 의미를 근본부터 성찰하고, 또 그것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습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버널이 했던 주장의 속류 버전만 간헐적으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죠. (노무현 정부 때 이공계 공직 진출 확대를 추진했던 일단의 흐름도 그 한 예죠.)
그래서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일은 '좌파'와 '과학'을 연결시키는 일이 아니라, 현대 과학의 한계를 성찰하는 일을 모든 좌파의 필수 교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자본주의 과학"에 대한 "급진적 비판"과 실천이 부활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과학 좌파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새로운 과학 좌파 운동을 꼭 과학기술자가 독점할 필요도 없습니다. 과학기술자와 성찰적 시민이 연대하면서 만들어내는 과학 좌파 운동이야말로 21세기에 등장해야 할 새로운 과학기술 운동의 모습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새로운 과학 좌파 운동이 세계 어느 곳도 아닌 바로 한국 사회에서 싹 트길 기대합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오늘날 진짜 좌파는 과학기술의 한계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하고, 바로 그렇게 될 때 더 나은 삶에 어울리는 다른 과학기술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제안에 화답할 과학기술자와 성찰적 시민은 어디에 있을까요? 당장 L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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