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일 전 불쑥 한홍구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인사치레 없이 지내는 사이에 웬 전환가 했더니, 곧 나올 자기 책 리뷰를 부탁한다고 한다. 책을 봐서 쓰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쓰겠다고, 하나마나한 대답을 하고 통화가 끝났다.
저자 중에 내 리뷰를 받고 싶다고 하는 이들이 가끔 있다. 직접 연락하기도 하고 프레시안books 데스크를 통해 뜻을 전하기도 하는데, 기자가 일단 부탁을 받으면 내가 '착한 서평'을 잘 써주지 않는다는 경고를 한다고 한다. 그래도 좋다면 내게 연락한다.
나도 착한 서평 곧잘 쓴다. 하지만 저자 부탁을 받으면 '나쁜 서평'을 써야 할 사명감(?)을 느낀다. 내 눈에 띄고 마음에 들어서 쓸 생각이 나면 저자의 뜻을 일부나마 독자에게 대신 전해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굳이 부탁을 해올 때는 다르다.
부탁을 한다는 것은 자기 뜻을 전해달라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을 내놓으라는 것으로 나는 해석한다. 자기가 미처 못 한 것이든, 차마 못 한 것이든, 책에 담지 못한 다른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저자와는 '딴소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20세기 역사를 대상으로 하는 현대사는 특수한 상황을 겪어 왔다. 조동걸은 <현대 한국사학사>(나남출판 펴냄) 483쪽에서 현대사의 체계적 연구가 시작된 1990년대 이전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민주화운동이 긴 여정이었다는 것은 그 동안에 반민주적 독재기간이 길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리하여 역사학은 독재 권력을 피하는 방법으로 현실도피적인 문헌고증학으로 자위하기도 했다. 그것이 고고한 학문의 길이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아니면 현실에 참여하면서 군사정권에 기여하거나 반대로 민주화운동에 기여하면서 어용성과 저항성의 학문으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그럴 때에 집권자의 이해와 상관관계가 깊은 현대사를 학문적 양심에 입각하여 연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 혹은 현대사는 역사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중진학자가 있을 정도였다."
한국현대사의 체계적 연구가 1990년대에 시작되었다면, 바로 그 앞 단계에 강만길이 있었다. 그는 1960년대에 학술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조선시대 역사, 즉 중세사 연구에 종사했는데, 1980년대 초 4년간의 해직 기간을 전환점으로 개항기 이후, 즉 근현대사 방면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역사가의 시간>(창비 펴냄) 299~300쪽에 이렇게 적었다.
"(…) 나는 소설 쓸 재주는 없으니 역사책을 통해 세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의 변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서 역사를, 특히 우리 근현대사를 정확하게 그리고 가능하면 부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어 써서 널리 읽히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 일반의 역사의식을 높임으로써 유신 같은 독재정권의 반역사의 작태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저항할 수 있게 해야 역사가 발전할 수 있으며, 그 같은 역할을 역사학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해직기간에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후속편을 쓰지 않고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를 쓰게 했는지 모른다. 물론 창비사의 청탁과 도움도 있었지만, 그러나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후속편을 영원히 쓰지 못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강만길의 문제의식과 사명감은 그 후의 많은 현대사 연구자들이 물려받은 것이다. 현대사 연구를 위한 여건은 1987년 이후에야 현실로 이뤄지기 시작했는데, 그 필요성을 앞서서 예감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한 선지자들이 있었다.
현대사는 너무 오랫동안 금지되거나 방기되어 있던 영역이기 때문에 아직도 그 수요가 크다. 강만길은 정상적 연구 활동에 제약이 큰 해직 상태에서 원래의 연구 분야 대신 근현대사 쪽에 노력을 쏟게 되었다고 하는데, 나 역시 제도의 압력에서 벗어나 있다 보니 한국현대사의 흡인력에 끌려 들어오게 된 것이다. 수요가 공급보다 크기 때문에 생긴 흡인력이다.
뒤늦게 현대사 작업을 하면서 역사 공부에 관해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예컨대 사마천의 <사기>. 평생 가장 많은 시간을 바친 책인데, 새로운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생각하니 사마천도 '현대사' 연구자가 아니었던가? 그의 서술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 자신의 시대였다. 분량으로 보더라도 전한 전반기 백년의 서술이 절반을 훨씬 넘고, 전국시대까지 넣으면 90퍼센트 선에 이르지 않을까? 3황5제 이야기부터 시작은 하지만 춘추시대 이전의 서술은 본격적 서술을 위한 배경 설정 정도로 보인다.
아버지가 사마천의 자세에 접근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상적 연구 활동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근대역사학의 규범을 지키려고 애썼으나,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현재'의 역사적 의미가 자신을 압도할 때, 그분은 역사학도의 눈으로 현재를 기록하는 일에 나선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맞은 것은 우연한 일일 수 있지만 그렇게 이뤄진 기록이 큰 가치를 갖게 된 것은 우연하지 않은 이치에 따른 일일 수 있다. 강만길 교수 경우도 비슷한 사례로 이해된다.
40여 년 전 역사 공부를 시작할 때 근대역사학이 역사학의 완결된 형태라는 믿음을 배웠다. 20여 년 전부터 이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내게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 풍조와 관계없는 일이다. 역사학이 문명 발생 이래 취해 온 형태 중 하나가 근대역사학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여러 근대적 가치의 절대적 보편성을 의심하게 되면서였다.
근대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근대적 가치관을 받아들일 압력 아래 늘 놓여있다. 그 안에서 활동하는 역사가는 근대역사학의 규범을 받아들일 압력을 받는다. 그런데 자신이 처해있는 체제를 수긍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다른 관점과 다른 길을 찾게 된다. 체제를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재'에 순응할 수 없고, 다른 가치관을 세우려 한다. 그런 입장의 역사가는 직업적 전문가의 입장을 벗어나 사마천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널리 알려진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 말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맞서 있다. '과학적' 근대역사학의 근거 중 하나인 역사의 '실재성'에 대한 믿음 위에서 '현재'와 격리된(대화를 통해서만 연결된) '과거'의 존재를 카는 설정했던 것이다.
현재가 과거보다 좋아진 상태이고 미래는 현재보다 더 좋아진 상태가 될 것이라는 '진보'의 믿음이 근대세계를 풍미했다. 이 믿음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워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믿음에 지나침이 있을 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위험이 있다. 근대세계에서 자연조건의 제약을 무시하는 길로 나간 인간중심주의의 폐해에 대한 인식이 근년 확산되어 온 데서도 그 위험을 알아볼 수 있다.
나는 20여 년 전 동서교섭사 연구에 들어서면서 모든 일에 대해 상대주의 관점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유토피아의 꿈을 버렸다. 인간은 역사적 경험을 뛰어넘는 '멋진 신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힘 가진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농락하는 도구로 계속해서 이용될 것이다.
진보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가 무뎌질 수 있지만 그 대신 더 나쁜 세상을 피하려는 노력으로 지식인의 도덕적 의무를 충족시킬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투철한 역사가는 좋은 미래가 왜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는지 따질 수도 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던 과거가 왜 지금은 사라져버렸는지 따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현재를 미래와 과거로부터 단절시키는 관점에 만족하지 못한다.
저자가 그 동안 낸 책의 범위를 서평 쓰기 전에 확인하려고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보니 저자 이름 앞에 "한국 현재사학자"란 수식어가 붙어있다. 이 말을 누가 어떤 의미로 꺼낸 것인지 설명은 보이지 않는데, 짐작건대 저자 자신이 말장난처럼 꺼내놓고 설명은 붙이지 않은 것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역사가에게 '현재'가 갖는 의미에 마음이 쏠려있는 내게는 이 말에 대단히 심오한 뜻이 들어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강만길은 직업적 전문가를 요구하는 근대역사학의 제도적 규범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다가 뜻밖의 상황에 마주쳤을 때 규범을 뛰어넘어 '현재'를 탐구하는 길을 찾았다. 그런데 그 무렵 연구자의 길에 들어서던 역사학도들은 현실에 대한 투철한 비판의식 위에 새로운 길을 찾으며 한국현대사의 영역을 새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한국사 연구를 위해 미국 유학을 한다는, 일견 엉뚱한 방향을 한홍구가 찾은 것은 없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 무렵 국내에서 대학원에 진학한 서중석과 길은 달라도 뜻은 같은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한홍구가 미국 유학에서 그곳 교수들에게 얻은 가르침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가 받아온 학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권위 있는 미국 대학의 학위는 한국 학계에서 유력한 면허증이니까. 이 면허증 덕분에 그는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그 자유 위에서 그가 벌이는 활동에는 미국에서 얻은 가르침이 별 작용을 하지 않을 것 같다.
한홍구는 자유를 잘 찾아내고 잘 누린다는 점에서 뛰어난 역사학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를 통해 그는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성취하고 있는 것인가? 조지 이거스의 <20세기 사학사>(임상우·김기봉 옮김, 푸른역사 펴냄) 한 대목에서(26쪽)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점차 많은 수의 역사가들이 역사는 과학보다는 문학과 더욱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이러한 생각은 근대 역사학이 의거했던 전제들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역사의 대사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서 객관성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점차로 공감대를 얻었다. 이에 따라 역사가는 항상 그가 사고하고 있는 세계 안에 감금되어 있는 포로이며, 그의 사고와 인식은 그가 작동시키는 언어의 범주들에 의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이해되었다."
과학성을 중시하는 근대역사학은 과거를 현재와 격리시켜 객체화했다. 진행되고 있는 현실의 의미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관점이다. 자의적 해석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해 줄 수 있기 때문에 현존하는 체제에 역사학이 '복무'하는 추세가 나타나는 것이다. 랑케가 '실증'의 이름으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제창했지만 실제로 그의 주장은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었으며, 무엇을 볼 것인가의 선택을 통해 자기가 속한 체제에 복무했다고 하는 비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정말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받아들여야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과학을 통해 파악될 수 없다. 그렇다면 완벽한 파악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성실성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책임감 있는 태도일 수 있다. 과학보다 문학에 접근하는 역사 서술이 근대 이전에 더 일반적으로 행해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일이다.
늘 그래 온 것처럼 한홍구는 <유신>에서도 문학성을 갖춘 '이야기'를 풀어냈다. 기존 체제에 불신을 가진 역사학자로서 매우 성실한 태도로 나는 받아들인다. 그가 과연 어떤 가치관을 내놓는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하려고 서두르지 않는다. 설령 나랑 다른 것이라도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진 것이리라는 믿음을 갖고 그의 이야기가 쌓여 가는 것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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