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정치 선임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남북관계·한반도는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국제는 이승선 프레시안 국제 선임기자, 생태는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맡고 있습니다.
이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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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대만이 사상 첫 당국 간 회담을 열었다는 소식이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1949년 국공(國共) 내전으로 분단된 '양안(兩岸) 체제'에서 당국 간 공식적 회동이 처음으로 열렸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대만을 담당하는 부처가 따로 있는데, 이곳의 대표와 대만에서 역시 중국을 담당하는 부처의 대표가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가진 셈입니다. 중국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장즈쥔(張志軍) 주임과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왕위치(王郁琦) 주임이 양측의 대표로 만났는데, 회담 장소를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장쑤성(江蘇)성 난징(南京)으로 정해 대만 측을 배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 아래, 대만을 자국의 하나의 성(省), 23번째 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정부 간 회담'이라는 표현은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국의 시각으로는 65년 만에 첫 정부 간 공식 접촉이라든지 장관급 회담이 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87년 양안 간 첫 민간 접촉이 있었고, 양측 간 주민의 왕래를 허용했습니다. 이것을 '양안 1.0시대'라고 합니다. 이어서 21년 전인 1993년 최초의 준 정부기구 대화가 있었습니다. '양안 2.0시대'죠. 그래서 이번 장관급 회담을 계기로 '양안 2.5시대'가 열렸다는 표현이 가능합니다.
앞서 '양안 2.0시대‘를 열었다는 회담은 중국 해양양안관계협회와 대만 해협교류기금회가 싱가포르에서 개최한 것으로, 당시에 "갈등의 시대를 넘어서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후 정부의 장관급 회담이 열리기까지 21년이 걸렸습니다.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 간 1949년 이후 처음으로 장관급 회담이 열리자 중국과 대만 언론들은 '신(新)이정표', '신기원', '중대 돌파구' 등의 표현을 써 가며 이번 회담이 양안 관계의 새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경제관계는 ‘차이완’ 시대 도래
중국과 대만이 2000년 대 후반 들어 경제교류가 활발해졌다는 점에서 장관급 회담이 처음 열렸다는 소식이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차이완(Chiwan)'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China와 Taiwan을 합친 이 조어는 중국과 대만의 경제관계 외 민간 교류가 그만큼 긴밀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난 2008년 대만 독립 성향의 민진당이 실각하고, 친(親)중국 성향인 마잉주 대만 총통이 집권하면서부터 양안의 경제협력과 민간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 2010년에는 중국과 대만이 경제협력 기본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죠.
현재 대만은 국내총생산의 40%가 중국과의 투자 및 교역에 의한 것이고, 중국에 진출한 대만 사업가만도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지난해 양안 간의 교역은 1970억 달러로 전년 대비 16.7%, 2008년에 비해서는 2배로 증가한 것입니다. 인적 교류 역시 808만 명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지난해 말 대만 정부는 중국 본토 관광객의 대만 방문 상한선을 오는 4월부터 현행 하루 3000명에서 4000명으로 늘리기로 하고, 양안을 잇는 항공편 운항 수도 1주 828편으로 25% 확대하는 조치도 취했습니다. 지난해 한 해에만 중국 본토에서 대만을 찾은 관광객은 300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차이완'과는 거리가 멉니다. 대만은 지난 1991년 5월에서야 "본토 탈환을 위한 무력사용" 방침을 폐기할 정도로 중국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중국은 아직 대만에 대한 무력 통일을 배제한다는 입장을 밝힌 적이 없습니다. 또한 국제사회가 대만을 독립국가로 인정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만은 원래 유엔에 가입한 회원국이었으나, 1971년 중국에 의해 축출됐습니다. 힘의 논리에 지배되는 유엔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중국은 1971년 10월 25일 유엔 총회 표결에서 찬성 76, 반대 35, 기권 17표로 유엔 회원국 자격을 얻었고 대만은 유엔에서 축출된 것이죠. 또한 '하나의 중국'으로 누구를 택해야 하는 압박 속에 한국은 1992년 오랜 우방이었던 대만과의 국교 관계를 끊고 중국과 수교하는 현실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흔히 양안 관계를 남북관계와 자주 비교하는데요, 군사적 긴장관계만 본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만에서는 중국이 '무력 통일' 계획을 지금도 추진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은 지난 2000년 2월 21일 <하나의 중국 원칙과 대만 문제>라는 백서에서 "통일 전략은 평화통일이지만 통일 실현을 위해서라면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공식화했습니다.
대만 국방부는 중국이 대만에 대한 무력통일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는 분석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중국이 오는 2020년까지 대만을 군사력으로 '흡수'할 수 있는 수준으로 군비를 강화하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진먼다오 포격 사건’
중국과 대만의 군사적 충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1958년의 '진먼다오(金門島) 8.23 포격 사건'입니다. '연평도 포격 사건'을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차원이 다릅니다. 1958년 8월 23일 오후 6시를 기해 중국 인민해방군은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섬에서 불과 10㎞ 떨어진 대만 진먼다오에 2시간 동안 3만여 발, 이날 밤까지 6만 발 가까운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대만군도 해군과 공군을 출동시킴으로써 대만해협 일대의 해상과 상공에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습니다. 양측에서 전투기 30여 대가 격추되고 20여 척의 함정이 침몰했습니다. 중국군의 이날 하루의 포격으로 대만군 장성 3명을 포함해 대만 군인 600여 명이 전사했습니다.
미국 정부도 즉각 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함으로써 대만에 대한 수호의지를 드러냈지만 중국군의 포격은 10월 하순까지 44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동안 무려 47만 발의 포탄이 쏟아진 뒤였죠. 이후에도 간간이 포격이 이어지다가 1979년 1월 1일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맺은 후 비로소 멈췄습니다.
양안 갈등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중국 측 대표는 "이렇게 만난다는 건 이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양안은 한가족이며 연결을 끊을 수 없다"면서 "양측이 상시적인 연락과 소통을 할 수 있는 기구를 설치하고 양안 관계의 평화적 발전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상설 기구'의 성격은 사무소 설치까지는 가지 않고, '핫라인 개통' 수준이 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1992년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 아래 합의한 '92 컨센서스, 구이공식((九二共識)'를 토대로 ▲경제협력 심화 ▲언론 교류 활성화 ▲문화 교육 협력 확대 ▲중국 내 대만 유학생의 의료보험 적용 등을 추진키로 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장관급 회담이 대만 정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정치쇼'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2016년 초 총통 선거를 앞두고 9%까지 추락한 낮은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국면전환으로 중국과의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외교 행보에 나서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사되지도 않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 간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는 등 마잉주 총통이 주목을 받기 위해 중국과의 관계 개선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분석도 있는데요.
정상회담 성사될 가능성은?
마잉주 총통은 오는 10월 베이징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직접 참석해 시진핑 주석과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어떤 형태로든 두 사람이 정상회담 형식의 회동을 가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은 '국제회의 장소에서의 만남 불가'와 '국가 대 국가 지도자 회담 형식 불가'라는 2대 원칙을 철회하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대만이 지금까지 중국의 견제로 APEC 정상회의에 총통이 참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베이징 APEC 정상회의 전 시진핑과 마잉주가 적당한 장소에서 만나 마 총통의 APEC 정상회의 참가를 중국이 '용인'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러운 '중국 내 회동'은 가능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만 내 여론이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대만 국민 절반 이상이 현상 유지를 바랐으며 80%가 '통일'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마 총통이 2012년 1월 총통 선거를 불과 몇 달 앞두고 '중국과의 평화협정' 카드를 꺼냈다가 이루 여론이 악화되자 "평화협정 추진 논의는 당분간 없을 것"이라며 물러설 만큼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개선은 대만 내에서 정치적으로 인기 있는 정책도 아닙니다.
양측은 회담 전 미묘한 입장차를 노출시키기도 했습니다. 대만 입법원은 왕위치 주임에게 이번 회담에서 '해서는 안 되는 3가지'를 제시했습니다. ▲중국 측과 어떤 형식의 문건이나 공동성명도 채택해서는 안 되고, ▲'하나의 중국'이나 '대만독립 반대' 등 대만의 주권을 침해하는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어떤 형식의 정치적 담판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국 측도 대만 대표단에게 3가지 '금기 사항'을 전달했습니다. ▲대만 국호인 '중화민국'을 언급하지 말 것, ▲정치적 이슈를 거론하지 말 것, ▲인권이나 민주주의를 말하지 말 것이라는 3가지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열린 회담이다 보니, 앞으로 만들겠다는 '상설 기구'도 현재로서는 '상징성'에 더 무게가 실렸다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번 회담이 양안 관계의 중대한 전환점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미국과의 패권 경쟁 속에서 '중국과 대만의 화해 무드'는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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