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고객님, 2년 전 인터넷 가입해드렸던 아무개인데요, 지금 A사 인터넷 쓰고 계시죠? 이번에 B사로 바꾸면 위약금 다 내드리고 현금 8만 원 더 드릴게요. TV 채널도 더 넣어 드리고 월 요금도 5000원 씩 더 싸게 해드립니다. 나머지 약정 1년만 더 쓰시면 그 뒤에는 현금 40만 원 받고 다른 통신사로 이동할 수도 있고요."
A사와의 약정이 1년 남아 있었지만 A사를 그대로 이용하는 것보다 연간 14만 원 정도 이익이었다. 게다가 TV 채널도 늘어나니 바꾸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B사의 설치 기사가 와서 인터넷과 TV 장비들을 교체한 뒤 A사에 전화를 걸어 해지 신청을 했다. 잠시 뒤 '본사 고객센터'라는 곳에서 연락이 왔다.
"고객님, 2년 동안 잘 쓰셨는데 왜 해지하시는 거죠?"
'현금 8만 원에 1년만 더 쓰면 40만 원을 더 주고, 요금도 할인해주고, TV 채널도 늘려주겠다더라'고 모두 얘기했다.
"고객님, 그래도 약정이 1년 남았는데 아깝지 않으세요? 저희 통신사 1년 더 유지해주시면 상품권 24만 원 드리고 월 요금도 5000원 가량 할인해드리고 원하시는 채널도 늘려드리겠습니다."
B사의 인터넷을 이미 설치했기에 철회하기 위해서는 장비 회수비 5~7만 원 정도가 발생하지만 상품권 24만 원이면 A사를 그냥 쓰는 게 내겐 더 이득이었다.
그런데 괘씸했다. A사 2년을 쓰는 동안 요금만 따박따박 받아가더니 해지한다고 하니까 이런 저런 혜택을 주겠다는 것 아닌가. 만약 해지 신청을 하지 않았다면 결코 받을 수 없는 혜택이었다. 요즘 말로 '호갱님'(호구 고객님)이 된 기분이었다.
이 상담 내용을 이번에 인터넷 교체를 도와준 영업 사원에게 얘기했더니 이런다.
"고객님. 사실 인터넷은 1년마다 바꾸시는 게 이득입니다. 위약금이라는 게 약정 기간 동안 할인 받은 금액을 납부하는 건데요, 1년 정도 쓰시다 바꾸면 위약금이 10만 원 정도 나와요. 그러면 현금 40만 원 받고 이전하면 30만 원 정도 남죠. 매년 30만 원 정도 벌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1년은 쓰셔야 돼요. 그래야 현금(상품권) 사은품을 반납 안 하시거든요."
집에 있는 TV는 2001년 제작된 PDP TV. 지금도 멀쩡하게 잘 나온다. 그런데 셋톱박스, 무선공유기 등은 1~2년에 한 번씩 바뀌어 나가고 있다. 반납을 위해 떼어 놓은 셋톱박스 등은 멀쩡한데도 중고로 팔려가거나 폐기되게 생겼다.
이런 이상한 시장은 휴대전화 시장도 마찬가지다. 최근 '211 휴대폰 대란'이라는 사건이 벌어졌다. 인터넷 3사이기도 한 이동통신 3사가 점유율 확보를 위해 100만 원에 가까운 보조금을 일시적으로 풀면서 휴대폰 판매점 앞에 장사진이 펼쳐졌다고 한다.
그런데 소비자들의 반응은 '이렇게 좋은 기회가'라기 보다는 '이런 제길'이 대다수였다. 같은 휴대전화를 누구는 80만 원에 사고 누구는 40만 원에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니 소비자들은 휴대전화 한 번 바꿀 때면 신경이 곤두선다. '호갱님'이 될까봐.
많은 사람들이 '보조금으로 소비자가 휴대전화를 싸게 구입할 수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 한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보조금을 받고 휴대전화를 바꿀 때 보통 2~3년 약정을 한다. 보조금을 40만 원을 월 요금으로 환산할 경우 한 달에 1만~1만7000원 정도 요금을 할인 받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보조금은 휴대전화를 바꾸는 소비자에게만 지급하기 때문에 혜택이 통신 소비자들에게 고루 돌아가지 않고 인터넷처럼 적극적으로 갈아타는 이들에게만 돌아간다. 또한 약정과 결합된 보조금 경쟁은 소비자들이 휴대전화 기기 가격에 둔감하게 만든다. 요즘 웬만한 스마트폰 가격이 100만 원 안팎인데 1000원 한 장 없어도 고가의 최신 휴대전화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이런 시장에서 소비자들은 휴대전화 기기 가격을 월 통신요금처럼 인식한다.
덕분에 요즘은 청소년들도 비싼 스마트폰을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게 됐다. 4인 가족의 경우 평균 통신요금이 월 20만 원 정도인데 휴대전화 할부금과 인터넷을 포함 하면 30만 원이 넘는다.
통신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며 통신사들은 수익을 '고객 뺏어오기', '신기술망 개발에 따른 요금 인상'과 같은 전략으로 돌파하고 있다. 시장 포화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SKT는 연간 2조, KT는 8000억, LG유플러스는 5000억 원 대의 영업이익을 올리고 있다.
이 와중에 통신사들이 보조금을 뿌려(매출의 32%) 휴대전화 교체 주기를 빠르게 하니 휴대전화 제조사들은 기술 약간 추가하고 디자인 바꿔 수시로 신제품을 내놓으며 덩달아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정부는 시장을 바로 잡겠다고 보조금 규제에 나서지만 잘 하지도 못 할뿐더러, 요금 규제에는 소극적이다. 정부가 보조금 규제를 강화할수록 통신사의 이익이 늘어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어떨 때는 정부가 '전파는 공공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통신사의 이익은 통신 소비자들에게 고루 분배돼야 한다.
국민들은 오늘도 열심히 돈을 벌어 통신사에 바치고 있다. '호갱님'될까 노심초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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