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호인>은 크게 두 부분이다. 하나는 주인공인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가 ‘속물 세무 변호사’로 승승장구 하는 부분,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고문 피해자를 만나며 인권변호사로 거듭나는 부분이다. 뒷부분 못지않게, 앞부분도 인상적이었다.
건설현장 노동자로 일하며 모은 돈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했던 주인공이 끝내 합격한 이야기, 고학력자가 즐비한 법조계에서 고졸 학력 주인공이 ‘왕따’를 이겨내는 이야기, 남다른 성실성과 창의성으로 돈을 벌고 집도 장만하는 이야기. 지금은 듣기 힘든 이야기다. 가난한 젊은이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사회 주류에 편입했다는, ‘개천에서 난 용’ 신화는 이제 옛말이다. <변호인> 앞부분의 ‘성공스토리’에 몰입했던 건, 이 영화가 이젠 사라져가는 옛 이야기를 불러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극소수를 제외하곤 모두가 엇비슷하게 가난했던 시절, 그러다 고도성장 궤도에 올랐던 시절엔 ‘개천에서 난 용’이 나오기 쉬웠다. 경제성장과 함께 고학력 전문 인력의 수요가 대폭 늘었다. 따라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성공 기회도 많았다. 또 상류 계층과 하류 계층 사이의 문화적 간극도 지금처럼 깊지는 않았다. 유럽 귀족과 달리, 한국의 상류 계층은 뿌리가 깊지 않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과거 전통과 단절된 탓이다. 그래서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엇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둘 다 소주를 즐기고, 왜색 짙은 트로트 가요를 불렀으며, 영어 회화를 부담스러워 했다.
해방 이후 두 세대가 지난 지금은 다르다. 어릴 때부터 미국을 드나들었던 까닭에, 우리말 보다 영어가 더 편하다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은커녕 서울 나들이조차 흔치 않았던 시골아이들도 있다. 이들은 그저 국적만 같을 뿐, 아예 다른 세상에 산다.
<또 하나의 약속> 도입부에서, 영화 <변호인>을 떠올렸었다. 딸이 고등학교만 마치고 대기업에 취업하자, 아버지인 가난한 택시 운전사는 한껏 흐뭇해한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딸은 이미 다 큰 어른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의 무대가 속초의 가난한 집이 아니었다면, 예컨대 서울 강남의 전문직 가정이었다면, 어땠을까. 딸이 고등학교만 마치고 취업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가 좋아했을까. 딸이 구한 직장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한들, 부모는 인정하지 않았을 게다. 영화에서처럼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딸을 ‘어른’ 취급하지도 않았을 게다. 적어도 대학을 마치고, 괜찮은 일자리를 얻어, 결혼까지 해야 ‘어른’ 대접을 한다.
영화 <변호인>의 시대, 혹은 그보다 조금 앞선 시대엔 <또 하나의 약속>에 묘사된 부모 같은 경우가 아주 흔했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공고나 상고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그래서다. <변호인>의 실제 주인공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변호인>의 시대는 지나간 지 오래다. 잘 사는 서울 아이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일자리를 놓고, 가난한 시골 아이들이 경쟁을 벌인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갓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어른’ 세계에서 시달리는 동안, 넉넉한 집 아이들은 서른 넘어서까지 아이처럼 보호받는다.
그래서 ‘나이든 아이’로 살아가는 넉넉한 집 아이들은 행복한가. 그렇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정말 슬픈 건, 그렇지도 않다는 점. 정규직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고, 집구하기와 아이 기르기는 여전히 힘들기만 하다. 역시나 경쟁에 시달리는 ‘나이든 아이’들 가운데 많은 수는 부모만큼 살기가 힘들 게다. 부모보다 더 많이 공부했지만, 삶은 훨씬 불안정하다. ‘나이든 아이’들도 그걸 잘 안다. 그래서 더 심한 경쟁에 뛰어들고, 소수를 제외한 다수는 불행해진다.
‘나이든 아이’들이 공허한 스펙 경쟁에 시달리는 동안, 일터에서 온갖 위험한 일을 도맡는 ‘어린 어른’들은 조용히 죽어간다. 이른바 ‘글로벌 엘리트’, ‘S급 인재’가 즐비한 삼성전자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간 노동자는 대부분 ‘어린 어른’들이었다. <또 하나의 약속> 도입부에 나오는 것처럼, 시골의 가난한 아이들이었다.
용감하게 위험을 감수했던 이들이 성공했던, <변호인>의 시대는 이제 기억에서 지워야 한다. 위험도 양극화 한 시대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자본주의의 금언은 현실에서 통하지 않는다. 잘 사는 아이들은 더 적은 위험을 겪으며 더 큰 대가를 얻는다. 가난한 아이들은 온갖 위험을 뒤집어쓰지만, 대가는 턱없이 적다. 삼성 반도체뿐 아니라 최근 발생한 대부분의 산재 사건이 그렇다. 피해자는 거의 예외 없이 사회적 약자다. (☞'위험 양극화' 관련 기사 : <프레시안> 기자는 왜 조선소 하청으로 취업했나?)
그리고 ‘적은 위험, 큰 대가’를 제공하는 일자리는 계속 줄어드는 탓에, 먹고 살만한 집 아이들도 경쟁에 시달린 괴물이 된다. 낙오자에 대한 조롱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른바 ‘일베’ 현상도 어쩌면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이른바 진보 지식인 가운데 어떤 이들은 말한다. <변호인> 관객이 천만이 넘었는데, 왜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이렇게 높은지 모르겠다고. 현실에 눈감은 책상물림다운 반응이다. <변호인>을 보며 눈물 흘린 어르신들 가운데 많은 수는 영화가 묘사한 정의에 감동한 게 아니었다. 대학에 안 가도 사회 주류가 될 수 있었던 시대, 개인의 노력으로 계층이동이 가능했던 시대, 남이 기피하는 위험을 감수하면 대가가 넉넉했던 시대에 대한 향수가 그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런데 하필 그 시대가 독재자가 다스리던 민주주의의 암흑기였다. 여기에 한국의 비극이 있다.
<변호인>을 보고 눈물 흘렸다면, <또 하나의 약속>을 보고 신발 끈을 동여 매야 한다. 위험한 노동이 가난한 집 아이들의 전유물이 되지 않는 것, 그게 진짜 정의다.
○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 ☞ 연재를 시작하며:<프레시안> 기자는 왜 조선소 하청으로 취업했나 - 기자가 체험한 조선소 하청 노동 <1> 취업 면접 때 묻는 건 딱 하나, "버틸 수 있겠나?" <2> "목숨 갉아먹는 유리 먼지, 여기가 지옥이다" <3> 점심시간 1분만 어겨도 욕설에 삿대질, 경고까지 <4> "6미터 추락 반신불수, 책임자는 알 수 없어" - 조선소, 한국사회의 축소판 <1> 발 헛디뎌 죽은 다음날, 회사가 한 말은? <2> 노동자도 아닌, 사장도 아닌, 넌 누구냐? <3> 저녁 먹자던 아버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니… <4> "5년동안 몰랐는데 내가 바로 불법파견이더라" - 위험의 양극화, 대책은? <1> 폐암 진단, 길고 긴 소송, 얻어낸 건 장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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