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발 외환위기가 신흥경제국들의 연쇄 외환위기로 번질 것이라는 '경제위기론'이 계속되고 있다. 만일 누군가 이른바 경제전문가들에게 "이번 위기가 한국에도 몰아닥칠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거나 "상대적으로 한국은 타격을 덜 받을 만큼 안정돼 있다"는 등의 대답을 듣기 십상이다. 외국에서는 후자에 무게를 싣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프레임의 질문 자체가 식상하다. 정말 관심을 가져야할 경제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말 아시아 외환위기 때 한국 경제는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래서 국민들은 달러를 조금이라도 벌어들여 나라에 보탬이 되겠다면서 '금모으기 운동'을 자발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서구권에서는 "한국의 감동적인 애국심을 본받자"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그 뒤 결과는 어땠나? 외환위기 극복의 과실은 골고루 돌아갔나? 아니다. 오히려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금모으기 운동에 관심조차 없던 부자들과 재벌들이 그 과실의 대부분을 가져갔다. 한국의 빈부격차, 경제양극화는 IMF 사태 이후 급격히 악화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만일 나라 경제가 결딴나 지금보다 더 상황이 나빠질 것으로 우려된다면, 울며 겨자먹기로 '구국 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사례를 보자. 2000년대 초반에 아르헨티나는 사실상 디폴트까지 가는 위기를 맞았다. 그래도 아르헨티나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후 10여 년만에 아르헨티나는 다시 2000년 초반과 비슷한 외환위기에 휩싸였다. 일각에서는 그동안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아르헨티나가 아쉽다고 한다. 마치 제널럴모터스가 제대로 변화에 대처했다면 2008년 금융위기 때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나 비슷하다. 잘 나가던 기업들도 눈에 뻔히 보이는 망조의 길로 가는 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판에, 망조가 든 아르헨티나가 스스로 모순을 고칠 수 있을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르헨티나는 위기로 망한 것이 아니라, 빈부격차가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에 빠져있을 뿐이다.
위기설과 '한국경제 순항'의 공존
마찬가지로 한국 경제가 IMF 이후 정말 "다시는 이런 위기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정신을 차렸다면, '경제위기설'이 이렇게 자주 반복될 수 있을까?
기억하기로 2008년 이후 한국에서는 온갖 매체의 경제면이 '위기설'이 아니면 어떤 기사로 메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넘쳐났다. 외환위기설이 아니라도 한국경제를 위기에 빠뜨릴 '뇌관'은 도처에 널렸다고들 한다. 외환위기설이 아니면, 북한 리스크, 요즘은 '1000조 원에 달하는 가계부채'도 단골 주제다.
나는 이제 어떤 근거를 대면서 '경제위기'가 또다시 닥칠 것처럼 경고하는 전문가들의 전망에 지쳤다. 또한 "어찌어찌 하면 이런 경제위기에 직면하지 않았을 텐데 아쉽다"는 식의 사후약방문식의 분석과 처방에도 지쳤다. "주가가 폭락할 것이다", "이번 주가 폭락은 경제위기의 전조다", "한국의 국가부도 지표가 급등했다. 몇년내 한국이 부도를 맞을 가능성이 커졌다"는 등의 뉴스에도 지쳤다.
이런 분석과 전망과 뉴스가 넘쳐나는 동안 한편에서는 한국의 경제는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선방한 국가이고 지금도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있다는 진단이 내려진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낙수효과가 실종된 한국의 펀더멘털'이다. 한국의 빈부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빈부격차의 대표적인 지표인 지니계수는 정부가 발표를 꺼릴 정도로 악화돼 있다.
한국의 경제양극화를 보여주는 통계는 부실하고, 실업률 통계는 현실과 괴리감이 너무 크다는 지적이 나온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부는 "세계 최저 공식실업률"을 유지하고 싶은 욕심 탓인지 현실감 있는 통계를 만들어내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정작 정부가 공을 들이는 통계는 따로 있다. 중산층 정의를 소득 말고 다른 보조 기준을 도입해서 새롭게 정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중산층 정의가 정권의 입맛에 맞게 "그때그때 다르다"는 지적을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중산층 70% 공약 달성'을 지키지 못하게 돼서 나온 '꼼수'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사상 최대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황형 흑자'라니?
경제위기설이 나도는 동안 "역시 우리나라는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재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해 사상 최대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는데도 "불황형 흑자"라면서 수출을 더욱 늘려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국내 경제의 불균형을 강조하기 위해 수출 주도 정책을 비판하는 전문가들조차 '불황형 흑자'라는 규정에 동의하기도 한다. 정말 우리나라 경상수지 흑자가 '불황형'인가?
한국 경제의 무역의존도(국내총생산 대비 수출과 수입액 비율)는 90%가 넘는다.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를 빼면, 인구가 몇천만 명이 되는 국가로서 국내총생산이 1조 달러가 넘는 나라 중에 우리나라처럼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거의 없다.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는 정부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707억 달러에 달했다. 전년도에 비해 무려 200억 달러 넘게 증가한 것이다. 사상 최고치라는 전년도의 기록을 경신한 것으로 비율로 보면 거의 50%나 급증한 것이다. 경상수지 흑자는 역시 상품수지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상품의 수출과 수입액의 차이인 상품수지(수출-수입)가 무려 607억1000만 달러 흑자다.
원래 '불황형 흑자'라는 말은 수출은 별로 안 늘었는데 수입이 줄어들어 흑자 규모가 커졌다는 의미다. 지난해 수출은 5709억2000만 달러로 3.0% 늘어난 반면 수입은 5102억1000만 달러로 0.8% 줄었다. 수출이 크게 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늘었고, 수입은 아주 조금 줄어들었다.
이것이 불황형 흑자라고 해석할 수 있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수출입을 물량 기준으로 보면 수출은 5.2% 증가하고 수입 역시 4.3% 늘었다며 불황형 흑자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또 한은은 올해 경상수지 흑자가 550억 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따라 '불황형 흑자'라는 말은 오히려 수출을 지원하는 정책을 요구하는 재계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라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월별로 보면 가끔 경상수지가 적자를 보이거나 전월 대비 감소세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면 어김없이 "수출 전선에 비상", "올해 경상수지 급감할 듯" 같은 기사들이 쏟아진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경상수지 흑자는 외환위기가 발발한 1997년 이후 16년째 흑자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월별로 보면 24개월째 경상수지 연속 흑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기록을 보고도 '불황형 흑자'라는 말이 나올까? 물론 구체적으로 보면 원화 강세와 엔화 약세의 영향으로 지난해 일본에 대한 수출이 전년 대비 10.6% 줄어든 346억9000만 달러였다. 하지만 규모가 더 큰 대미 수출은 585억2000만 달러에서 620억6000만 달러로 6.0%, 특히 대중 수출은 1343억2000만 달러에서 1458억4000만 달러로 8.6% 증가했다. 따라서 '불황형 흑자'라거나 환율 때문에 국제경쟁력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은 주로 일본과 관련된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환율정책에 기대는 수출경쟁력 타령 언제까지?
사실 국내 수출대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이라는 게 주로 정부의 환율 정책에 힘입은 것이다. 그 대가는 내수 침체다. 국민의 부담으로 국제경쟁력을 지켜주니 과실이라도 골고루 분배된다면 덜 억울할 것이다. 그런데 수출대기업들의 논리는 "잘 되면 다 내 것이고, 못되면 국가적으로 책임질 일"이라는 것이다.
'가계부채 1000조 원'이 정말 한국경제를 파탄시킬 뇌관이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대외발 경제위기설만 퍼뜨리지 말고 골고루 부가 분배될 수 있는 정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최근 국책연구기관인 KDI도 보고서를 내고 "경상수지 흑자가 과도하다"면서 내수(민간소비와 투자)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주문하고 나섰다. KDI의 이 보고서에는 "경상흑자 유지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불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이 눈에 띈다.
KDI는 환율이 하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는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고, 원화가치의 절상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내수를 부양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오히려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수 활성화가 말처럼 쉽지 않다. 내수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민간소비 증가세가 높지 않다. 그 이유는 소득도 안 늘고 주거 불안과 가계부채 부담이 엄청나서 소비심리나 소비여력이 위축돼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경제위기설'보다 정말 한국 사회가 신경을 곤두세울 경제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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