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건 정율성이 본래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났고, 스무 살 무렵 중국에 건너갔다. 중국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바이올린과 성악 등을 배웠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 우리로서는 여러모로 관심이 갈 만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지난 2012년 한국방송공사(KBS)는 <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정율성이 남긴 일기와 메모 등을 토대로 해 그의 인생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제작진이 정율성의 한국전쟁 참전 사실을 프로그램에서 다루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방송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 이 프로그램에 대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의 심의가 새삼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보류되었던 심의가 재개된 것이다. 프로그램이 심의에 올라간 이유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공산주의자를 미화했다’는 것이다. 2014년 1월 9일에 열린 방심위 전체회의에서는 ‘정율성 다큐’에 대한 징계를 둘러싸고 공방이 벌어졌다. 회의록에 나타난 위원들의 발언을 간단히 살펴보자.
“이념적으로 북한체제 확립에 기여한 사람을 단지 그가 식민지 시대에 항일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영웅시하는 것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남북현실에 비춰볼 때 위험한 태도다.” (박만 방심위 위원장)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율성 씨는 우리의 가슴에 총을 겨눠서 250만 명이 희생된 6․25전쟁에 참여한 공산주의자이다. 그 증거는 중국 공산혁명의 유공자로 혁명열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권혁부 방심위 부위원장)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정율성은 한국전쟁에 중공군으로 참전한 민족의 적(敵)인데 이러한 점을 충분히 다루지 않았으므로 이 프로그램은 공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못하다는 것이다. 제재에 반대하는 일부 위원들은 ‘구체적으로 이 프로그램이 어떤 점에서 공정성, 객관성 규정을 위반했다는 것이냐’며 설명을 요구했지만, ‘공산주의자라는 점이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답이나 설명이 없었다. 공영방송인 KBS가 무려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로 정율성을 다룬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객관적이지 못한 이유를 도무지 찾기가 어려웠는지 나중에는 “(주관적인) 정율성 개인의 일기나 메모를 중심으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객관성이 없다”는 궁색한 이유까지 나왔다.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통일은 대박’을 외치는 2014년이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징계를 외치는 위원들은 대체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가. 혹여 징계를 주장하는 위원들이 방송프로그램 자체에 대해 다소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여지는 없을까. 예컨대 방송의 지대한 영향력을 감안할때 공정성․객관성 심의는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 같은 거 말이다. 차라리 그랬다면 조금이나마 위원들의 의견에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위원들은 비슷한 시기에 백선엽이라는 논란 많은 인물을 일방적으로 미화한 KBS의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에 대해서는 공정성이나 객관성에 문제가 없다고 결정했다. 당시 권혁부 방심위 부위원장은 “(백선엽의 공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데, 백선엽 장군을 좀 미화한들 뭐가 문제 되느냐”라는 발언으로 빈축을 사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현재의 방송심의가 그저 조롱거리 이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처럼 뚜렷한 기준도 없이 정치적 진영논리를 심의결과에 관철시키는 데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율성 다큐’에 대한 심의과정을 보면, 새롭게 개정된 방송심의규정 중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 조항(29조의2)이 어떻게 악용될지 예상하게 된다. 논란 끝에 새롭게 들어간 이 규정의 내용은 “방송은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해치는 내용을 방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위원들이 ‘헌법질서를 해친다’고 판단하면 그만이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 최찬묵 심의위원이 한 발언을 보자. “정율성의 음악성이 얼마나 높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대한민국을 침략하고 또 파괴하는 데 가담함으로써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주의를 유린한 것보다 더 위에 놓을 수 없다.”(2012년 3월 회의록) 이 규정이 일찍 심의규정에 들어갔다면, 이 프로그램에 대한 징계이유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새로 들어간 이 심의규정은, 현 체제를 비판적으로 다루거나 사회주의자를 조명하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경우 징계의 수단으로 쓰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이다.
다 제쳐두더라도, 프로그램이 방송된 지 2년이 다 된 시점에서 새삼스레 징계를 추진하는 장면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이다. 박만 방심위 위원장은 지난 2012년 4월 ‘정율성 다큐’에 대한 논란이 많으니, 방송학회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며 이 프로그램에 대한 심의를 보류했다. 보류된 심의를 1년 8개월 만에 재개하면서 별다른 설명도 없다. 심의가 적기(適期)를 놓쳤다면, 심의를 진행하지 않으면 된다.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아무 때나 심의의 칼을 휘두르는 것은 방심위를 스스로 우습게 만들 뿐이다. 안타까운 것은, 심의제도가 대대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심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번 방심위원들의 임기는 오는 5월에 종료된다. 이 시점에 맞추어, 방송심의제도 전반에 대한 대대적 개혁이 필요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은 때이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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