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은 경찰력이 지배해 버렸다. 5월 공사 재개 때만 해도 주민과 한전 직원과의 싸움을 지켜만 보던 경찰은 이제 선제적으로 주민의 반대를 막아내고 있다. 이달 초 공사 재개 때와도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경찰의 '호위'를 받아 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아직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127번 등의 현장에도 머지않아 공권력이 투입될 가능성이 크다.
명분과 논리를 다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대화나 소통은 커녕 당사자 간에 싸워야 한다는 원칙도 사라진 지 오래다. 불행하게도 밀양은 완력이 지배하는 가장 원시적인 공간이 돼 버렸다.
최근 일부 언론은 동화전 마을의 공사 찬성 소식을 기사화했다. 오랫동안 반대하던 마을 주민들이 찬성 도장을 찍어줬다는 내용이다. 이 언론들은 마치 밀양 주민들이 찬성으로 돌아선 것처럼 보도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합의 과정에서 주민이 직접 서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공사 찬성이 아닌 구속된 주민의 석방 탄원서로 알고 서명한 주민이 많았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이같은 의혹으로 주민 일각에서는 합의 무효 서명과 이장 교체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5일 동화전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은 한결같이 송전탑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전제를 깔고 말을 시작했다. 한 주민은 "경찰이 막으니 공사를 막아볼 어떤 방법도 없더라"는 말로 무기력감을 표현했다. 옆 마을인 바드리마을에서 경찰과의 마찰로 인해 한 주민이 구치소 신세를 진 것도 주민들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이 마을에는 공사를 반대하면 경찰서에 잡혀가서 이틀 사흘 구치소 신세를 지고 나온다는 말이 파다했다. 또 한 주민은 "주민 간 갈등만 심해지고 경찰 때문에 어차피 막지도 못할 바에는 농사일을 돌보는 게 낫다"면서 반대 입장 철회의 속내를 밝혔다. 그러나 그 역시 송전탑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는 못했다.
24일 밤 동화전 마을에서는 공사 찬반에 관한 주민 모임이 있었다. 모임은 싸움으로 얼룩졌고 투표는 무산되고 회의는 파행을 겪었다. 주민 다수가 찬성으로 돌아섰다는 식의 보도만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주민들이 오랜 싸움에 지친 것은 사실이다. 경찰력에 대한 공포심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수의 주민이 찬성으로 돌아섰다는 주장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다.
경찰의 공권력은 주민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25일 오후 109번 현장의 공사장 인부의 교대를 막아서던 주민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노주근(77) 할머니가 다쳤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여경은 할머니의 팔다리를 붙잡고 들어내다 바닥에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고 했다. 노 씨는 다리 관절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고 허리가 좋지 않아 고생하고 있었다. 다리를 잡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여경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결국 노 씨는 주민들이 부른 구급차에 실려갔다. 경찰은 공사 인력 교대 차량이 통과하자마자 현장을 벗어났다. 경찰력 행사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특히 여경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은 상당했다. 상황이 끝나면 '그 가시나들'에 대한 성토가 한참 이어진다. 성추행 시비를 막고자 시작된 여경 투입은 그 과정이 의외로 과격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밀양의 경우 노인들의 부상으로 이어지는 일이 많다.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에 따르면, 30일 현재 44명의 노인이 응급실에 실려갔고, 3명이 아직 병원에 있다. 23명이 연행 혹은 임의동행 형식으로 출석 요구를 받았고, 2명이 구속됐으며 1명의 주민이 수감돼 있다.
공사를 저지하는 주민들의 환경도 점점 나빠지고 있다. 109번 현장의 경우 주민들은 공사가 진행되는 산에 오를 수조차 없다. 경찰이 통행을 제한한 것이다. 이달 초 109번 현장까지 오르내리며 반대하던 주민들은 공사를 막기 더 어려워졌다. 헬기는 쉴 새 없이 자재를 나르고 주민들은 그저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여론은 밀양 주민에 다소 우호적으로 돌아서고 있다. 23~24일 실시된 <프레시안>의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46.9%가 '송전탑 공사를 일단 중단한 후 지역 주민과 대화해야 한다'고 답했다.(관련기사 바로가기) 예정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응답 48.2%와의 격차를 줄였다. 곧 이어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뷰가 27일 조사한 결과에서는 '밀양 주민의 주장에 더 공감한다'는 응답이 46.1%로 '한전의 주장에 더 공감한다'는 응답 42.3%를 앞질렀다.
문제는 현장이다. 이러한 여론은 현장에서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이미 물리력이 지배한 공간에서는 명분도 논리도 세상의 이목조차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밀양 송전탑 갈등은 이미 바닥까지 곤두박질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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