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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외면한 그림자 엄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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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외면한 그림자 엄마 이야기

'삼성 직업병' 피해자 ① 한혜경 씨와 어머니 김시녀 씨의 하루

'삼성 백혈병'으로 상징되는 산업 재해 피해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끝내 산재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먼저 세상을 등진 희생자의 유가족은 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이들의 일상을 따라가기로 한 것은 이 문제가 지금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를 기록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고 이 매듭을 풀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이 다르지 않은 고통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경고음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8년째 투병 중인 한혜경 씨와 그의 어머니 김시녀 씨, 작년 5월 세상을 떠난 이윤정 씨의 남편 정희수 씨를 만났다. 이들의 평범한 하루를 기록했다. <편집자>


혜경 씨와 그림자 엄마

엄마는 그림자 같았다. 하루 종일 혜경 씨 옆을 떠나지 않았다. 보행기를 잡고 걷는 딸의 뒤를 엄마는 왼발 오른발 맞춰가며 따라 걸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 갈 때도 함께였다. 그렇게 8년. 엄마는 딸의 삶을 따라 살고 있었다.

혜경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1995년 10월 삼성전자 LCD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수백 개의 칩이 꽂힌 회로기판에 솔더크림을 바르고 챔버(가열기)에 넣었다 뺀 뒤 까맣게 타버린 불량을 체크하는 일을 했다. 솔더크림의 주성분은 납. 안전에 관한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한 채 2001년까지 6년을 일했다.

2005년 소뇌에서 종양이 발견됐다. 크기로 봐서 7~8년은 된 종양이었다. 머리를 열고 종양을 제거했다. 예전 같으면 수술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지만 수술은 감행됐다. 종양은 다 제거되지 않았다. 목숨은 살릴 수 있었지만 후유증은 컸다. 지체장애, 시력장애, 언어장애 1급. 제대로 걷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산재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업무 연관성이 없는 개인 질병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재심까지 불승인되자 2011년 4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을 걸었다. 2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 오는 4월 12일 예정된 것까지 공판만 여덟번 째다.

지금은 어떤 상태일까? 사물이 여러 개로 보이는 복시 때문에 안경알 한쪽을 뿌옇게 만들어 놓았다. 왼 눈은 쓰지 않는다. 두 다리는 중심 잡기와 힘 조절이 되지 않는다. 1년 전부터는 보행기를 잡고 걷게 됐지만 아직 혼자 걸을 수는 없다. 듣고 생각하는 데는 무리가 없지만 말은 느리고 어눌하다.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는 음절을 조합해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다.

밤에는 두세 차례 꿈을 꾼다. '학교 가야지'라고 잠꼬대를 하면서 신발을 신으려고 내려오다 넘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서울대 분당병원에 입원했을 때 기절이 잦아 먹기 시작한 약 때문에 생긴 증상이다. 아침에 9알, 낮에 2알, 저녁에 9알의 약을 먹고도 자기 전에 꿈 안 꾸게 하는 약 4알을 먹어야 한다.

어머니 김시녀 씨는 딸 간병 생활이 8년째다. 이젠 병원 생활에 이골이 나서 집에는 1~2주에 한 번밖에 들르지 않는다. 병원이 더 편하다고 말한다. 힘든 때는 아플 때다. 딸을 돌봐야 하니 아파도 가지 않던 병원에 조금만 몸이 이상해도 달려가곤 한다. 딸 때문에 아플 수도 없다. 때론 아프지도 못하는 게 서럽기도 하다.

엄마의 하루는 혜경 씨와 정확히 일치한다. 오전 6시 30분에 일어나 혜경 씨를 목욕시키고 7시 반이면 아침을 먹는다. 9시 반에 재활 치료, 11시 반에 작업 치료를 다녀온다. 점심을 먹고 걷는 연습을 하고 3시 15분에는 자전거 운동 기구를 태운다. 30분이던 것이 이용자가 많아 그마저 25분으로 줄었다.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 간이 침대에서 잠이 든다.

행복한 가정 이루는 꿈, 그러나…

엄마는 혼자 식당을 해서 남매를 키웠다. 고생하는 엄마를 본 딸은 착하고 속 깊게 컸다. 하루 500원을 주면 아끼고 모아 한 달에 2000원을 쓰고 1만3000원을 돌려주는 딸이었다. 삼성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삼성은 일의 강도가 셌지만 성과급이 많아 일을 많이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6년을 다녔다. 김시녀 씨는 삼성에는 똘똘하지만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다녔다고 기억한다.

혜경 씨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좋은 남편을 만나 아이들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그녀는 평범하게 살았고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물론, 이 소박한 꿈을 꾸게 된 데는 불우했던 유년의 기억도 한몫했다. 혜경 씨는 홀로 남매를 키운 엄마에 대한 애착만큼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도 강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혜경 씨의 꿈은 병이 생기면서 산산조각 났다. 고생하며 마련하고 지킨 아파트는 병원비로 고스란히 날아갔다. 모아 놓은 돈도 거의 다 써버렸고 지금은 월세집을 얻어 산다.

"뭐 생각해?"

"또 늦어진 거."

"몇 년을 기다렸는데 또 못 기다리겠냐."

"엄마 미안해."

"뭐가?"

"엄마 인생이 없어졌으니까."

"넌 엄마가 이러면 버릴 거니?"

"아니 그건 아니고…."

"혜경이 네가 나야."

혜경 씨는 밤마다 간이 침대에 누우며 편하다고 하는 엄마에게 미안하다. 병실의 밤은 편할 수 없다. 심전도와 혈압 체크, 채혈 등으로 늘 어수선한 병실에서 8년째 잠드는 엄마를 보는 것은 그래서 미안하고 불편하다.

"엄마한테 잘해야 해요. 엄마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엄마는 내가 엄마라는데 저한테는 엄마가 저예요.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언제까지 미안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착한 딸이 아니에요. 속만 썩이는…."

"삼성,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다"

혜경 씨가 그림자 엄마를 멀리하는 순간이 있다. 삼성 얘기를 할 때다. 엄마가 속상해 하는 것이 싫어 다른 데 가 있으라고 한다. 엄마가 가지 않으면 입을 잘 열지 않는다. 그녀가 서투른 말투로 말을 시작한다. 느리지만 얼굴과 목소리에는 독기가 서렸다.

"내 삶이 엉망이 됐어요. 이건 너무하지 않아요? 이게 다 삼성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열받아요. 마음앓이 많이 했어요. 주먹으로 때려주고 싶어요. 돌릴 수만 있으면 돌리고 싶어요. 하! 내 인생 돌려내."

삼성은 3년 전 합의를 종용했다. 엄마는 너무 힘이 들어 합의에 응할까 생각도 했다. 그러나 딸이 반대했다. 딸만큼이나 제정신일 수 없었던 엄마는 딸의 뺨을 네 대나 때렸다. 엄마가 이렇게 힘든데 언제까지 승산 없는 싸움을 하자는 것이냐고 엄마는 울분을 토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삼성의 합의 제안은 산재 신청 기한을 넘기게 하려는 꼼수였다. 제대로 보상할 계획도 없었다. 그걸 알고 항의하자 그쪽에서도 시인한 일이다.

엄마와 딸, 꿈이 남아 있을까?

8년간의 투병은 모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다. 아직도 투병은 끝나지 않았고 더디게 진행 중인 소송에서 무엇을 더 빼앗길지 알 수 없다. 어떤 희망도 꿈도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모녀는 삶의 계획을 세우고 작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엄마의 바람은 분명했다. 어떻게든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 딸이 혼자서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보행기를 잡고 혼자 걷고 밥을 떠먹을 수 있으면 더는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는 2년쯤 뒤엔 그렇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의외였지만 혜경 씨도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다.

"엄마 발을 주무르고 있으면 엄마가 시원하대요. 안마사 하고 싶어요. 아픈 사람 시원하게 해 주고 싶어요. 풍 걸린 사람도 고쳐주고…. 그런데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혜경 씨도 스스로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하면 되지. 왜 못해"라는 말로 딸의 희망을 홀로 긍정했다.

모녀의 하루가 저물었다. 춘천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 기차 안에서 창 밖은 암흑뿐이었다. 하지만 창밖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기차는 새벽이 오고 해가 떠오르면 서서히 밝아지는 아침을 달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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