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을 떠난 코리아익스프레스호는 섬에 가까워지자 풍랑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두에 정박하자마자 "내일 배가 없다"는 말을 들어야 할 만큼 어느새 기상은 악화돼 있었다. 오후 4시경 선착장에 도착한 배에서는 다음 날 추모행사에 때맞춰 들어온 수많은 취재진이 하선했다. 군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노병들도 무리지어 내렸다. 이날 밤 섬의 숙소는 외지인들로 모두 만실이었다. 포격 1년을 하루 앞둔 22일 1년 만에 다시 연평도를 찾았다.
돌아온 주민들, 다시 시작한 섬 생활
1년 사이 섬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포격 현장부터 가봤다. 5채의 집이 완파돼 뉴스 중계가 단골로 진행되던 중앙로의 폐허에는 새집이 지어지고 있었다. 도로에 떨어진 포탄 자국도 새로 포장돼 있었다. 복구가 한창인 마을에선 포격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마을 운동장 담에 선명했던 포탄의 흔적이 그대로 있었고, 마을 한편에 포격으로 불탄 집이 천막 안에 보존돼 있는 정도였다.
포격의 흔적이 희미해졌듯 섬을 떠났던 주민들도 대부분 마을로 되돌아왔다. 당시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주민들을 괴롭혔지만 섬 아닌 다른 곳을 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경근(86) 할머니 역시 인천에서 찜질방 생활을 하다 섬으로 돌아왔다. 1년 전, 포탄이 집 바로 앞 도로에 떨어졌을 때 할머니는 그 앞에서 시래기를 다듬고 있었다. 포탄의 충격으로 집 유리창은 모두 깨져버렸다. 크게 놀라 피난을 떠났다. 하지만 육지 생활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찜질방에서 한 달 이상을 지내기도 했다. 섬으로 돌아왔지만 지금도 어디서 '쿵' 하는 소리만 들려도 가슴을 쓸어내린다.
연평도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는 황해도로 시집을 갔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다시 연평도로 피난을 와서 지금까지 살았다. 이 섬은 그녀의 고향이자 유일한 생활 터전이었다. "그래도 여기 말고 어디 가서 사느냐"는 할머니의 말은 섬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대부분의 주민들의 속사정과 다르지 않았다. 섬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힘들었지만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다.
생계 대책 없는 보상, 주민 불만 팽배
보상에 대해 주민들의 불만은 컸다. 포격 이후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지만 정부가 내놓은 대책 중 생계에 보탬이 되는 보상은 없었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었다. 한 주민은 "인천에서 택시를 타면 백이면 백 연평도 사람들 보상받고 부자 된 줄 안다"며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정부는 완파된 집을 새로 지어주고 부분적으로 파손된 집을 보수해주었다. 연평초등학교 운동장에 임시주거시설을 마련해 집을 잃은 주민들이 지내도록 했다. 그런데 주거 신축과 건물보수는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됐고, 이에 해당하지 않는 다른 주민들이 정부로 받은 보상은 없었다. 국민들이 모아 준 성금이 배분됐지만 1인당 150만원이 전부였다.
뭍으로 피난 나간 수개월 동안 일하지 못해 생긴 손해에 대해 주민들은 대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섬에서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는 주민 김영식(61)씨는 "우리는 정신적 피해보상까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3개월여 동안 고기잡이, 꽃게 잡이 못한 것이라도 보상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연평도의 꽃게잡이는 포격으로 중단됐고, 이 틈을 노린 중국 어선이 경계를 넘나들며 조업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부아가 치민다.
"차라리 김정일이 또 (포를) 쏴서 주민들이 죽어나가야 (정부가) 정신차릴 것"이라는 한 주민의 말은 흉흉한 주민들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했다. 북의 포격으로 군인과 민간인이 죽고 섬 사람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정부의 대처는 주거대책 말고는 거의 없었다는 볼멘소리다. 주민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는 대통령이 섬을 찾아주지 않은 데 대한 서운함이 나오기도 했고, 병원 하나 없는 섬 생활의 고충과 유류세를 낮춰주지 않은데 대한 오래된 불만까지 등장했다. 1년 동안의 평탄하지 못했던 생활이 정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혐오로 번져 있었다.
군사 요새화하는 섬, 주민들 생활은 위축
반면, 눈에 띄게 개선된 것이 있다면 급증한 군병력이었다. 1년 동안 서북 5도의 주둔 장병은 1000여명이 늘었다. 다연장포와 대포병레이더, 중무장한 공격헬기와 관측장비가 배치됐고, K-9 자주포 부대도 2배 이상 증강됐다. 이를 위해 1000억원대의 국방비가 투입됐다.
병력의 증강은 주민들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았다. 해병대 출신으로 피난가지 않고 섬에 남았던 한 할아버지는 지난 1년 동안 달라진 생활을 묻자 "농사를 그만뒀다"는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4000평 되는 땅에 농사 짓고 살았는데 군부대서 포진지 짓는다고 해서 제값 못받고 팔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1년 전 포격 당시를 회상하며 짓던 표정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나라에서 달라니 줘야지 어떡하냐"는 말 뒤에는 "나라 위한 일이니 후회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따라 붙었지만 얼굴에는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했다.
김영식 씨의 얘기도 이와 통하는 데가 있었다. "산에 올라가도 그렇고 섬에서 군인들이 통제하는 곳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군은 "기자들이 많이 와서 통제하는 것"이라고 했다지만 기자도 아닌 주민으로서 통제당한 김 씨의 해석은 달랐다. 군병력이 확장되고 주민은 협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주민의 입지가 더 좁아질 수 있다는 걱정이었다. 그는 "연평도는 점점 군사시설이 돼 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주민 마을 헤아리지 못한 추모행사
23일. 옹진군이 마련한 1주기 추모 행사는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주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경건한 추모의 시간을 보내야 할 때 요란한 잔칫상을 차렸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추운 날씨 속에 주민, 학생, 장병 약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연평종합운동장에서 안보결의대회가 열렸다. 백여명도 안 된 일반 주민 대부분은 노인들이었다. 60대 이상 노인들이 많았던 이유는 이들이 농어촌 취로사업의 하나인 희망근로를 하고 있었기 때문. 이날 행사에 온 노인들은 일당 3만 5000원을 받고 동원된 셈이었다.
주목할 점은 젊은 주민들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민들의 이번 행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익명의 한 주민은 "경건하게 추모해야 할 날을 잔칫날로 바꿔버렸다"고 꼬집었고, 또 다른 주민도 "보상도 제대로 못 받는데 이런 이벤트만 벌인다고 뭐가 달라지느냐"고 말했다. "처음엔 다 해줄 것처럼 말하더니 점점 관심이 식더라"는 서운함도 내비쳤다.
일부 주민은 23일에 맞춰 정부 규탄대회를 열자는 논의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상 문제로 주민들 사이에 불만이 많았던 것이 배경이다. 하지만 여러 주민이 큰 행사가 있는 날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해 규탄대회는 없던 일이 됐다.
차가운 바람에 일당을 받기 위해 참석한 노인들에게 낚시대로 선물을 건져올리게 한 이벤트는 보기에도 안타까운 풍경이었다. 노인들은 추운 날씨에 장시간 줄을 서 있어야 했고, 갖고 싶은 선물을 받겠다는 노인과 주는 대로 선물을 받아가라는 주최측의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행사 중에는 학생과 주민들이 오재미를 던져 박터뜨리기를 하는 순서도 있었다.
학생 웅변과 주민 결의대회 역시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가 '평화의 선율'이라는 제목의 웅변을 했는데 '불바다', '끓어오르는 분노' 등 어린이에게 적합해 보이지 않는 표현이 등장했다. 또한 과도하게 격앙된 어조의 웅변은 지켜보는 사람들에게서 실소를 자아냈다. 주민 결의대회 역시 남녀 주민이 번갈아가며 웅변조의 결의문을 낭독하는 식이었다. 이 지역에서 17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한광원 전 의원은 '미래로 가야할 시점에 60년대에나 있을 법한 풍경이 지금 연출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악화된 날씨만큼 섬은 어두웠다. 풍랑에 배가 흔들리듯 연평도는 밖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일상을 되찾는 것은 전적으로 주민 스스로의 몫이었다. 포격 1년, 연평도에서 희망만을 얘기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이 섬에는 1년 전과는 다른 또 다른 상처가 내려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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