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지인들이 언제 이곳으로 이동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월지인이 남긴 하서지역의 사정문화(沙井文化)는 북방초원문화의 특징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짐승의 모양을 칼자루에 조각하는 수법은 알타이식 청동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이 사용한 언어를 보면 보다 이들의 실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들이 쿠샨제국 시기에 사용한 언어인 토하라문을 분석해보면 인도-유럽어의 동 이란 계통의 사람들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이들은 백인이었다. 아주 오래전 북방의 초원지대에서 유목을 하던 스키타이의 일족이었던 이들이 어떤 시기 어떤 이유로 인해 중원에서 가까운 하서 회랑 지역으로 이주를 한 것이다.
이들을 중원 사람들이 인지한 시기는 이르면 서주에서 동주시대(기원전 800년경)이다. 이후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교류가 시작되는데 그 중요한 물품이 옥이었다. 현 신강위구르자치구의 호탄에서 생산되는 연옥은 은나라시기부터 무척이나 귀하게 여기던 보석으로 '화씨의 벽' 역시 이곳에서 생산된 최고의 연옥으로 꼽고 있다. 바로 이 호탄의 연옥을 중원과 거래하던 이들이 하서회랑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월지인들이었다. 실크로드의 루트는 가장 원시적으로 청동기가 그리고 옥이 나중에는 비단이 주요물품으로 오갔던 길이다. 이중 두 번째 '옥의 길'을 경영했던 것이 바로 유목 기마민족이자 상인이었던 월지인들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200년 경의 기록을 남긴 <사기> '흉노열전'에는 "동호가 강하고 월지가 흥했다"는 기록을 남겨 중원과 패권을 다투는 세력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이후 북방을 장악하는 흉노가 있었는데 선우(왕) 묵특이 태자시절 인질로 월지에 잡혀 있을 정도로 월지의 힘이 강했다. 하지만 묵특선우가 동호를 격파하고 월지를 쳐서 서쪽으로 몰아낸다. 이후 노상선우 때(기원전 140~135년 사이) 월지의 왕을 잡아 죽이고 그의 머리뼈로 술잔을 만드는 사건이 벌어진다. 월지인들은 흉노에게 원한을 품고 다시 더 먼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때 서쪽으로 달아난 이들을 '대월지'라 하고 감숙 지역에 남은 이들을 '소월지'라 했다. 이후 중국의 북방은 흉노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과연 둘로 분리된 월지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흉노의 압박에 견디다 못한 한무제는 대월지를 찾아 대담무쌍한 하급관리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게 된다. (계속)
사진가,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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