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에 나고야로 끌려간 소녀가 여든이 되어 국회 방청석에 앉았다.
눈 앞에는 국회 대정부질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질의를 시작한 한 의원이 국무총리와 외교통상부 장관을 번갈아 불러 세웠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눈을 감고 조용히 질의를 들었다.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답변은 대체로 이랬다.
'맞는 말씀이다', '정부로서 안타깝게 생각한다', '미진했던 점 인정한다', '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지만 노력해 보겠다', '의원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한다', '검토해보겠다'......
해방이 되고 한국에 돌아온 지 65년이 지났다. 할머니의 눈 앞에 살아온 세월이 스쳐지나갔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은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의 젊은 여성들을 일본으로 끌고갔다. 김정주(80) 할머니도 1945년 2월에 일본 도야마현으로 가는 배를 탔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아버지는 징용으로 끌려가고 언니도 근로정신대에 끌려간 마당에 언니를 만나게 해주고 학교까지 보내주겠다는 일본인 선생님의 말은 솔깃했다.
열네살 소녀는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일했다. 키가 작아 나무상자를 밟고 올라서야 일을 할 수 있었을 만큼 어렸지만 열악한 생활환경은 남들과 똑같이 감당해야 했다. 철조망 속에서 일하고, 12시가 되면 식빵 하나를 먹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배가 고파 풀을 뜯어 먹기도 했다. 어딜 가든 감시를 받았고, 화장실에서 늦게 나왔다고 맞아도 하소연 할 데가 없었다. 월급은 손에 쥐어본 적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부쳐주겠다고만 했다.
그해 8월 해방이 됐다. 회사는 패전과 해방을 말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10월이 되어서야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당장 꼼짝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디로 가는지도 말해주지 않고 회사는 이들을 배에 태워 한국 땅에 내려놓고 가버렸다.
한국에서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를 구분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이력을 숨기고 살던 할머니는 뒤늦게 알게 된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다. 혼자 아들을 키우며 안 해본 일 없이 살아온 할머니는 "위안부가 뭐야? 할머니 위안부야?"라고 묻는 손자를 키우며 또 그렇게 살았다.
우체국으로 보내준다던 월급은 받지 못했다. 뒤늦은 청구에 일본 후생노동성은 후생연금 탈퇴수당으로 99엔(1300원)을 당시 금액 그대로 지급했다. 일본에 끌려가 일하고 받은 댓가의 전부다.
질의가 끝났다. 이정도면 됐다. 크게 기대하고 오진 않았다. 근로정신대가 뭔지만 알아줘도 좋겠다. 집으로 간다. 몸 불편한 아들과 어렵게 받기 시작한 정부 보조금으로 간신히 유지하는 나의 셋방으로 간다. 할머니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 11월 2일 외교분야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민주당 이용섭 의원은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지원을 위해 '포스코' 등 청구권 자금 수혜기업과 일본정부, 전범기업들이 참여하는 재단을 설립할 것 등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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