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조선학교 철거 위기 취재를 위한 일본 도쿄 출장 때였다. 재일동포 학부모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데 한 학부모와 친분이 있는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합석하게 됐다. 그들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일본 민주당 당원들이어서 그런지 꽤 사교성이 넘쳤다. 특히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술이 몇 잔 돌아가면서 몇 마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통역을 하던 학부모가 통역하기 곤란하다는 듯 갑자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부담 갖지 말고 사실대로 얘기해달라’고 했더니, 그 학부모 왈 “왜 한국에서는 다케시마(독도)가 자기들 땅이라고 우기느냐고 묻는데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일본 민주당은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200리~"를 노래하듯 독도에 관해 얘기를 하는데, 통역을 하던 학부모가 설명해준 분위기에 따르면 그 일본인은 정작 독도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고 한 소리란다. 한국에서 온 사람이 있다는데, 한국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고 그냥 떠오른 게 ‘다케시마’였다는 게다.
그런데 그 자리에 ‘지한파’도 있었다. 나이가 예순은 넘어 보이는 그는 “한국의 역동성이 아주 부럽다”고 했다. 특히 한국의 민주화와 시민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은 자민당이 사실상 독재를 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이를 바꿔봐야 하겠다는 생각도 잘 하지 않고 작은 생활 속에의 일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식의 푸념이 이어졌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관심도 보였다.
그런데 대화 중에 “한국은 왜 반미를 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군사적으로 미국의 보호 하에 있고, 경제적으로도 미국의 지원에 의해 현재와 같은 성장을 이뤘는데 미국을 배척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 국민 모두가 반미인 것도 아니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정서가 아니라고 설명했으나, 술자리인지라 더 깊은 토론을 할 수는 없었다.
훗날 한 재일 사학자에게서 그 일본인의 ‘반미’ 질문 배경을 들을 수 있었다. 일본인들에게는 미국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의 적국이었지만 당시 미국이 일본보다 힘이 센 것이 현실이었기에 패배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미국을 배우고 따라 잡아야겠다’는 경쟁심이 생겼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그래도 미국이 일본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감사의 정서가 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 후 소련의 남하를 미국이 막고, 전후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냉전 시대에도 미국의 울타리가 있었기에 ‘무장해제’ 돼 있던 일본이 지금과 같은 경제 성장을 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적국’ 대목만 빼면 우리나라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배경이다. 일본에서도 주둔 미군의 범죄에 사회 여론이 악화되기도 하고 환경 피해가 이슈로 떠오르기도 한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일본인들은 ‘나에게만 피해가 없고,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상관없잖아’라는 정서가 있어 ‘반미’, ‘친미’ 등의 이슈가 전국화 되지 않을 뿐이라고 한다. 그는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한국은 왜 반미를 하느냐’고 물어요? 신기한 사람이네요. 그 사람은 아마 한국에서 체류를 했었거나, 아니면 의식적으로 한국에 대한 공부를 한 것으로 보여요. 드라마나 음악 같은 한류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은 한국, 더 넓게는 아시아에 관심 자체가 없거든요.”
그런데 요즘 일본 내 분위기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아시아, 특히 동북아 정세에 일본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배경은 중국의 부상이다.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미국 갤럽이 지난달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중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일본인들이 88%에 달했다. 반면 ‘중국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5%에 그쳤다. 일본인들은 ‘군사적 위협이 되는 국가’에 대해서도 중국(78%)을 가장 많이 꼽았다. 북한(74%)보다 높은 수치이다. 2011년까지는 중국과 북한이 역전됐다.
그런데 덩달아 한국에 대한 감정도 나빠지고 있다. ‘한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일본인이 72%로 ‘한국을 신뢰한다’는 응답(16%)의 4.5배에 이른다. 한국을 군사적 위협 국가로 꼽은 비율도 45%에 달했다. 2006년에는 한국을 군사적 위협국으로 꼽은 비율이 20%였으니 8년 사이 2배가 넘었고, 그 사이 러시아(40%)도 추월했다.
이런 의식 변화에는 아베 정권의 우경화 정책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한국과 끊임없이 영토 갈등을 일으키고 교과서 왜곡 논란을 일으키는 사이 적잖은 일본인들의 ‘팔은 안으로 굽고’ 있는 것이다.
높아지는 동북아의 긴장도는 일본 내 친미 성향의 강화로 나타나고 있다. ‘미일 관계가 좋다’는 응답이 55%로 조사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갑오경장’ 얘기를 꺼낸 것을 두고, 민주당에서는 “1894년에는 동학혁명도 있었다”며 ‘민중들의 봉기’를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변화도 1894년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동북아 외교를 반일 감정에 기댄 채 국내 정치용으로만 접근한다면 역사의 비극은 반복될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벌써 많은 일본인들이 “일본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고 수군거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에 필요 이상의 강경한 자세를 보이거나 적어도 일본과 ‘엮이지 않으려’ 할 가능성이 높다. 부디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 아니라 ‘신갑오경장’ 시대의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점을 유념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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