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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들은 오늘도 '철탑괴물'과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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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들은 오늘도 '철탑괴물'과 싸운다

[언론네트워크] 송전탑영화제, 밀양·청도 주민 다룬 다큐 <밀양전><송전탑> 상영

"분하다. 우리가 뭐 그리 큰 잘못 했다고 이러노. 돈을 달라카나, 먹을 걸 달라카나. 그냥 우리 동네에 조용히 살고 싶다는데 뭐가 그리 잘못됐노. 너거들 같으면 너거 할매 할배 집에 철탑괴물 들어선다카면 가만있겠나 이 말이다. 이 세상이 싫다. 너무 더럽다. 정말 나쁘다. 이러고 있는 내도 싫다"

경남 밀양시 부북면 평밭마을 주민 정임출(73) 할머니는 울음을 터뜨렸다. 산에 주저앉아 온 몸으로 울부짖었다. 사투리 섞인 투박한 목소리가 삶을 비관했다. 한여름 산중턱에서 며칠째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고, 노끈으로 목을 매려다 용역업체 직원에게 제지당해 그대로 땅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송전탑 공사를 막으려 했지만 경찰에 가로막혀 공사장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허탈해진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할머니는 산 구석진 곳으로 가 조용히 산을 바라본다.

모자를 벗은 얼굴은 시커멓게 탄 자국과 주름으로 가득하다. 눈앞에는 송전탑 공사를 하기 위해 잘려나간 아름드리나무들 밑동이 듬성듬성 자랐다. 그 옆 노송에는 전기톱 자국이 적나라하다. 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억억거리며 우는 소리에 같은 마을 주민 곽정섭(68) 할머니가 뛰쳐나왔다. 할머니들은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언니야 울지 마라. 왜 우노. 내도 눈물 난다. 울지 마라. 뭐 잘못 했노. 저 놈들이 나쁜 기라" 두 할머니는 경찰병력을 세워놓고 목청 놓아 눈물을 흘렸다.

송접탑 공사를 막고 있는 밀양 할머니의 모습. (다큐멘터리 영화 <밀양전> 스틸컷)

지난 9년 동안 송전탑 공사 반대 싸움을 이어온 밀양 할머니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밀양전>이 20일 대구 송전탑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영화는 밭과 논에서 농사를 짓는 할머니들의 모습과 카메라 앞에서 수줍게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동네에 765kV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할머니들은 그때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한 '싸움꾼'이 됐다. 밭일은 미뤄두고 매일 산을 탔다.

수 십 년 동안 왔다 갔다 했던 산 여기저기에 움막을 치고 생필품을 옮겼다. 경찰과 한국전력공사 직원들이 산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화장실에서 똥물을 퍼와 플라스틱 병에 옮겨 담기도 했다. 장비를 실어 나르지 못하도록 공사장에 세워진 굴착기에 밧줄을 묶고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한나절 싸움 끝에 줄이 끊어지자 다음번에는 쇠사슬을 들고 왔다. 어떻게 하면 떨어지지 않을까 밤새도록 작전을 짜고 심심하면 촛불아래 고스톱을 쳤다. 점수가 나면 콧노래를 부르고 '먹을 게 없어' 앓는 소리도 냈다.

울고 웃는 밤낮이 계속되고 계절도 몇 번이나 바뀌었다. 할머니들의 싸움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평밭마을 한옥순(66) 할머니는 "엄마는 강하거든. 근데 할매는 더 강한기라. 엄마가 나이 들어 되는 게 할매니 당연하재. 지금 싸워야한다. 우리 대에 싸움을 끝내야 자식들이 편한 기라. 그래야 다음 세대에도 우리 싸움을 물려주지 않는 기라. 할매들은 다 그 맘 밖에 없다"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다 죽이고 공사해라' 피켓을 든 밀양 할머니들. (다큐멘터리 영화 <밀양전> 스틸컷)

<밀양전>에 앞서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는 경북 청도군 각북면 삼평1리 주민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송전탑>도 상영됐다. 60대 이상 45가구가 사는 평범한 산골마을. 주민들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논농사와 밭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2006년 한전이 부산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전기를 대도시로 송전하는 345kV 송전탑 공사 계획을 발표하면서 일상은 달라졌다.

당시 한전은 삼평1리 주민 10여명에게만 의견을 수렴했다. 이 과정에서 마을 이장과 면장, 면·읍사무소와 군청 담당자들도 이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정두세(92), 이차연(77), 김춘화(64) 할머니, 쌍둥이 부모 빈기수(50)씨와 이언주(47)씨 등 일부 주민의 공사 반대 싸움이 시작됐다. 할머니들은 괭이와 호미 대신 지팡이를 짚고 새벽 5시부터 공사가 시작된 마을 뒷산에 올라 농성을 벌였다.

이차연 할머니는 자신보다 2, 3배 큰 용역직원과 경찰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내 산 동안 공사는 안 된다"고 소리쳤다. 거친 욕설과 고성이 난무하는 곳에서 할머니들은 자리를 잡고 앉아 물러날 줄 모른다. 아흔이 넘은 정두세 할머니는 포클레인이 지나가는 길에 깔아 놓은 자루를 걷어버리고 "남의 동네에 허락도 안 받고 이라믄 안 돼. 도둑이 들어오는데 가만히 있는 집주인이 어데 있노"라며 성을 낸다.

영화제에 참석한 이동렬, 박배일 감독과 청도와 밀양 주민들. ⓒ평화뉴스(김영화)

이날 영화제에는 시민 100여 명이 참석했다. ⓒ평화뉴스(김영화)

'밀양희망버스 대구기획단'과 '청도 345kV 송전탑 반대 공동대책위원회'는 20일 저녁 대구영상미디어센터 6층 씨눈에서 '우리는 전기로 잇고 이어져-밀양의 756㎸ 송전탑, 청도의 345㎸ 송전탑, 그리고 전력소비 대구'를 주제로 '대구송전탑영화제'를 열었다. 1부에서는 경북 청도군 삼평리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은 <송전탑>(감독 이동렬)을, 2부에서는 밀양 할머니들을 기록한 <밀양전>(감독 박배일·75분)을 선보였다. 영화제에는 두 작품의 감독과 청도와 밀양 할머니들 등 시민 100여 명이 참석했다.

영화 상영 후에는 이동렬, 박배일 감독과 청도, 밀양 주민들과 함께하는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이동렬 감독은 "1년 넘게 청도에서 생활하면서 할머니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며 "사투리 때문에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아 고생도 했지만 도시 사람들이 사용할 전기를 위해 시골 할머니들이 사투를 벌이는 현장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이 시골 할머니들은 돈이나 명예가 아닌 삶의 터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 싸움을 하고 있다. 도시에 사는 우리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배일 감독은 "밀양은 언론에 많이 노출돼 있지만 현장을 찾은 기자들은 그들이 그리고 싶은 방식으로만 취재를 해왔다"면서 "그래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놀면서 영상을 찍었다. 다 찍고나서 작품을 보니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고 했다. 이어, "송전탑 반대 싸움을 벌이고 있는 밀양 4개면 마을 주민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다룬 <밀양전> 2편 <밀양 아리랑>도 제작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밀양희망버스 대구기획단'은 오는 25~26일 밀양에서 '제2차 희망버스'를 진행할 예정이다.

평화뉴스=프레시안 교류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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