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9000만 원이니 1억 원이니 하는 급여는 사실 근무 경력이 25년 이상이 되어야 가능하고 퇴직을 얼마 남기지 않는 분들이나 받는다. (…) 물론 경비직으로서는 많은 급여인 것이 확실하지만 평생 경비직을 업(業)으로 살아온 사람들이고, 1970~80년대 입사해 지금까지 일해 온 몸값이라 치면, 좀 많긴 하지만 그보다 조금 낮은 임금 정도는 받아야 한다."
놀랍게도 이런 글을 올린 그 경비원은 1억 원에 달하는 고액 연봉을 받는 '정규직' 경비원이 아니라 2500~3000만 원의 연봉을 받는 '파견직' 경비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론의 여론몰이에 대다수 누리꾼이 한국은행 경비원을 향해서 맹비난을 퍼부을 때,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이 한국은행 경비원의 글을 갑자기 떠올린 것은 지난 주말 발표한 공기업 복지 혜택 축소 뉴스를 보고서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정상의 정상화" 주문에 화답하듯이 나온 이 공기업 복지 혜택 축소 뉴스를 접한 많은 시민은 '신의 직장' 혹은 '철밥통'이 된서리를 맞는 것을 보면서 후련해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게 정말 후련해할 일인가?
바닥으로의 경주
공기업이나 대기업 노동자가 중소기업에 몸담고 있는 대다수 서민에 비해서 훨씬 좋은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공기업은 국고로 운영되는 기관이니, 없는 형편에 십시일반 세금을 내는 대다수 서민의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만도 하다. 하지만 그런 분노가 향해야 할 과녁이 공기업 노동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공기업 복지 혜택 축소로 당장은 속 시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아버지, 어머니 혹은 아들딸의 목을 옥죄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공기업이나 대기업의 복지 혜택 축소는 곧바로 한국 사회 전체 노동 복지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기업의 노동자 복지 혜택은 암묵적으로 한국 사회의 공적 역할 모델로 기능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복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저 정도 수준이라는 식의 공적 합의 말이다. 하지만 그런 공적 역할 모델이 없어지면, 고작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대기업 '회장님'의 선의에 기댄 복지뿐이다.
물론, 그 결과는 '바닥으로의 경주'다. 위에서 언급한 한국은행이 그 한 예이다. 애초 2006년 한국은행의 정규직(청원경찰)과 파견직(특수경비원)의 비율은 4대6 정도였으나, 그 비율은 3대7 정도로 높아졌다. 그나마 보안이 엄격해야 할 한국은행의 특성상 경비 업무를 외부 용역업체에 100% 아웃소싱 하는 게 불가능하기에 이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해야 일은 공기업 복지 혜택을 축소하는 일이 아니라, 가능하면 많은 노동자가 그 혜택을 볼 수 있도록 노동 복지를 상향평준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공기업, 대기업, 중소기업 등 기업별로 나뉘어 있는 현재의 기업 복지 체제에서 가능할 리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헌신짝처럼 저버린 '복지 국가'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비원이 1억 원을 받으면 안 되나?
기왕에 얘기가 나왔으니, 공공 기관 노동자의 임금 얘기도 해보자. 얼마 전 철도 파업 때 "코레일 노동자 특히 파업을 주도하는 기관사의 연봉이 8600만 원"이라는 보수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가 화제가 되었다. 2006년에 한국은행 경비원이 받던 1억 원 연봉을 문제 삼은 것과 똑같은 논리다.
다시 살펴보니, 코레일 노동자의 평균 연봉은 약 6300만 원. 그나마 평균 근속 19년 정도 되어야 이 정도를 받는단다. 한 직장에서 20년을 바쳐서 일했는데 약 6000만 원 정도의 연봉을 받는 것이 그렇게 과한가? 오히려 한 직장에서 20년을 바쳐서 일했는데 연봉이 왜 그것밖에 안 되느냐고 되묻는 것이 맞는 일 아닐까?
노동의 가치는 그 사회 구성원의 합의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연봉 1억 원을 받는 것은 정당한가? 연예인이나 스포츠맨의 몸값이 수십억, 수백억 원이 되는 건 왜 당연한가? 또 대기업의 임원이 연봉 수십억 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는 왜 분노하기는커녕 부러워하는가?
코레일 노동자가 또 한국은행 경비원이 20년, 30년 성실하게 일해서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1억 원의 연봉을 받는 것을 놓고서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정작 우리의 평범한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이 여의도의 '증권맨'이나 대기업의 임원이 될 가능성은 지극히 적으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비정상의 정상화"를 그토록 외치는 박근혜 정부 역시 '낙하산'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명박 정부를 비롯한 이전 정부가 그랬듯이, 이 정부가 끝나면 박 대통령이 꽂은 많은 낙하산 사장, 임원들의 온갖 비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밝혀질 것이다. 이런 낙하산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비정상의 정상화" 아닌가?
하긴, 아버지가 대통령을 18년간 해먹었다고 평생 '대통령'만 꿈꾸며 호의호식할 수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삶이야말로 '비정상'의 상징 아닌가? 코레일과 같은 공기업 노동자의 고액 연봉을 질타하는 박 대통령에게 한 번 물어보자. 평생 자기 손으로 일해서 단 1원이라도 벌어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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