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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읍 이웃의 변방, 강화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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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도읍 이웃의 변방, 강화고을

2월의 고을학교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새해 2월 유람(제5강)으로, 도읍(都邑)과 가까웠던 변방(邊方) <강화(江華)고을>로 떠납니다. 2014년 2월 8일(토요일) 당일로 진행합니다. 강화(江華)라는 지명은 강(江)과 연관된 것으로, 한강(漢江) 임진강(臨津江) 예성강(禮成江)이 한데 어우러져 서해로 흘러드는 '강들이 만나는 아래 고을'로서 '강하(江下)'라 부르다가 '강 아래 아름다운 고을'이란 뜻인 '강화(江華)'로 바꿔 부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월곶돈대와 연미정 Ⓒ고을학교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5강 답사지인 강화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강화(江華)라는 지명은 강(江)과 연관된 것으로, 강원도 금강산(金剛山) 부근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의 대덕산(大德山)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양수리에서 하나로 합쳐져 514㎞ 흘러온 한강(漢江), 함경남도 마식령(馬息嶺)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를 거치며 254㎞ 흘러온 임진강(臨津江), 황해도 수안군 언진산(彦眞山)에서 발원하여 황해도 동부지역을 남쪽으로 187.4km 흘러온 예성강(禮成江)이 한데 어우러져 서해로 흘러드는 '강들이 만나는 아래 고을'로서 '강하(江下)'라 부르다가 '강 아래 아름다운 고을'이란 뜻으로 '강화(江華)'로 바꿔 부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여러 강들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서해바다와 만나는 강화도 북쪽 해역을 '강의 으뜸자리'라 하여 조강(祖江)이라고도 부릅니다.

강화도의 산줄기는 섬의 중앙을 북에서 남으로 이어져 봉천산(奉天山), 별립산(別立山), 고려산(高麗山), 혈구산(穴口山), 진강산(鎭江山), 마리산(摩利山)의 여섯 봉우리를 일구고, 물줄기는 여섯 봉우리에서 발원하여 저지대인 바닷가를 향해 동서남북 사방으로 흘러가 바다로 숨어듭니다.

봉천산은 강화도 최북단에 위치하며 정상에는 고려시대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조선시대에는 봉화를 밝혔던 봉천대가 복원되어 있고, 산 아래는 고려시대의 5층석탑, 석조여래입상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이 남아 있습니다.

별립산은 강화도의 다른 산들과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가장 북쪽에 있는 봉천산 서쪽에서 교동도를 바라보며 따로 떨어져 있다고 별립산이라고 부르며 산의 형상이 바위가 많고 호랑이가 앉아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준호산(竣虎山)이라는 별칭도 있습니다.

고려산은 강화의 진산(鎭山)이며 고려의 정기를 품고 있는 산으로, 전설에 의하면 고려산 주위에 연못의 연꽃이 떨어진 다섯 곳에 청련사(靑蓮寺), 백련사(白蓮寺), 황련사(黃蓮寺), 홍련사(紅蓮寺), 흑련사(黑蓮寺) 등 오련사(五蓮寺)를 지었고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서려 있으며 고구려 토성과 고인돌 군락지가 남아 있습니다.

혈구산은 고려산과 더불어 고려의 정기를 품은 산으로 여신(女神)의 성격을 지녔고, 예로부터 용이 나고 국가의 재난을 알리는 곳으로 마리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곳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고비고개를 사이에 두고 고려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진강산은 조선시대 진강현의 진산(鎭山)으로 산등성이가 낙타등과 같이 생겼으며 정상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어 동쪽으로 대포산에, 서쪽으로 망산에 응하였고 산기슭에는 고려 후기 왕과 왕비의 묘 3기가 품에 안겨 있습니다.

▲조강. 강 건너 북한 산천이 지척이다. Ⓒ고을학교

마리산은 강화도 남서쪽 끝에 있으며 이곳은 한라산과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같은 한반도의 중앙지점이고 정상에는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천의식을 봉행한 참성단(塹星壇)이 있으며 각종 체전 때마다 성화를 채화하는 민족의 영산으로, 동쪽 기슭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지은 정수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강화도의 서쪽에 있는 석모도에는 해명산(海明山)이 낙가산과 상봉산을 거느리고 우뚝 솟아있고 그 기슭에는 관음기도 도량인 보문사가 있으며, 북서쪽으로 교동도에는 진산(鎭山)인 화개산(華蓋山)이 중앙에 우뚝 서 있고 산 정상에는 포곡식(包谷式)으로 축성된 화개산성(華蓋山城)과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봉수대가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강화읍은 고려 전기에는 강화현(江華縣)이었고, 고려 후기 1232년(고종 19) 몽골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후에는 임시 도읍(都邑)이었으며, 1377년(우왕 3) 강화현이 강화부(江華府)로 승격되면서 부치(府治)가 설치되었고, 그래서 조선시대 때는 부내면(府內面)이라 불렀으며 일제 강점기에 강화군의 이름을 따라 강화면으로 개칭되었고 1973년 강화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강화도에는 선사시대와 구석기,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 150여 기가 남아 있으며, 삼국시대에는 불교의 유입으로 전등사(傳燈寺)를 비롯한 전통사찰이 창건되기 시작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고자 강화로 천도함에 따라 강도(江都)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고려궁궐(高麗宮闕)과 강화산성을 세웠고, 국난을 극복하려는 염원을 담아 선원사(禪源寺)에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제작하였으며,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한 왕과 왕비의 무덤인 고려왕릉 4기가 남아 있고, 충렬왕 12년(1286년) 성리학을 이 땅에 들여온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 공자상(孔子像)을 봉안한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인 교동향교(校洞鄕校)도 세워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성(城), 진(鎭), 보(堡), 돈대(墩臺), 포대(砲臺) 등 국방유적이 많이 설치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왕실의 피난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왕실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璿源寶閣)과 실록을 보관하는 장사각(藏史閣)으로 구성된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와 창덕궁 규장각의 도서와 의궤(儀軌)의 일부를 옮겨 보관한 외규장각(外奎章閣)과 행궁(行宮)이 설치되었습니다.

특히 숙종 때에는 12개의 진과 보,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였고, 강화산성과 강화외성을 개축하였습니다. 또한 성리학 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던 양명학(陽明學)을 신봉한 사람들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선생을 중심으로 강화도에 모여들어 소위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풍을 세웠습니다.

개항시기에는 서구 열강세력들과 충돌하는 전쟁터가 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운양호사건(雲揚號事件)을 거치면서 항쟁과 개항의 중심지가 되었고 개항 이후 서양종교의 수용과 함께 근대식 학교의 도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이 설립되기도 하였습니다.

강화의 문화유산은 4가지의 인문학적 주제로 접근하면 알찬 기행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민족의 시원 단군과 관련된 문화유적, 둘째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군, 셋째는 대몽항쟁의 중심인 고려의 임시도읍지로서의 강도(江都), 넷째는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하는 조선에서 이단(異端)인 양명학을 신봉하던 강화학파, 다섯째는 개항시기의 서구열강과의 참혹했던 전투입니다.

강화 마리산(摩利山) 정상에는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봉행하기 위해 쌓은 참성단(塹星壇)이 있는데 그 모양이 아래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天圓] 위는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은[地方],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는 건하곤상(乾下坤上)의 형태인데 이것은 주역(周易)의 64괘 중 봉괘(泰卦)에 해당됩니다.

즉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이 아래에 있고 땅을 상징하는 곤(坤)이 위에 있다는 것은 하늘의 양기(陽氣)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고 땅의 음기(陰氣)는 아래로 내려가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위치가 바뀜으로써 음양의 교합이 조화를 이루어 만사가 형통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단군조선,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에 왕의 명의로 국가에서 제사를 거행하였고 고려 원종과 조선의 태종처럼 국왕이 직접 제사를 주재한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관리가 국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강화도와 관련된 단군에 대한 기록은 <단군세기(檀君世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단군세기>는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암(李嵒)이 1세 단군(서기전 2333)부터 47세 단군(서기전 295)까지의 2,000여 년간의 실록을 엮은 단군의 연대기(年代記)로서, 계연수(桂延壽)의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단기 51년(서기전 2283)에 운사(雲師)와 배달(配達)의 신(神)에게 명하여 혈구(穴口)의 마리산(摩利山)에 천제단인 참성단을, 정족산(鼎足山)에 삼랑산성(三郞山城)을 쌓았고, 단기 54년(서기전 2280)에는 완공된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천(祭天)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단군신앙은 환국(桓國)을 다스린 환인(桓因), 배달국(倍達國)을 다스린 환웅(桓雄), 고조선을 다스린 단군(檀君) 등 삼신(三神)을 숭배하는 고대신앙으로 불교, 유교, 도교 등 외래 종교를 수용하기 이전부터의 고유신앙인데, 수용 이후에도 오래도록 민간신앙으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환국, 배달국시대에는 백두산을 삼신산(三神山)이라 하여 삼신신앙의 제천단인 신단수에서 10월 3일과 3월 16일에 삼신에게 제천하는 세검맞이굿[三神迎鼓祭]을 행하였고, 단군조선시대에는 강화 마리산에 삼신 제천단인 참성단을 축조하고,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서, 3월 16일에는 마리산에서 제천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고구려시대는 싸움터에 나아갈 때마다 광개토대왕이 제천하고, 모든 장졸들이 신가(神歌)인 어아가(於阿歌)를 불렀으며, 장수 을지문덕은 해마다 3월 16일에 제물을 갖추어 경배 드리며 국가의 안녕을 빌었고, 고려시대는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암(李嵒), 밀직사(密直司) 이강(李堈),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왕의 명을 받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는 태종(太宗)이 숙박하면서 제천하였고, 율곡(栗谷) 이이(李珥)도 왕의 특명을 받고 천제를 올렸습니다.

고인돌(dolmen)은 거대한 돌을 이용해 만든 청동기시대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지석묘(支石墓)라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이 수십 톤이 되는 것도 있고 청동기 유물이 함께 묻혀있으며, 이 정도 규모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므로 보여 무덤의 주인공은 아마도 경제력이 뛰어나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자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石室]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는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되는데, 앞에 것은 주로 중부 이북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뒤에 것은 중부 이남지방에 다수가 분포되어 있어, 이들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부릅니다.

고인돌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었고 특히 한반도는 세계 고인돌의 40%에 이르는 4만 기가 넘는 고인돌이 발견되어 '고인돌의 왕국'이라 할 만하며, 그 분포는 호남지방에 2만여 기, 그리고 한반도 다른 지역과 만주지방에 2만여 기가 있습니다. 2000년에는 전남 화순, 전북 고창, 인천 강화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강화도의 고인돌은 고려산 북쪽 산기슭에 있는 하점면 일대의 부근리, 삼거리, 고천리, 오상리, 교산리 등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그 수는 모두 127기로, 군집을 이루기보다는 흩어져 있는 상태이고, 이 가운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은 보존 상태가 양호한 70기입니다.

특히 부근리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은 우리나라 고인돌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고 세련된 조형미까지 갖추고 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인돌로 손꼽힙니다. 탁자식 고인돌의 특징인 주검이 놓이는 돌방[石室]이 땅 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일찌감치 도굴당하거나 훼손되어 부장품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고, 무덤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어느 집단을 상징하는 기념물이거나 제단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고려궁지와 외규장각 Ⓒ고을학교

고려는 몽고의 1차 침입 이후 기마병이 많아 수전(水戰)에 허약한 몽고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하여 거의 2년에 걸쳐 궁궐과 관아를 짓고 이곳에서 약 39년(1232~1270) 동안 몽고에 항쟁하였습니다.

이때 궁궐 건물의 이름을 개성의 궁궐과 똑같이 하여 본궁인 연경궁(延慶宮), 북동쪽 언덕에 강안전(康安殿)과 소동문(小東門), 성마루터 북쪽에 경령궁(景靈宮), 옥림리 자문고개 서쪽에 건덕전(乾德殿), 그 동쪽에 장녕전(長寧殿), 뒤쪽에 만녕전(萬寧殿), 그리고 북창문 밖의 대묘동에 태묘전각(太廟殿閣)인 대관전(大觀殿)과 신격전(神格殿)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었고, 궁궐 뒷산도 송악산(松嶽山)이라 불렀습니다.

1270년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에는 궁궐과 성은 무너져버렸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려 옛 궁터에 장녕전(長寧殿)을 지어 태조(太祖)와 세조(世祖)의 영정을 모셨고 병자호란으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되기도 하였으며 그 이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의 행궁과 외규장각 그리고 유수부(留守府) 건물들이 들어섰으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외규장각에 보관중인 의궤와 지도는 약탈당하고 건물은 소실되어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東軒)과 이방청(吏房廳)만 남아있습니다.

강화산성은 대몽항쟁의 기치를 들고 강화로 천도하여 끝까지 항쟁하고자 궁궐과 관아건물을 지을 때 방어를 위해 내성(內城), 중성(中城), 외성(外城)의 3중 구조로 축조한 성이었지만 몽골과의 강화조약에 따라 고려 원종 11년(1270)에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성을 모두 허물었으며 조선 전기에 내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고 1637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숙종 3년(1677)에 석성으로 다시 쌓았습니다.

내성은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으며 북쪽의 북산(126m), 남쪽의 남산(225.5m), 동쪽의 견자산(見子山, 75m), 서쪽의 북산과 고려산(高麗山, 435.3m)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이용하여 약 1,200m에 걸쳐 흙으로 쌓은 성입니다. 남문인 안파루(晏波樓), 북문인 진송루(鎭松樓), 서문인 첨화루(瞻華樓), 동문인 망한루(望漢樓)가 복원되어 있고, 누각이 없는 비밀문인 암문(暗門) 4개와 성안의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水門)이 2개 남아 있고,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將臺)가 서, 남, 북쪽의 3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북장대(北將臺)와 남장대(南將臺)가 복원되었으며, 몸을 감추기 위해 성 위에 쌓은 담장인 여장(女墻)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고 성곽도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쪽과 북쪽의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중성은 외성을 쌓은 후 내성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1250년에 축조한 것이기 때문에 3개의 성곽 중에서 가장 늦게 쌓은 성입니다. 강화읍 옥림리에서 시작해서 내성의 북쪽을 에워싸는 북산을 지나 남서쪽의 연화동과 남쪽의 남산을 거쳐 찬우물고개, 대문고개 및 창리 뒷산에 이르는, 그 길이가 약 9㎞의 토성으로 성곽에는 8개의 성문을 두었는데 모두 송도(松都)의 이름을 본뜬 것으로 동쪽의 선인문(宣仁門), 서쪽의 선기문(宣祺門), 남쪽의 태안문(泰安門), 북쪽의 북창문(北昌門), 동남쪽의 장패문(長覇門), 서남쪽의 광덕문(光德門), 서북쪽의 선의문(宣義門), 동북쪽의 창희문(彰熙門)이 그것입니다.

외성은 김포반도에서 염하강(鹽河江)을 건너 강화도로 침입하는 몽고군을 방어하기 위해 강화도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강화읍 월문리의 휴암돈에서 남쪽으로 길상면 초지리의 초지진까지 이어지는 11.1km 길이의, 3년(1233-1235)에 걸쳐 쌓은 토성입니다. 방어뿐만 아니라 개경(開京)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39년 동안 각 지방으로부터 각종 보급물자를 지원받던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조선 영조(英祖) 때 7년(1747-1753)간에 걸쳐 석성(石城)으로 다시 쌓았습니다.

강화도는 이렇듯 39년간 고려의 도읍지였기에 곳곳에 왕릉도 남아 있습니다. 고려 왕릉은 수도를 강화에서 개경으로 옮긴 후 폐허로 남아있던 것을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왕명을 받아 21대 희종(熙宗)의 석릉(碩陵), 23대 고종(高宗)의 홍릉(洪陵), 22대 강종(康宗)의 비(妃) 원덕태후(元德太后)의 곤릉(坤陵), 24대 원종(元宗)의 비 순경태후(順敬太后)의 가릉(嘉陵) 등 4기의 능을 확인하고 예를 갖춰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그후 1895년 을미개혁으로 제향이 폐지되어 방치되는 바람에 도굴되어 버려져 왔던 것을 1974년 재정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만 그 규모와 석물들이 왕릉으로서의 위엄을 담아내기에는 초라할 뿐입니다.

▲고려 고종의 홍릉. 왕릉 치고는 너무 초라하다. Ⓒ고을학교

고종은 1259년 6월 개경으로의 천도 전에 강화도에서 생을 마감했기에 능이 강화도에 있는 것은 당연하나 고종보다 2대나 앞선 희종의 능이 강화도에 있는 연유는 희종이 1211년 무신정권의 실세인 최충헌(崔忠獻)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8년 만에 개경에 돌아왔으나 1227년 복위의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에 의해 다시 강화도로 추방되어 10년만인 1237년 강화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생을 마감하였기에 강화도에 능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서 1239년에, 순경태후는 고종의 며느리인 태자비로서 1244년에, 모두 개경으로 천도하기 전에 생을 마감하였기 때문에 강화도에 안치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병자호란 이후 숙종은 강화도를 전란의 방어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덕진진, 초지진의 5진(鎭)과 광성보,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의, 7보(堡)를 합친 12진보(鎭堡)를 두고 그 아래 갑곶돈대를 비롯한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였습니다.

진(鎭)과 보(堡)는 조선시대의 주둔군대로서, 진은 지금의 대대(大隊), 보는 중대(中隊) 규모의 부대로 서로 상하관계가 아니고 다만 주둔 병력의 수만 다르며 각각 그 밑에 돈대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돈대란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세운 초소로,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砲)와 총구멍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개항시기에 강화도에서 벌어진 전투는 프랑스[丙寅洋擾], 미국[辛未洋擾], 일본[雲揚號事件]과 상대한 것으로 이때 12진보가 방어기지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해냈습니다.

그중에서도 초지진과 광성보가 전투의 중심에 있었는데, 초지진(草芝鎭)은 고종3년(1866)에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군 극동함대 및 고종 8년(1871)에 통상을 강요하며 내침한 미국 로저스의 아세아함대, 고종 12년(1875)에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격전지였습니다.

광성보(廣城堡)는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로저스함대를 덕진진, 초지진, 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1차로 물리쳤으나 다시 쳐들어온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습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魚在淵) 장군과 휘하 장병들이 용감히 싸우다 장렬히 순국하였는데,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雙忠婢)와 약 50여 명의 순국영령들을 기리는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 세워져 있습니다.

신미양요는 조선이 미국을 상대로 한 전투로서, 1866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으로 들어와 강제로 통상을 요구함으로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민간인을 죽이고 사신을 가두는 등 행패를 부려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침몰시켜버렸습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871년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가 군함 5척 해병 1,230명 대포 85문으로 무장을 하고 강화해협으로 진입하여 손돌목에서 조선군과 최초의 포전을 한 뒤 초지진으로 상륙하여 광성보에서 전투를 치른 결과, 조선군은 어재연(魚在淵) 장군을 비롯한 43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결사항전하자 당황한 미군은 마침내 함대를 철수시켰습니다.

병인양요는 프랑스와의 전투로, 1866년(고종 3)에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8,000여 명을 처형한 병인사옥(丙寅邪獄)을 일으켰는데, 이러한 탄압을 피해 청나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이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인 로즈 제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보복 원정을 간청하게 됩니다. 로즈는 1차로 군함 3척을 이끌고 한양의 양화진, 서강까지 올라와서 지세와 수로를 탐사하여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고, 곧이어 2차로 군함 7척, 함재대포 10문, 병력 1,000여 명을 동원하여 리델 신부와 천주교 조선인 신도 3명의 안내를 받으며 조선을 침략하여 강화도를 점령하였습니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강력하게 저항하는 조선군에게 문수산성(文殊山城) 전투에서 27명의 사상자를 냈고,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조선수비대와의 정족산성 전투에서도 패하자 마침내 강화도에서 철수하였는데 이때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 갔습니다.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은 1875년 9월 20일 일본군함 운요호가 강화해협을 불법 침입하여 발생한, 조선과 일본 간의 포격사건으로 근대 제국주의적 영토팽창주의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사건입니다. 운요호는 조선의 동해안과 남해안을 순항하면서 무력적 시위를 벌인 뒤 서해안으로 와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에 정박하고는 수십 명의 해병이 담수 보급의 명목으로 보트에 나눠 타고 해로를 탐측하면서 초지진(草芝鎭)으로 침입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강화해협[鹽江]을 방어하던 조선수비병은 침입해 오는 일본의 보트에 포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모함인 운요호로 철수한 뒤 초지진에 맹렬한 보복포격을 가하고 곧이어 영종진(永宗鎭, 지금의 영종도)에 상륙하여 주민들을 상대로 살육, 방화, 약탈을 자행한 뒤 철수하였습니다.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1876년 2월 26일, 달리 강화수호조약(江華修好條約)이라고도 부르는 조선과 일본의 불평등조약인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를 체결하여 조선침략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건축 양식과 성경 말씀을 쓴 주련이 이채롭다. Ⓒ고을학교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를 비롯한 양명학자들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형성한 학파입니다. 정제두가 1709년(숙종 35) 자신이 속한 정파인 소론(小論)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강화도로 물러나 은거하였는데 이후 많은 소론계 학자들과 정제두의 손자사위 평산신씨(平山申氏) 신대우(申大羽)와 전주이씨 덕천군파(德泉君派)의 이진유(李眞儒)가 강화도로 이주해 정제두의 양명학을 익히거나 혈연관계를 맺어 200여 년 동안 학맥을 이어나갔습니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도교와 불교까지 섭수(攝收)하고자 했고, 고증학의 방법론을 주체적으로 소화했으며, 훈민정음 연구, 국어학, 국사학, 서법(書法), 문자학, 문헌학 분야에서 탁월한 논저들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양명학의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의 설을 따르고 이기론(理氣論)을 사상적 기초로 삼았으며, 이(理)와 기(氣)를 체용(體用과 본말(本末)로 이해하였고 또한 왕수인(王守仁)의 양지학(良知學)과 심학(心學)을 토대로 하여 사학(史學)과 정음(正音), 서예(書藝)와 시문(詩文)을 발전시켰으며, 실학파와도 함께 했는데 특히 북학파(北學派)는 강화학파의 양명학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들 가운데 이종휘(李鍾徽)는 역사를 양지사관(良知史觀)의 입장에서 공평을 원칙으로 삼아 주체적으로 파악하였는데 이러한 사관은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충익(李忠翊)의 <군자지과(君子之過)>,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 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훈민정음의 연구에도 힘써, 이광사(李匡師)의 정음 연구를 이영익(李令翊)과 정동유(鄭東愈), 유희(柳僖) 등이 계승하여 발전시켰으며, 서예에서도 백하(白下) 윤순(尹淳)부터 원교(圓嶠) 이광사에 이르는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창조하였고, 이긍익, 정문승(鄭文升) 등은 특히 산수화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문자학에 남정화(南廷和), 문헌학에 남극관(南克寬)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문장(文章)에서는 이광려, 이긍익, 이건창 등이 기존의 형식이나 시세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적인 표현세계를 이루었고, 당시 주요한 사상적 흐름이던 실학(實學)에도 관심을 가져, 이상학(李象學), 신작(申綽) 등이 실학을 연구하였으며 이건방(李建芳), 이충익 등의 진가(眞假) 논리도 실학자들이 표방하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후 강화학파는 당쟁의 폐해를 비판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강화로 낙향하였던 이건창과 식민지 시대의 국학진흥에 힘썼던 정인보(鄭寅普) 등으로 그 인맥을 이어갔으며,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김택영(金澤榮) 등 한말 민족주의 학자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삼랑산성 안에 있는 전등사 Ⓒ고을학교

고을학교 제5강은 새해 2월 8일(토요일) 열리며 오전 7시 30분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7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30)-김상용순국비-용흥궁(09:00)-대한성공회강화성당-고려궁지(유수부동헌/외규장각/이방청)-강화향교-강화산성(내성)-북문-북장대(파란 표시 구간은 걷기 코스입니다)-갑곶돈대(11:00)-광성보-초지진-삼랑성(12:00)-전등사-양헌수비-점심식사 겸 뒤풀이(<편가네된장> 13:00-14:30)-정제두묘-이건창묘-고려산/혈구산-홍릉(16:00)-강화역사박물관-부근리고인돌군-부근리지석묘(17:30)-월곶돈대(연미정/조강 18:00)-서울(19:30)의 순입니다.

▲고을학교 제5강 강화고을 답사로 ⓒ고을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방한 차림, 모자, 장갑, 스틱, 아이젠, 무릎보호대, 보온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5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고을학교 카페(http://cafe.naver.com/goeulschool)에도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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