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세상에 헌걸찬 기개의 맛을 보여주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세상에 헌걸찬 기개의 맛을 보여주다"

[인문학습원] 고을학교 송년유람은 <예산고을>

올해도 저물어갑니다.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의 송년유람은 제3강으로 12월 14일(토요일) 당일로 진행되며, 충절(忠節)과 선풍(禪風)의 기운이 충만한 <예산고을>로 떠납니다. 예산고을은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였으며 성삼문(成三問), 이순신(李舜臣), 추사 김정희(金正喜), 의병장 최익현(崔益鉉), 김대건(金大建) 신부, 윤봉길(尹奉吉) 의사, 김좌진(金佐鎭) 장군, 만해 한용운(韓龍雲) 등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지언정 충(忠)과 의(義)를 다한 분들의 고장이며 한국불교의 선맥(禪脈)을 이어오는 덕숭문중이 뿌리내린 유서깊은 고을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국내 최대의 예당저수지. 예산평야·당진평야를 살찌운다. Ⓒ예산군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3강 답사지인 예산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백두대간 상의 속리산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보은(報恩)의 말티고개, 선도산(仙到山), 청주의 상당산성(上黨山城), 좌구산(座龜山), 음성의 보현산(普賢山), 안성의 칠현산(七賢山)까지의 산줄기는 한강(漢江)과 금강(錦江)을 나누는 분수령(分水嶺)으로서 한강의 남쪽 산줄기[漢南正脈]와 금강의 북쪽 산줄기[錦北正脈]의 겹침 산줄기인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입니다.

나란히 북쪽을 향하던 두 산줄기가 안성 칠현산(七賢山)에서 나눠져서 한남정맥은 관악산을 향하여 북서진하고 금북정맥은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안성의 서운산(瑞雲山)을 지나 충청도 땅으로 들어서는데, 천안의 흑성산(黑城山)과 국사봉, 광덕산과 차유령(車踰領)으로 이어지고 계속해서 청양의 국사봉, 일월산(日月山)까지 내려와서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광천 오서산(烏棲山)에서 높게 솟구치고 홍성의 백월산(白月山)을 지나 예산에서 용봉산(龍鳳山), 덕숭산(德崇山), 가야산(伽倻山), 상왕산(象王山)의 가야연봉을 크게 일구고는,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태안반도의 골격인 문수산(文殊山), 팔봉산(八峯山), 백화산(白華山)으로 나지막하게 내려앉아 마침내 안흥진(安興津)에서 서해로 숨어들어 산줄기의 흐름을 마감합니다.

다시 말해서 금북정맥은 금강 북쪽의 충남 땅에 솟아오른 산줄기로서, 이곳에서 가장 산세가 두드러진 곳이 가야산으로 주맥(主脈)이 30여 리에 뻗어 있으며 용(龍)이 남쪽을 향해 누워 있는 형상으로 동쪽엔 당진평야를, 서쪽엔 예산평야를 부려 놓았고, 가야산을 중심으로 바닷가 쪽인 서쪽과 내륙 쪽인 동쪽으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넓은 들판에 서산, 태안, 당진, 예산, 홍성 등의 유서 깊은 열 고을이 펼쳐 있으니 이를 내포(內浦)지방이라고 부르며 이런 연유로 예산, 당진평야를 그냥 줄여서 예당평야라고도 하지만 달리 내포평야라고도 합니다.

이렇듯 내포지방은 넓은 평야에 농산물이 풍족하여 예산평야에서 생산된 벼 구만 섬(九萬 贍)을 아산만으로 뱃길로 실어 날랐다고 해서 붙여진 구만포(九萬浦)라는 포구가 있었으며 "예산(禮山) 가서 옷 자랑 하지 말고 홍성(洪城) 가서 말 자랑 하지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은 경제의 중심지요, 지식인의 고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이 평온하고 풍요로워 사람들의 정서가 부드럽고 여유 있고 친근할 것 같은데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기골(奇骨)이 장대하고 의지와 절개가 굳센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최영(崔瑩) 장군, 성삼문(成三問), 이순신(李舜臣), 추사 김정희(金正喜), 의병장 최익현(崔益鉉), 김대건(金大建) 신부, 윤봉길(尹奉吉) 의사, 김좌진(金佐鎭) 장군, 만해 한용운(韓龍雲) 등 이들은 모두가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지언정 충(忠)과 의(義)를 다한 분들입니다. 아마도 그리 높지는 않되 옹골차게 솟구친 가야산의 정기를 타고 나서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의인(義人)이 많이 배출되었나 봅니다.

이러한 내포지방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예산고을은 북쪽으로는 아산만(牙山灣)을 품고 있는 아산고을, 서쪽으로는 가야산 넘어 서해 바닷가의 당진고을, 남쪽으로는 용봉산으로 이어져 있는 홍성고을, 동쪽으로 태화산(泰華山)이 버티고 있는 공주고을과 접해 있으며 지형적 특징은 동서가 막히고 남북이 뚫린 형국으로 서쪽으로는 가야산 연봉이 돌출하여 서해로 가는 길을 어렵게 하고, 동쪽으로는 마곡사를 품고 있는 태화산이 공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으나, 남쪽과 북쪽으로는 큰 산줄기가 없어 홍성과 아산으로의 발길은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시대는 관리가 지방에 출장을 갈 때 날이 저물면 하룻밤 숙박을 할 수 있도록 원(院)을 설치하였는데 남북으로 길이 뚫려 있어 한양(漢陽)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예산에도 당진, 아산, 공주로 통하는 곳에 무한천과 삽교천 사이에 신례원(新禮院)을 설치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지명(地名)으로 남아 있습니다.

▲명찰 수덕사의 대웅전. 한국불교의 양대 산맥인 덕숭문중(德崇門中)을 일구었다. Ⓒ예산군

예산을 둘러친 산줄기는 덕숭산과 가야산을 잇는 능선, 홍성에서 시작하여 덕산까지 이어지는 용봉산과 수암산 능선 그리고 예당저수지를 품고 있는 봉수산 능선이 남에서 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며, 그 산줄기 사이로 가야산과 용봉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삽교천(揷橋川)을 이루고, 봉수산과 예당저수지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와 금오산에서 발원하여 예산읍을 지나온 물줄기는 무한천(無限川)을 이루어 이 두 물줄기가 예산평야를 두루 적셔주고 마침내 서해의 아산만으로 흘러듭니다.

예산에는 백제시대부터 있어온 유서 깊은 고을이 셋이나 되는데 예산읍의 주산(主山)인 금오산(金烏山)에 기대고 있는 예산군(禮山郡, 지금의 예산읍), 봉수산과 무한천에 안겨 있는 대흥군(大興郡, 지금의 대흥면), 용봉산과 수암산 그리고 삽교천에 안겨있는 덕산군(德山郡 , 지금의 덕산면)입니다.

이 세 고을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예산읍은 백제 때 오산현(烏山縣)이었으나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고산(孤山)으로 고쳐 부르며 임성군(任城郡, 지금의 大興郡)에 속했다가 고려에 와서 비로소 예산이라 하였고, 대흥군은 백제 때 임존성(任存城) 또는 금주(今州)라 했으나 신라 경덕왕 때 임성군으로 바뀌고 고려에 와서 대흥으로 고쳐 부르며 운주(運州, 지금의 홍성)에 속했다가 조선 때 현종의 태실이 이곳에 온 연유로 현(縣)으로 승격되었고, 덕산군은 백제 때 금물현(今物縣)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금무(今武)라 고쳐져 이산군(伊山郡)의 관할이 되었고 고려 때 와서는 덕풍(德豊)으로 고쳐 부르다가 조선에 와서 덕풍과 이산 두 고을을 합쳐서 덕산이라 하였습니다.

예산의 세 고을 중에 대흥현이 읍치구역(邑治區域)의 일부인 관아(官衙)와 향교(鄕校)가 그나마도 남아 있고 예산현과 덕산현에는 향교만 남아 있습니다. 세 곳의 향교는 모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로 배향공간(配享空間)인 대성전(大成殿)이 뒤쪽에, 강학공간(講學空間)인 명륜당(明倫堂)이 앞쪽에 있습니다.

대흥현의 읍치구역에는 50여 칸의 객사(客舍)와 40여 칸의 관아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전하고 있지만 지금은 역대 수령들이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이 18칸으로 복원되었고, <임성아문(任城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관아의 정문인 아문(衙門)이 남아 있으며 임성은 임존성(任存城)을 품고 있는 대흥의 옛 이름입니다.

특이한 것은 대흥 동헌 앞에 '의좋은 형제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형제의 우애를 다룬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던, 형은 아우를 걱정하고 아우는 형을 걱정하여 서로 밤중에 볏단을 몰래 날라다 쌓아주었다는 내용으로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그 주인공이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인 세종 때까지 예산에서 호장을 지낸 이성만과 이순 형제로서 이들이 나눈 형제애가 백성들에게 귀감이 된다하여 연산군 때 우애비(友愛碑)를 세웠었고 2002년에 '의좋은 형제상'을 건립하였습니다.

대흥 임존성은 봉수산과 그 동쪽의 봉우리를 함께 에워싼 백제시대 최대의 테뫼식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성의 높이가 약 3.5m이며, 성의 둘레 또한 2.4km가 넘고, 성의 넓이가 28만 8천여 평(坪)이나 되며, 성의 바깥쪽은 석축이나 안쪽은 잡석과 흙을 혼합하여 쌓은 내탁외축(內托外築) 형식으로, 특이한 것은 성안 가장 높은 곳에 우물을 파서 물을 모아 두었다가 적이 공격할 때 물꼬를 터서 적을 물리친 지혜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백제 임존성.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로 3만여 명의 백제 유민(流民)들이 당나라 소정방 군사와 맞서 싸운 난공불락의 산성이었다. Ⓒ예산군

임존성은 백제시대에 북쪽의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구축된 수도(首都)를 방어하는 외곽기지였으나, 백제 멸망 후에는 주류성(周留城)으로 비정되는 서천의 건지산성(乾芝山城)과 함께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의 근거지로서 의자왕의 조카인 복신과 승려 도침이 주류성에서 당나라 군사와 싸워 패배하자 임존성으로 후퇴하여 흑치상지(黑齒常之)와 함께 3만여 명이나 되는 백제 유민(流民)들과 당나라 소정방의 군사와 맞서 싸운 난공불락의 산성이었고, 후삼국(後三國) 시기에는 견훤(甄萱)과 왕건(王建)이 다투었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예당저수지(禮唐貯水池)는 1962년에 예산과 당진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면적(水面積) 329만 평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저수지로서 예산과 당진의 첫 글자를 따서 예당저수지라 이름 붙였습니다. 저수지를 만들기 전에는 무한천의 상류였으며 옛날에는 아산만의 바닷물이 무한천을 따라 임존성이 있는 봉수산 아래까지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덕산현에는 많은 사적지(史蹟地)가 모여 있습니다. 수암산 아래는 윤봉길 의사의 생가(生家)와 사당(祠堂)이 있고 덕숭산 자락에는 천년고찰 수덕사(修德寺)가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으며 가야산 동쪽 능선에는 대원군(大院君)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가 명당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上海)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린 일본 천황의 생일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기념 축하식장에 도시락 수류탄을 투척하여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를 폭사시키는 거사에 성공한 후,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상해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일본 오사카(大板) 위술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12월 19일 가네자와(金澤)형무소 교외 삼우소 공병작업장에서 25세의 젊은 나이로 총살형에 의해 순국하였는데 그 유해는 광복 후에야 비로소 조국으로 돌아와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충의사(忠義祠)는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예산군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에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우의(寓儀)였고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梅軒)입니다.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은 받을 수 없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한 뒤 야학당을 개설하고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여 문명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자활농촌진흥단체인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농촌계몽운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고(塵合泰山), 물방울이 모여 바다가 된다(水滴成海)'는 기치 아래 모든 회원들에게 매월 10전(錢)씩 저축을 하자며 자활의 의지를 독려하였는데 이러한 저축운동은 '월진회'가 창립된 1929년 2월부터 시작하여 윤봉길 의사가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농촌계몽운동이 애국운동이라며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윤봉길 의사는 23세인 1930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마침내 2년 만에 홍구공원의 거사를 성사시키게 됩니다.

생가(生家)의 지형은 수암산 끝자락이 평지로 내려앉은 곳으로 덕숭산과 용봉산에서 발원한 삽교천의 상류지류인 옥계천이 흘러오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작은 섬인 도중도(島中島)를 만들고 다시 물줄기가 합쳐져 삽교천으로 흘러가는 형국인데 풍수가들이 큰 인물이 날 명당이라고 입을 모았던 곳입니다.

태어난 집은 '의(義)로운 기운이 드러나는 집'이란 뜻으로 광현당(光顯堂), 성장한 집은 '한국을 건진 사람의 집'이란 뜻으로 저한당(狙韓堂)이라고 당호(堂號)를 붙이고 초가집으로 말끔하게 복원되어 있습니다. 충의사(忠義祠)는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고 함께 세워진 윤봉길의사기념관에는 유물 56점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수덕사는 호서(湖西)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수려한 덕숭산의 중심 맥(脈)이 힘차게 뻗어 내려와 우뚝 멈춰 정기를 갈무리한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수덕사 터는 봉황이 둥지에 내려앉은 형국인 비봉귀소형(飛鳳歸巢形)의 명당으로 이런 곳에서는 성현이나 고관이 많이 나온다는데 그래서인지 근세에 들어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경허선사(鏡虛禪師)와 그의 제자 만공선사(滿空禪師)가 주석(住錫)하였던 도량이기도 합니다.

경허선사로부터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만공선사의 문하에 많은 수행자들이 들어와 수행하여 이른바 덕숭문중(德崇門中)을 이루었는데 덕숭문중은 범어문중(梵魚門中)과 함께 많은 수행자를 배출한 한국불교의 양대 산맥입니다.

수덕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에 백제에 불법을 전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수덕사 절터를 발견했다고도 하나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고 절에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백제 후기에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말에 나옹선사(懶翁禪師)가 다시 고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法王) 때 지명법사가 창건하고 원효가 중수했다고도 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지어진 대웅전이 700여 년 동안 쓰러지지 않고 간결한 힘과 멋을 뽐내면서 지금까지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목조건축은 그 재료가 나무라서 전란이 많았던 우리나라에서는 남아 있는 건축물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현재 남아 있는 목조건축 중 오래된 것은 대부분 고려시대에 지은 것으로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鳳停寺) 극락전,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 강릉 객사문(客舍門) 등 남한에 5채가 있고 북한에는 황해도 성불사(成佛寺) 응진전(應眞殿)과 심원사(心源寺) 보광전(寶光殿) 등 2채가 있는데 이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입니다.

▲가야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온다는 명당이었다는 남연군 묘 Ⓒ고을학교

가야산의 동쪽 자락에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펼칠 때는 왕족 중에 쓸 만한 인물이 보이면 그대로 두지 않고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던 살벌한 시기였기에 흥선군은 살아남기 위해 '상가집 개'라고 불릴 정도로 파락호 행세를 하며 후일을 기약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왕기(王氣)가 서린 명당으로 이장하고자 풍수가(風水家)와도 어울리다가 마침내 당대의 유명한 풍수가 정만인(鄭萬仁)을 만났습니다.

흥선군이 정만인에게 당대에 발복(發福)할 제왕지지(帝王之地)를 물으니 가야산 자락에는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二代天子之地]와 자손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하자 바로 천자가 나오는 자리를 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명당자리에는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어 묘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흥선군은 그 명당에 묘를 쓰기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짜고 하나하나 차례로 일을 벌려 나갔는데 먼저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묘를 가야사 뒤쪽 산기슭에 임시로 옮겨 놓았습니다.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오백여리 길의 이장은 종실(宗室)의 무덤을 옮기는 일이라 상여가 지나가는 지방의 백성들을 동원하였고 이장 때 사용한 상여는 맨 마지막으로 운구 한 '남은들' 사람들에게 기증되어 가야산에서 덕숭산으로 이어지는 고개자락에 상여도가를 짓고 그 속에 보관하고 있다가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가고 그 모형이 남연군 묘 옆에 다시 지은 유리로 된 보관함 속에 들어 있습니다.

명당 근처에 임시로 가묘(假墓)를 마련했으니 이제 남은 일은 가야사 절을 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가야사 주지에게 주고 승려들을 쫓아내게 하고 불을 질렀다는 설과 둘째는 충청감사에게 중국의 명품 단계벼루를 주고 가야사 승려들을 쫓아내게 하고 불을 질렀다는 설인데 절에 불을 지르고 승려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충청감사와 가야사 주지 모두를 이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가야사를 폐한 후 그 자리에 남연군 묘를 썼는데 도굴을 우려하여 석수(石手)들을 동원하여 바위를 십 척 이상 파고 관을 안치한 후 석회를 삼백 포나 쏟아 부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요즘의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후일 통상 요구를 두 번이나 거절당한 독일인 상인 오페르트가 미국인 자본가 젠킨스의 도움으로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앞세워 상해에서 차이나호를 타고 행담도를 거쳐 아산만으로 들어와 삽교천을 따라 덕산 구만포(九萬浦)에 내려 천주교도 김여강(金汝江) 등 8명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 묘에 이르러 도굴을 하려 했으나 돌병풍처럼 둘러쳐진 강회를 뚫어내지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지역의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참형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불타서 없어진 가야사는 어떤 절이었을까요?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가야사는 공민왕7년(1358년) 나옹화상이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고 적고 있으며 수덕사보다 먼저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덕사보다는 큰 절이었던 듯 하고 가야사 대웅전에 철불(鐵佛)이 세 분 모셔져 있었다고 하는데 철불이라면 그 시기가 신라 말에서 고려 중기까지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절을 폐하고 아버지 무덤을 쓴 대원군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자기 아들이 임금이 된 그 이듬해(고종2년 1865년) 남연군 묘 맞은편에 있는 서원산(書院山) 기슭에 절을 짓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한 은덕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보덕사(報德寺)라 이름을 내렸는데 절의 시주자(施主者)가 큰 아들 이재면(李載冕)으로 되어 있으니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실원찰(王室願刹)인 셈입니다.

▲가야사를 폐한 사죄와 보은으로 건립된 보덕사 Ⓒ고을학교

기록에 의하면 보덕사는 "흙과 나무와 쇠붙이와 옥돌[土木金碧]로 치장하여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많은 전토(田土)와 보화가 내려졌다"고 전하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보덕사는 한국전쟁 중에 불타 없어져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했던' 절의 모습은 자취를 감춰버리고 지금은 아담한 비구니 사찰로서 호젓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경내에는 가야사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이는 깨진 석등(石燈)의 화사석(火舍石)이 조각 솜씨가 매우 뛰어나게 새겨진 그대로 사찰 한 귀퉁이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가야사에 있던 범종은 서울 안산(鞍山) 아래 있는 봉원사(奉元寺)로 옮겨 왔습니다.

추사고택(秋史古宅)은 삽교천과 무한천이 합수하여 아산만으로 빠져나가는 신례원에서 당진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는데 원래는 서울 장동(壯洞, 지금의 통의동)에 있었으나 궁궐 옆에 너무 큰집이 있다고 상소가 올라와 영조(英祖)가 할 수 없이 윤허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됐는데 그 집은 영조의 사위 김한신(金漢藎)의 것이었습니다. 이곳으로 옮길 때 53칸 규모로 지었는데 그때 경공장(京工匠)들을 불러 일을 시키고 비용도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을 부조를 하였다고 하니 훈척가문(勳戚家門)의 위세를 가히 짐작케 합니다.

추사고택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추사의 묘가 소박하게 자리 잡았고 오른쪽에는 영조의 딸이며 김한신의 부인인, 그래서 추사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화순옹주 열녀정문(烈女旌門)이 있으며 뒤편으로는 김한신이 별사전(別賜田)으로 받은 땅에 세운 추사 집안의 원찰(願刹)인 화암사가 있고 그 뒤편 바위에는 예서체의 '시경(詩境)'과 해서체의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추사고택 사랑채. 화단 앞에 해시계의 일종인 석년이 세워져 있다. Ⓒ고을학교

점심식사 겸 뒤풀이는 수덕산 아래에 있는 숨겨진 맛집인 <알콩달콩> 식당에서 맛있는 여러 가지 산나물로 비벼먹는 <보리밥정식>으로 주식을 삼고 막걸리와 빈대떡도 곁들일 예정입니다.

고을학교 제3강은 12월 14일(토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00)→예당저수지(09:30)→대흥현(대흥향교·대흥동헌·의형제상 10:30)→대흥 임존성(11:00)→수덕사(12:30)→점심식사 겸 뒤풀이(<알콩달콩>식당 13:30)→ 충의사(광현당·저한당 14:10)→남연군 묘('남은들' 상여·보덕사 15:10)→추사고택(추사 묘·화순옹주 정려문·화암사·추사의 암각글씨 16:30)→서울(19:00)의 순입니다.

▲고을학교 제3강 예산고을 답사로 ⓒ고을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방한 차림, 모자, 장갑,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3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고을학교 카페(http://cafe.naver.com/goeulschool)에도 놀러오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