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 달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고창읍성 야경 Ⓒ고창군 |
고을학교 제2강은 11월 9일(토요일) 당일로, 새 세상을 열려던 민중의 열망이 동백꽃으로 스러진 고창 고을을 답사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2강 답사지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선사시대부터 다양한 문화 싹틔웠던 곳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을 향해 내쳐 뻗어내려 오다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서북쪽으로 갈라져 나와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을 이루고 다시 마이산(馬耳山)에서 한 줄기는 북쪽으로 계룡산(鷄龍山)을 향해 치닫는 금강(錦江) 남쪽의 산줄기인 금남정맥(錦南正脈)이 되고 또 다른 한줄기는 남쪽으로 광양 백운산(白雲山)을 향해 치닫는 섬진강(蟾津江) 서남쪽의 산줄기인 호남정맥(湖南正脈)이 됩니다.
호남정맥 상에서 전라도를 남북으로 나누는 산줄기는 방문산(方文山. 620m), 방장산(方丈山. 734m), 문수산(文殊山. 620m), 고산(高山. 527m)의 연봉들로서 전북 고창과 전남 장성을 사이에 두고 높이를 달리하며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고창(高敞)은 동쪽으로는 호남정맥(湖南正脈) 넘어 장성(長城)과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서해(西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영광(靈光)과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부안(扶安)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을입니다.
또한 호남정맥이 치솟아 있는 동북쪽이 높아 대부분의 물줄기는 대체로 서쪽으로 흐르는데 그중에서 유역(流域)이 가장 넓은 물줄기가 주진천(인천강이라고도 함)으로, 고창천(高敞川)과 무장천(茂長川)이 주진에서 합쳐지기 때문에 주진천이라고 부르며 고창 고을을 두루 적셔주고는 선운사(仙雲寺) 입구를 거쳐 서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고창이라는 지명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처음 등장하는데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을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고창현(高敞縣)으로 고쳐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창은 선사시대에는 씨족들이 모여 살며 다양한 문화를 싹틔웠던 곳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많은 고인돌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54부족연맹체 중에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에 속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으로 불렀으며 통일신라시대 이후부터 고창현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창현(高敞縣) 주변에는 무장현(茂長縣)과 흥덕현(興德縣)이 같이 이웃하고 있었는데 이 두 곳을 고창현이 병합하여 지금의 고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무장현의 읍치구역(邑治區域)에는 읍성의 일부와 남문인 진무루(鎭茂樓)와 객사와 동헌이 남아있고 무장향교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흥덕현의 읍치구역에도 관아와 흥덕향교가 남아 있습니다.
고창지방에는 무장향교(1420년), 고창향교(1512년), 흥덕향교(1621년)가 차례로 창건되어 이 지방의 유교문화를 보급하고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창현의 봉수대는 두 곳으로 모두 무장현의 바닷가에 있었는데 고리포 봉수와 소응포 봉수가 그것으로, 남쪽으로부터 올라오는 군사적인 소식을 중앙으로 올려 보내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창의 고인돌군 Ⓒ고창군 |
조선시대 읍성과 읍치구역(邑治區域)이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다
고창읍성은 동쪽으로 진산(鎭山)인 반등산(半登山)을 둘러싸고 있고 동문인 등양루(登陽樓), 서문인 진서루(鎭西樓), 북문인 공북루(拱北樓)와, 각 문 앞에 세 곳의 옹성(甕城), 두 곳의 수구문(水口門), 여섯 곳의 치(雉)로 이루어졌으며 성 밖에는 해자(垓字) 등 방어시설들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읍성 안에는 객사(客舍)와 동헌(東軒) 등 22동의 관치시설(官治施設)들이 있었으며 연못이 세 곳, 우물이 네 곳[三池四泉]에 있었다고 기록이 전합니다만 전란으로 소실된 것을 1976년부터 지금까지 14동의 관치시설을 복원, 정비하였습니다.
복원된 관치시설로는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이 묵었던 객사(客舍), 수령(守領)이 살림을 살았던 내아(內衙), 수령이 정사(政事)를 보았던 동헌(東軒), 죄인을 가두었던 옥사(獄舍), 연못 옆에 세운 풍하루,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가 있는 향청(鄕廳), 군무(軍務)를 보던 청사인 장청(將廳), 수령과 그 가족들 그리고 빈객의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회계업무를 담당했던 관청(官廳), 그리고 동문, 서문, 북문인 등양루, 진서루, 공북루 등이 있습니다.
고창읍성에는 '성밟기[踏城]'놀이라는 특별한 민속놀이가 열립니다.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무병장수하고 저승에서도 극락에 간다는 전설에서 연유한 것인데 반드시 손바닥으로 쥘 수 있는 크기의 돌이어야 하며 성을 세 번 돌고 나서는 일정한 곳에 그 돌을 쌓아 두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유사시에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선조들께서는 민속놀이를 통해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지혜를 펼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창 고을의 도산마을은 안동김씨(安東金氏)와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세거지(世居地)로서 고가(古家)가 많이 남아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한말의 유학자 김정회(金正會)의 고가가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김정회는 성균관(成均館) 경학원(經學院)에서 경학을 가르쳤으며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워 사군자(四君子)를 잘 그렸는데 그중에서 대나무 그림은 매우 유명합니다. 이 고가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 4동과 곳간 2동 등 모두 6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도산서당 Ⓒ향토문화대전 |
아름다운 자태 뽐내는 도산서당
특히 도산마을에는 17세기경에 세워진 대표적인 서당인 도산서당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이 서당은 한말(韓末)인 1907년에는 인근부락의 학동들을 위한 강당[晩睡堂]으로도 쓰였고 일제 강점기인 1934년에는 도산국민학교가 개교할 때 교실이 채 준비되지 못하여 한 학기 동안 교실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고창이 배출한 출중한 인물은 동학농민전쟁을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과 판소리의 대가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로서, 두 분의 생가가 지금까지 남아 있어 탐방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동리 신재효는 순조(純祖) 때 사람으로 판소리의 대가로서 판소리를 개작(改作)하고 명창(名唱)들을 지도, 후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한학에 심취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능통하였고 음률, 가곡, 창악, 속요에도 정통하여 그의 지도를 거치지 않고는 명창의 반열에 들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국창(國唱)으로 일세를 주름잡았던 이날치, 박만순, 김세종, 정창업, 김창록 등과 여류 명창의 비조(鼻祖) 진채선, 허금파 등도 모두 그의 문하(門下)였습니다.
판소리는 글자 그대로 '판'과 '소리'가 결합된 말로서, '판'은 '굿판' '씨름판' '노름판' '잔치판' '화투판'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사람이 참여하여 이루어지는 행위가 벌어지는 장소'라는 뜻으로,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생활의 현장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공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소리'는 소리 내는 방식과 지역에 따라 크게 보아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서 '제'라 함은 유파(流波)를 뜻합니다.
동편제는 풍부한 성량(聲量)으로 기교와 수식 없이 통성으로 장단에 맞춰 사설(辭說)을 붙여가는 소리이며 장단도 복잡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 잔가락이 없는 장단으로 고졸(古拙)하고 소박한 창법으로, 섬진강 동쪽 지역인 남원, 순창, 곡성, 구례 등지에 전승된 소리로서 가왕(歌王)으로 일컬어지는 운봉 출신 송홍록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습니다.
서편제는 후천적인 수식과 기교로 소리를 만드는 유파로서 동편제의 창법을 다듬어서 새로운 시대적 감성에 부응한 것으로 기술적인 면에서 그만큼 향상된 것이며 정통창법으로부터 해방된 창법입니다. 섬진강 서쪽 지역인 광주, 나주, 담양, 화순, 보성 등지에서 전승된 소리로서 순창 출신이며 보성에서 말년을 보낸 박유전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습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판소리는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바탕뿐이지만 원래는 열두 바탕이었습니다.
탈락한 일곱바탕은 <변강쇠타령> <옹고집타령> <배비장타령> <강릉매화타령> <장끼타령> <무숙이타령> <가신선타령>으로 그 내용이 너무도 비속한 표현이 많아,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판소리가 민중적 기반이 약해지고 양반들이 청중이 되어 주류를 형성하게 됨으로써 양반들의 감성과 미의식에 부합되지 않는 일곱 바탕은 탈락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창이 배출한 출중한 인물, 전봉준(全琫準)과 신재효(申在孝)
동학농민전쟁의 핵심 인물이자 주도자였던 녹두장군 전봉준은 1855년 전북 고창군 고창읍 당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은 조선 말, 봉건체제의 모순이 심화된 가운데 농민층에 대한 수탈과 억압이 더욱 가혹해지자 이를 벗어나고자 분연히 일어선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이 관권과 외세의 연합군과 싸우면서 마침내 근대민중사의 최대 사건으로 평가되는 동학농민전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 투쟁의 처음과 중심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있었는데 장군을 비롯한 동학농민 지도부는 1894년 3월 20일(음력)에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인 무장기포지(茂長起布地.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 마을)에서 4,000여 명의 농민군이 모인 가운데 무장창의(茂長倡義) 포고문을 선포하고 조직적인 항쟁에 들어감으로서 동학농민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갑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 아래 농민군의 4대 강령을 발표하고 조직적으로 투쟁을 전개했고 집강소(執綱所)를 세우는 등 농민자치를 실천하였습니다.
전봉준은 전국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규합하여 최후 전투였던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고 이후 재기를 계획하였으나 갑오년 12월 2일 밤에 체포되어 그의 나이 41살이었던 1895년 3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위정자의 각성은 물론 갑오개혁(甲午改革)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의 민중항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전봉준의 생가가 정읍 장내리 '조소마을'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와서 천안(天安) 전씨(全氏)의 집성촌인 고창 '당촌마을'이라는 것이 정설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도솔암의 마애미륵불 Ⓒ눈꽃소리 |
선운사(禪雲寺)는 백제의 고승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선운산(禪雲山)에 기대고 있고 달리 도솔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도솔은 도솔천으로 미륵보살이 이 세상에 내려올 때를 기다리며 머무는 하늘세계로, 도솔천 내원궁에서 설법을 하며 세상으로 내려와 중생을 구제할 때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선운사 입구에 있는 부도(浮屠)밭 안에 백파율사비(白波律師碑)가 있습니다. 백파선사는 조선불교를 다시 꽃피우게 한 화엄종(華嚴宗)의 종주(宗主)이며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스님의 스승으로 89세까지 장수하였던 분이십니다.
이 비석은 조선 철종 9년(1858)에 건립한 것으로 비명(碑銘)에는 "가난해서 송곳을 꽂을 땅도 가지지 못했으나 기운은 수미산도 누를 만하다"라는 글귀가 있는데 기울어져 가는 조선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였던 백파선사의 굳은 정신이 엿보이는 내용입니다. 비문은 앞면은 해서체로, 뒷면은 행서체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70세에 글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추사 글씨의 금석문으로는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문을 탁본하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던 시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원래의 비석은 박물관에 보관하고 모사품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 칠송대 암벽에는 거대한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들 미륵불이라 불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 위덕왕(554∼597년)이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에게 암벽에 마애불을 조각하고 동불암(東佛庵)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암자는 무너지고 마애불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후에 마애불의 복장(腹藏)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하여 조선 말 관찰사인 이서구(李書九)가 복장을 열었더니 천둥벼락이 쳐 그대로 닫았으나 '이서구 개은(李書九 開垠)'이라는 글씨가 나왔다고 합니다.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접주 손화중(孫花中)이 무장(茂長)에 머무르면서 풍우대작(風雨大作)을 무릎쓰고 복장물을 은밀히 꺼내보니 검단선사의 비결록(秘訣錄)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운사의 가을 Ⓒ선운사 |
후두둑 떨어지는 동백꽃, 새 세상을 못다 이룬 민중들의 슬픈 눈물인가
선운사가 세간에는 동백꽃이 피면 찾아가는 낭만적인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민중의 애환이 서려 있는 미륵도량이 본래의 모습입니다.오히려 하염없이 후두둑 떨어지는 동백꽃이 새 세상을 못다 이룬 민중들의 슬픈 눈물인지 모를 일입니다.
고창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고을이기도 합니다. 고인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혈연집단의 무덤으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입니다. 한반도 전체의 고인돌 약 3만여 기 중에 고창지역에만 185개 군집에 1,600여 기가 넘게 죽림리와 상갑리에 운집해 있으며 특이한 것은 북방식과 남방식 고인돌이 혼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고을학교 제2강은 11월 9일(토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00)-(제2강 여는 모임·버스 안)-고창IC-고창 도착(10:00)-고창읍성(11:00)-동리 신재효 생가와 판소리박물관(12:00)-도산마을(김정회 고택-도산서당-도산리 고인돌)(13:00)-점심식사 겸 뒤풀이(14:00)-상갑리 고인돌군(14:40)-선운산(도솔암-마애미륵불-진흥굴-선운사-백파선사 비문)(17:00)-선운사IC-(제2강 마무리 모임·버스 안)-서울(20:00)의 순입니다.
▲고을학교 제2강 고창 고을 답사로 ⓒ고을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2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고을학교 카페(http://cafe.naver.com/goeulschool)에도 놀러오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선운산의 가을 Ⓒ선운사 |
최연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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