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였다. 지금은 학교 급식이 일반화 돼 있지만 그 시절엔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학기 초에는 점심시간이 되면 자리를 중심으로 대여섯 명씩 모여 앉아 밥을 먹었다. 저마다 싸오는 반찬이 1~2가지였기 때문에 모여서 먹으면 훨씬 다양한 반찬을 먹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5월쯤 돼서는 자리보다는 친한 친구들 위주로 모여 앉아 밥을 먹게 됐다. 그런데 그룹별로 반찬의 종류가 차이가 났다. 어떤 그룹에서는 반찬이 김치, 콩자반, 멸치볶음이 전부인데, 어떤 그룹은 햄, 소시지, 돈까스, 참치 등이 즐비했다. 지금은 흔한 반찬들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게 반찬에서 가정 경제 형편이 드러났다. 편의상 전자를 A그룹, 후자를 B그룹이라고 부르겠다.
언제부터인가 A그룹의 아이들이 점심시간에 자리에서 일어서 돌아다니며 B그룹 아이들의 햄, 소시지, 돈까스 반찬을 하나씩 집어 먹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B그룹 아이들의 반발이 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균형이 생기기 시작했다. A그룹의 아이들이 점심시간 내내 '반찬 사냥'을 하러 다녔지만, B그룹의 아이들은 A그룹 아이들의 반찬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A그룹의 아이들은 밥 위에 반찬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먹었지만 B그룹의 아이들은 맨밥을 먹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B그룹의 어떤 아이는 반찬을 두 통에 싸와서 A그룹의 '사냥' 시간에 반찬통 하나를 꺼내 놓고, 사냥 시간이 끝나면 숨겨 둔 다른 반찬통을 꺼내 밥을 먹는 '꾀'를 부리기도 했다.
뺏어 먹기 Vs. 나눠 먹기
그러던 6월 어느 날. 토요일 학급회의 시간이었다. B그룹의 아이 한 명이 손을 들고 긴급 안건을 제안했다.
"앞으로 점심시간에는 자기 자리에만 앉아서 밥을 먹도록 규칙을 정합시다."
학급회의를 그저 시간표에 있는 요식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던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리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달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였다.
담임선생님이 "왜?"라고 물으셨다.
"자기 반찬을 두고서도 남의 반찬을 빼앗아 먹어 맨밥을 먹는 일이 많습니다. 앞으로 자기 반찬만 먹을 수 있도록 자기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게 해야 합니다."
A그룹의 아이가 손을 들고 일어서 반박했다.
"점심시간에 반찬을 서로 나눠 먹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규칙으로 막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반찬이 모자라면 다른 친구들 반찬을 먹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B그룹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돌아다니면 먼지 난다", "엄마가 정성들여 싸주신 반찬인데, 다 빼앗기면 엄마가 얼마나 서운해 하시겠냐"고 공격했고, A그룹 아이들은 "나눠 먹는 것은 미풍양속이다", "서로 다양한 반찬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 "반찬이 모자라면 더 많이 싸오면 되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갑론을박이 이어졌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대신 담임선생님이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
"다음 주 점심시간부터는 선생님이 교실에 와서 함께 밥을 먹겠어요."
담임선생님은 '면담'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루에 두 명씩 정해서 중국집에 짜장면이나 짬뽕을 시켜주고 교실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처음에 아이들은 자기 면담 차례가 되면 점심시간에 짜장면을 먹을 수 있다는데 환호했다. 그런데 막상 다음 점심시간이 돼보니 A그룹 아이들에게는 전혀 환호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담임선생님이 교실에서 밥을 먹다보니 더 이상 점심시간에 돌아다니며 '반찬 사냥'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점심시간 왁자지껄하던 교실에는 적막(혹은 평화)이 찾아왔다. B그룹 아이들은 편안하게 밥을 먹었고, 불편해진 A그룹 아이들은 자리에서 후다닥 도시락을 해치우고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당시에는 담임선생님의 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강제적 조치 없이 점심시간 갈등을 해결한 셈이었으니까. 매일 점심 중국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도 담임선생님은 고역이었을 테다. 그런 면에서 자기희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담임선생님은 어떻게든 학급회의 시간에 점심시간 문제를 아이들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유도했어야 했다. 다음 학급회의 시간에 정식 안건으로 올려 아이들이 스스로의 주장을 펼칠 수 있게 준비할 시간도 주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친구들을 설득하도록 했어야 했다. 몇 주를 토론해도 의견이 모아지지 않으면 표결이라도 해서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규칙을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본인 스스로가, 그것도 자신의 권위를 수단으로 삼아 아이들의 자기 결정권을 빼앗은 것이다.
협동조합과 민주주의
11월 29일 사회적경제언론인포럼에 볼로냐 대학의 스테파노 자마니, 베라 자마니 교수 부부를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 볼로냐는 세계적인 협동조합의 도시이고 자마니 부부는 협동조합 분야 석학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훈련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탈리아에는 어떤 협동의 전통이 있느냐'고 질문하자 자마니 교수 부부는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등 도시공동체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답했다. 이탈리아는 11세기부터 자치도시가 발달했다. 지금도 행정구역에는 '꼬무네(comune)'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공동체성이 중시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도 협동조합이 발달된 곳은 볼로냐가 있는 '에밀리아 로마냐' 등 이탈리아 북부 지방이다. 남쪽 지방에서는 협동조합이 활발하지 않다. 스테파노 자마니 교수는 그 원인의 하나로 남부 지방의 '마피아'를 꼽았다. 민주주의적 자치 전통이 강한 북부 지방에서는 협동조합이 성장해왔으나, 폭력적인 조직 문화가 강한 남부 지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마니 교수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만 협동조합이 200만 개"라고 했다. 미국이 자본주의의 상징인 나라이지만 협동조합은 민주주의가 발전한 선진국일수록 발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협동조합 활성화 정도를 선진국의 지표로 사용한다고도 한다.
한국에서도 2012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 이후 2000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생기는 등 협동조합이 하나의 사회현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상당수 협동조합들이 '준비' 없이 생겨나고 있다는 걱정이 크다. "다섯 명만 모이면 된다"는 홍보에 협동조합이 일종의 '기업 설립의 자유'로서 기능할 뿐, 협동조합 운영을 위한 민주주의 훈련은 거의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긴 협동조합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 학급회의 반찬 사건을 떠올린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이다. 학급회의 시간에도 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이 아닌, 선생님 개인의 리더십에 의존하는 사례. 비단 기자 개인의 경험만은 아닐 것이다. 더 넓게 보면 우리 사회는 '성장'이라는 구호 아래 이렇게 흘러온 셈이다. 협동조합에 필요한 리더십은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민주주의적 리더십이다. 그래야만 이익을 덜 내더라도 오래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국회니 어디니 돌아가는 꼴을 보면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아직 먼 것 같다. 민주주의는 '합의'와 합의를 위한 끊임없는 토론과 설득의 과정이 아니라, '다수의 힘', '절차적 정당성' 등 결과만 강조되고 있다. 사회의 민주주의 수준이 이 정도인데 협동조합인들 잘 될 수 있을까.
이탈리아 1000년의 자치 도시 공동체 전통. 부럽다. 까마득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본이 안 돼 있는 민족은 아니다. 우리 또한 두레와 품앗이의 수천 년 전통을 가진 민족이다. 다만 잊고 있을 뿐. 이제 다시 시작됐을 뿐이다. 더 많은 협동조합이 만들어져야 한다. 협동조합 그 자체가 최고의 민주주의 훈련장이다. 특히 '먹고 사는 문제'가 걸린일 만큼 좋은 교육이 있을까. 감히 "협동조합이 한국 민주주의 미래"라고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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