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어느 따뜻한 봄날 우연히 친구에 이끌려 경마장에 갔다. 경마장? 호기심도 있었지만 께름칙했다. 친구는 날 안심을 시키려했던지 한 가지 원칙을 코칭해줬다. "총액을 정해라." 2만 원이면 2만 원, 5만 원이면 5만 원 그날 배팅을 할 총액을 정해두고 다 잃으면 즉시 경마장을 떠나라는 것이다. 난 그날 예산을 2만 원으로 잡았다.
처음 가본 과천 경마장은 입구부터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주변 길가에는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줄서 있었고 공설 주차장이 모자라 사설 주차장이 성행하고 있었다. 경마장 근처에는 경마 예상지를 파는 사람들, 김밥 등 간식 파는 행상들로 북적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김밥 몇 줄에 경마예상지를 구입했다. 세 명이 갔는데 각자 경마 예상지는 다른 종류로 구입했다. 비교해보면서 베팅을 하기 위해서였다.
경마장가 시작됐다. "두두두두…" 말들의 말발굽 소리가 박진감 넘쳤지만 더 놀라운 건 말들이 결승점에 골인할 때 터져 나오는 3만5000 관중들의 장탄식이었다. 말들이 결승점에 가까워 올수록 오디오 볼륨 올리듯 웅성거림이 점점 커지다가 관중들은 "와", "휴", "우", 일제히 한 숨을 내쉬었다. 경마장은 한국시리즈가 열리는 잠실구장이었고, 한일전 축구 경기가 열리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 같았다. 연간 1000경기가 넘는 프로야구가 700만 관중을 목표로 열을 올리고 있지만 경마는 연간 관중 수가 1000만을 뛰어 넘은지 오래다.
깨알 같은 글자와 숫자로 가득한 경마 예상지를 분석하면서 나름 과학적 베팅을 했다. 다른 사람들 흉내 내면서 다음 경기 출전마들을 체크하는 시늉도 했다. 게임마다 우승 확률이 비교적 높게 예상된 말들에 2000~3000원씩 걸었다. 그런데 다 꽝. 그렇게 대여섯 게임 예상이 빗나가자 관심이 시들해졌다. 마지막 게임에는 거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냥 길에 돈 1000원 흘린 셈 치고, 우승 확률이 0.1%도 안 되는 말들에 100원 씩 걸었다. '길 막히기 전에 나가야지'라는 생각으로 심드렁하게 경주를 지켜보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건 말들이 앞으로 치고 나오더니 결국에는 1, 2등으로 골인 했다.
나도 모르게 마권을 쥔 두 손이 번쩍 치켜 올라갔다. 전광판에 배당률이 표시됐다. '1060배.'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차 한 대 뽑아가겠어", "억수로 운이 좋구만", "뭐 하는 사람이요?" 등등. "이렇게 높은 배당을 맞춘 마권은 처음 본다"며 기념으로 마권 사진을 찍어간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걸었어?", "100원이요." "우하하하. 차는 무슨. 근처에 가서 수원 왕갈비나 한 대 뜯고 가시오." 100원짜리 마권을 갖고 10만6000원을 수령한 뒤 그날 저녁 친구들과 갈비를 뜯고 냉면도 한 그릇씩 먹었다. 그 이후로 경마장엔 가지 않았다. 그냥 무용담으로 남았다. "아 그 때 내가 경마장에서 1060배에 당첨이 됐는데, 100원을 걸었지 뭐야. 와하하하."
그러던 중 2006년 강원랜드에서 개설한 '한국 도박중독 예방·치유 센터'를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역시나 센터 상담 전문가에게 '경마장 무용담'을 떠벌렸다. 이 얘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소심남'이라고 놀렸는데, 그는 대뜸 "김 기자님이 왜 경마 중독에 안 걸린 줄 아세요?"라고 물어왔다. '중독'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갑자기 진지해졌다. "왜죠?"
"술이나 마약 같은 물질 중독과 마찬가지로 도박 같은 행위 중독도 인간 두뇌의 쾌락중추를 자극해 중독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행위 중독은 '보상'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요. 도박을 해서 큰 돈을 땄을 때 쾌락을 느끼고 다시 그 쾌락을 느끼고 싶은 열망이 집착으로 바뀌면서 중독 상태가 되죠."
이 얘기만 들으면 난 경마에 중독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안 그런 이유는 뭘까. 설명이 이어졌다.
"김 기자님도 1060배에 당첨이 됐을 때 짜릿한 쾌감을 느꼈겠지만, 김 기자님은 길에 돈 흘렸다는 생각으로 베팅을 했다고 하셨잖아요. 마찬가지로 10만6000원을 딸 때도 길에서 돈을 주은 것처럼 받아들인 겁니다. 사람들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10만 원을 주웠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길을 걸을 때마다 다시 10만 원을 주을 것을 기대해서 땅만 뒤지면서 걷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운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에 의해 보상을 얻었다고 받아들이게 되면 중독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만약 김 기자님이 경마 예상지를 철저하게 분석해서 본인이 예측한 대로 결과가 나온 것이라면 계속해서 경마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카지노에서도 슬롯머신이나 룰렛 같은 운에 좌우되는 게임에 빠지는 도박 중독자는 별로 없습니다. 블랙잭이나 바카라처럼 자신이 카드를 세서 승리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게임에 도박 중독자들이 몰리죠. 계속 돈을 잃으면서도 다음에는 딸 수 있다면서 '한 판만 더', '한 판만 더'를 되풀이 하는 게 도박 중독입니다. 자기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신념이 생기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거죠."
그는 그런 측면에서 스포츠 도박이 분석을 통해 경기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중독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했다. 조금 삐딱하게 보면 주식도 마찬가지다. 반면 로또의 경우 중독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적다. 로또 숫자를 분석하는 일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로또는 '운'의 영역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최근 일부 연예인들이 불법 스포츠 도박을 해 시끄럽다. 게다가 컴퓨터(스마트폰) 게임을 중독법에 포함시키는 문제를 놓고 말들이 많다. 컴퓨터 게임도 중독 가능성이 높은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새로운 자아는 자신의 노력에 의해 전사가 되기도 하고 영웅이 되기도 한다. 평판이라는 보상이 따르고 심지어 금전적 보상이 생기기도 한다. 게임 업체들은 중독의 고리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 사실 그래야 재밌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중독'에 대한 논의가 게임이라는 대상에 한해 협소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중독'은 오히려 논의의 주변으로 몰리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현실은 어떤가. 마약은 프로포폴 등 신종 마약의 품종이 나날이 확대되고 있다. 인천, 제주 등 경제자유구역에서는 카지노를 유치한다고 난리다. '외국인 대상'이라지만 내국인은 도박 중독돼면 안 되고 외국인은 도박 중독돼도 괜찮다는 건 별로 윤리적이지 않다. 이뿐인가. 경마장 장외발매소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스포츠토토도 성업 중이다. 합법적 도박의 확장은 불법 도박에 대한 윤리적 거부감을 감소시킨다.
가장 흔한 중독 물질인 술과 담배는 또 어떠한가. 캐나다 등의 나라에서는 술을 판매 면허를 가진 상점에서만 엄격하게 신분을 확인해 판매하고 있다. 담뱃갑에 암 사진을 넣어 경고성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수년 전부터 제기돼 왔지만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다. 하다못해 답뱃갑에 질병의 경고는 있지만 '중독성'에 대한 경고 문구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담배 피울 만큼 피우다 보건소에 찾아가야 니코틴 패치 몇 장 나눠주는 게 다다. 담배나 술 중독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제대로 된 적이 있는가. 정부 대책은 그저 담뱃값을 올리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판매량이 떨어져도 정부의 세금 수입은 유지가 된다. 솔직히 정부는 술 담배 소비량이 줄어들길 원하지 않는다.
여의도 정가에 오래된 농담이 하나 있다. "도박을 끊게 하려면 마약을 가르치고, 마약을 끊게 하려면 정치를 가르쳐라." 이 말이 여의도 공원을 넘어 증권가로 넘어가면 "도박을 끊게 하려면 마약을 가르치고, 마약을 끊게 하려면 주식을 가르쳐라"로 바뀐다고 한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중독은 게임과 도박에만 있는 게 아니다. '중독'에 관한 보다 폭 넓고 진지한 논의가 될 때 주장의 선의가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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