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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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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회고록 '나의 회상, 모로 누운 돌부처' <210>

인혁당

1975년 2월 동아일보에 발표된 '고행… 1974'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어둠속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건너편 옥사 철창 너머에 녹슨
시뻘건 어둠
어둠속에 웅크린 부릅뜬 두 눈
아 저 침묵이 부른다
가래끓는 숨소리가 나를 부른다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날
지붕위 비둘기울음에 몇번이고 끊기며
몇번이고 몇번이고
열쇠소리 나팔소리 발자국소리에 끊기며
끝없이 부른다
철창에 걸린 피묻은
낡은 속옷이, 숱한 밤 지하실의
몸부림치던 하얀 넋
찢어진 육신의 모든 외침이

고개를 저어
아아 고개를 저어
저 잔잔한 침묵이 나를 부른다
내 피를 부른다
거절하라고
잿빛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날
저 시뻘건 시뻘건 육신의 어둠속에서
부릅뜬 저 두 눈이.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어느 날 누군가 가래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나는 뼁끼통(감방 속의 변소)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큰소리로 물었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하재완입니더."
"하재완이 누굽니까" 하고 나는 물었죠. "인혁당입니더" 하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아항, 그래요!"
4 상(四上) 15방에 있던 나와 4하(四下) 17방에 있던 하재완 씨 사이의'통방'(通房·재소자들이 창을 통해 서로 큰소리로 교도관 몰래 대화하는 짓)이 시작되었죠.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 하고 나는 물었죠. "물론 가짜입니더" 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 하고 나는 물었죠. "고문 때문이지러" 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죠.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 버리고 부서져 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저런 쯧쯧" 하고 내가 혀를 차는데, "즈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 달라고 합디더" 하고 하씨는 덧붙이더군요.
"아항, 그래요!"

그 뒤 7월 언젠가'진찰'(구치소 내의 의무과 의사가 재소자들을 감방에서 꺼내어 줄줄이 관구실 앞에 앉혀놓고 진찰하는 일과) 받으러 나가 차례를 기다리며 쭈그리고 앉았는데, 근처 딴 줄에 앉아 있던 키가 작고 양 다리 사이가 벌어지고, 약간 고수머리에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고, 왕년에 주먹깨나 썼을 것 같은 사람이 나를 툭 치며 "김지하 씨지예" 하고 묻더군요. "그렇소만 댁은 뉘시유" 하고 내가 묻자, 그 사람은"지가 하재완입니더" 하고 오른 손 엄지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지 않겠어요.
"아항, 그래요!"

이렇게 해서 잠깐 만난 실물 하재완 씨는 지난번 통방 때와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교도관 눈치 열심히 보아가며 낮고 빠른 소리로 내게 말해주더군요.

마치 지옥에서 백년지기를 만난 듯 내 어깨를 꽉 끌어안고, 그러나 내 귀에는 마치 한(恨)이 맺힌 귀곡성(鬼哭聲)처럼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그 가래 끓는 숨소리와 함께 열심히, 열심히.

<사진>

또 그 무렵 어느날인가 출정하다 한 사람이 나에게 "김지하 씨지요" 하고 묻더군요."네, 그렇습니다만…" 하고 대답하자 "나 이수병이오" 하고 말합디다.
"아하, 그 '만적론'을 쓰신 이수병 씨요?"
"네."
"어떻게 된 겁입니까."
"정말 창피하군요. 이거 아무일도 나라 위해 해보지도 못한 채 이리 끌려들어와 슬기로운 학생운동 똥칠하는 데 어거지 부역(附逆)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미안합니다."
"아항, 그래요!"

나는 법정에서 경북대학교 학생 이강철의 그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나는 인혁당의'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잘 아는 것으로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 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소위 인혁당이라는 것이 조작극이며 고문으로 이루어지는 저들의 전가비도(傳家秘刀)의 결과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 뒤 어느날, 나는 감방 벽에 기대 앉았어요. 한없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끝없는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어요.

"내 피를 부른다
거절하라고
그 어떤 거짓도 거절하라고."


거절하라고? 그래요. 거절이죠. 어둠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빛속에 드러내라고? 거짓을 거절하라고? 그래요. 횔덜린의 시에 있어서의 그 빛의 수수께끼. 그것은 바로 이 거절이었어요. 정말 그래요.

<'월간중앙'과 동시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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