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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거든, 두 눈 빼내어 조선 망국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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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죽거든, 두 눈 빼내어 조선 망국을 보겠습니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 ③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연재 모아보기

4.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 ③

전사(前史)가 없으면 역사가 아니다. 황해감사 김홍욱의 상소가 올라오는 데까지도 전사가 있었다. 효종 5년 대 파란을 일으킨 상소 이전에도 김홍욱(金弘郁)은 효종과 묘한 긴장감을 연출했다. 홍문관 응교로 있을 때 인조의 만장(輓章 추도사)을 썼는데, 그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만장 안에, '어찌 오랑캐를 섬기겠는가', '입을 다문 신하의 죄가 크다'는 말이 들어 있었는데, 효종은 이것이 기롱하고 풍자하는 의도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만장으로 쓰지 못하게 했다. 김홍욱이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효종은 김홍욱의 상소를 받아들인 승정원을 엄하게 힐책하고 김홍욱은 파직시켰다. 동시에 김홍욱을 탄핵하지 않은 대간(사헌부, 사간원)을 나무랬다.(<효종실록>권1 즉위년 8월 25일(임자))

다음 날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은, 김홍욱이 만사를 제대로 짓지는 못했지만 비방하려는 마음은 아니었다며 효종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주역(周易)> 〈함괘(咸卦) 대상(大象)〉에 "군자는 빈 마음으로 남의 말을 받아들인다.[君子以虛受人]"는 말과, 한 문제(漢文帝)는 수레를 멈추고 말을 들었던 사례를 들어, 말이 쓸 만하면 쓰고 쓸 만하지 않으면 버려두면 될 뿐이라고 설득하였다.

효종이 김홍욱을 파직하자 여러 신하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이재(李梓)와 홍처윤(洪處尹)은 김홍욱의 일로 피혐하다가 효종으로부터 고의로 임금을 무시한다는 말을 들었다. 말에 그치지 않았다. 이재와 홍처윤은 그예 파직되었다. 승정원에서는 파직하라는 명령을 거둘 것을 청하였지만, 효종은 "너희들이 나로 하여금 손발을 둘 곳이 없게 하고자 하는가. 서리를 밟을 때가 되면 얼음이 얼 때도 곧 닥친다는 것을 군자가 경계했었으니,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그치지 않았다.

과거와 고시의 거리

2년 뒤, 김홍욱은 홍청 감사(洪淸監司)로 임명되었다. 가끔 조선시대 관료 임명에 대해 의아해하는 분들의 질문을 받는다. 체직, 파직이 잦고, 파직되었던 사람이 얼마 안 있어 다시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아 이상하다는 것이다. 요즘은 해직, 파직 한 번 당하면 공무원이든 회사든 끝인데…….

맞다. 다르다. 조선시대 관료는 나이나 병이 들어 죽거나, 사약을 받지 않는 이상 언제든 관직에 복귀될 가능성이 있다. 사대부는 관료 풀(pool)의 개념이다. 물론 과거에 급제해야 한다. 과거에 급제한다는 것은 '출세(出世)', 세상에 나간다는 의미도 되고, 양반(兩班)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현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등이 신분 상승을 보장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신분 유지와 신분 상승의 차이. 이것이 같은 관료제이면서도 조선과 대한민국의 관료제가 서로 다른 역사성을 띠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와 고시가 비슷한 듯하면서도 어떤 역사적 맥락에 놓여있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조선시대에 관직에서 파직되었다는 것은 요즘처럼 상승(보장)되었던 신분이 하락(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은 유지되지만 직책이 없어진 것이었다. 또 파직은 되었어도 관작(官爵), 즉 통정대부, 자의대부 하는 품계는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관작까지 삭탈하는 경우도 있고, 성문 밖으로 내쫓거나 귀양을 보내기도 하는 식으로 처벌 수위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양반이라는 신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관작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학계에서 조선시대의 신분제에 대해 양인-천인 2신분인지, 양반-중인-상민-천인의 4신분인지 논란이 있다. 필자는 양반과 상민은 구분되었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통한 관료 임용에 관한 한.)

대동법의 실무 관료

김홍욱이 2년 만인 효종 2년 10월, 홍청 감사에 복직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관료제 운용에 기인한다. 홍청도는 충청도이다. 인조 때 공청도(公淸道)였는데, 공주목(公州牧)에서 강등되어 공산현(公山縣)이 되면서 공청도도 홍청도(洪淸道)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는 호서 지방에 대동법이 실시될 무렵이었다. 7월에 호서대동법 실시가 결정되었는데, 대동법 실시의 방법과 절차를 놓고 정책 토론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후일 호서지방에 실시될 〈호서대동절목〉, 즉 호서 대동법 시행령 서문에 김육(金堉)은 이렇게 썼다.

"일을 시작하자는 말은 처음 내가 꺼냈지만, 여러 공(公)들이 적절하게 변통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좌절되어 대동법이 시행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여러 공들 역시 제대로 변통하기는 하였지만, 이는 실로 임금께서 홀로 결단을 내리고 뜻을 확고히 정해 끝내 성사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서 김육이 말한 '여러 공'은 이시방(李時昉), 남선(南銑), 허적(許積), 그리고 김홍욱이었다. 이들은 모두 대동법의 기초인 공납(貢納) 개혁의 전문가였다. 인조 대에 공물 변통의 방법론으로 대동법과 치열하게 경쟁했던 것이 공안개정론이었다. 공안개정은 원래 조선의 전통적인 개혁방식이었다.

▲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이정철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공안(貢案), 즉 공물 장부를 정리하여 액수를 줄여야 백성들에게 혜택이 가기 때문에 공안개정은 시급하고도 실제적인 개혁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특산물 납부를 전세(田稅)로 바꾸는 대동법은 근본적이고 손상익하(損上益下)의 조세공공 정책에 부합하지만 실행에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또 대동법이 실시되더라도 공안이 개정되어야 납세 기준을 정할 수 있으므로 공안개정과 대동법은 취지나 목적이 배치되는 정책이 아니었다.

김홍욱은 원래 공안개정론자였다. 그는 조익(趙翼)에게 편지를 보내 공안개정에 대한 생각을 소상히 설명하기도 했다. 대동법이 이상적이고 현실성이 결여되었다고 보았는데, 바로 필자가 위에서 설명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차츰 대동법이 실현될 수 있는 환경이 되자, 자연스럽게 김홍욱은 대동법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김육은 호서대동법을 성공시키기 위해 김홍욱이 충청감사(홍청감사)에 임명되도록 애썼다. 김홍욱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17세에 아버지를 따라 충청우도 서산에 갔다. 그리고 34세 되어 문과에 급제할 때까지 서산에 살았기 때문에 지역 실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정철,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역사비평사 펴냄) 407~411쪽)

황해 감사의 직언

대대적인 개혁이었기 때문에 김홍욱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도 조정에서는 시행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정언 이만웅(李萬雄)이 시행과정의 난맥상을 지적하자, 허적이 반박에 나서기도 하였다. (<효종실록>권8 3년 4월 1일(임인), 10일(신해)) 충청도에서 1년을 지낸 김홍욱은 다시 조정에 국왕의 비서인 승지로 돌아왔다. 들어와서 한 말이 다음과 같았다.

"성상께서는 화가 나시면 발언할 때 실정에 지나치는 경우가 많으십니다. 옥의 흠은 오히려 갈아서 없앨 수 있지만, 말의 흠은 고칠 수 없습니다. 상께서는 분노에 대하여 더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효종실록>권9, 3년 10월 23일(신유))

효종이 지나치게 화를 잘 내는 성격인줄 학주(鶴洲) 김홍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효종 5년, 재해가 계속되자 의견을 구하는 효종의 교서에 부응하여 상소를 올렸다. 학주는 당시 황해 감사로 나가 있었다.

"조정 신하들이 잇달아 소를 올렸는데 실제로 채택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한갓 형식적인 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고서 하늘의 견책에 응하여 재변이 그치기를 기대한다면 어림없습니다.

지난달에는 고금에 없이 한양에 홍수가 나서 물에 휩쓸려 죽은 도성 백성이 매우 많고 대궐 안에서 도랑물이 넘쳐 사람이 죽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또 수백 리 밖은 홍수와 가뭄이 각각이어서 송도 서쪽의 황해도 지방은 가뭄이 극심하여 5월 보름 이후로 비가 내리지 않아 모든 곡식이 다 타죽었고 초목은 누렇게 낙엽이 졌습니다. 농촌과 해변이 더욱 참혹하여 농민들이 울부짖으며 목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강(姜)의 옥사가 가장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당시 궁중 상하가 화락하고 편안하였으니 강(姜)이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렇게 불측한 큰 역모를 했겠습니까. 만약 그때는 강의 짓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궁중에서의 저주가 어떤 일들이기에 아무나의 손에서 행해질 수 있는 것입니까. 신은 여기에 대해서 크게 의심을 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역적 조(趙 인조의 후궁 조귀인)는 안에서 날조하고, 역적 김자점(金自點)은 밖에서 조작해내어 견강부회로 옥사를 일으켜 끝내는 사사(賜死)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고 온 가문의 노소를 남김없이 주륙하였으니 아, 참혹합니다. 소현의 두 자식의 죽음도 모두가 자점이 빚어낸 것입니다.

아, 한 사람의 지어미가 품은 원한에도 3년간 가뭄이 들었고 외로운 신하의 통곡에도 5월에 서리가 내렸습니다. 지금 강(姜)의 일문(一門)이 죽음을 당한 것은 단지 한 지어미의 원한이 맺힌 정도일 뿐만이 아니고 외로운 신하가 통곡한 것보다도 더 하니 화기(和氣)를 손상시켜 재앙을 불러 온 것이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감히 평소에 개탄하던 점을 진달하여 성상께서 한 번 깨달으시기를 기대하옵니다."

'한 사람의 지어미가 품은 원한에도 3년간 가뭄이 들었고 외로운 신하의 통곡에도 5월에 서리가 내렸다'는 말은 원통함이 극에 달하면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천재(天災)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중국 한(漢)나라 때 한 효부(孝婦)는 자식도 없이 일찍 과부가 되어 홀시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셨다. 그 시어머니는 자기가 살아 있으면 과부 며느리가 절대로 개가(改嫁)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이렇게 되자 그 딸은 효부가 자기 친정어머니를 죽였다고 관에 고발하였다. 효부는 결국 원한을 품고 옥사하자, 그 고을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다고 한다.(<한서(漢書)> 〈우정국전(于定國傳)>)

5월에 서리가 내렸다는 고사는, "추연(鄒衍)이 충성을 다해 연왕(燕王)을 섬겼는데, 간신(奸臣)들의 참소를 받고 옥에 갇히게 되니 원통하여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5월인데도 서리가 내렸다."는 데서 나왔다.(<회남자(淮南子)>)

학주 상소의 핵심은, 재해가 극심하다, 강빈의 역옥은 억울하다, 소현의 아들 둘도 조귀인과 김자점의 소행으로 죽었다, 이런 억울함을 풀어야 재해가 멎을 것이다, 라는 말이었다. 구언응지상소(求言應旨上疏)였다. 그러나 효종은 벼락같이 화를 냈다. 효종은 강빈의 일을 언급하면 역률로 다스리겠다는 효종 3년의 전교를 승정원에 상기시켰다. 효종은 '김홍욱의 상소를 보니 모르는 사이에 모골이 송연해진다'며, 즉각 후임자를 뽑아 황해 감사로 보내고, 의금부 도사에게 학주를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관찰사의 장살(杖殺)

며칠 뒤 효종은 창덕궁 인정문에서 학주를 친국하였다. 학주는 평소 의심스럽게 생각하던 일을 진달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효종은 빨리 형신(刑訊)을 가하라고 다그쳤다. 영의정 김육(金堉),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이 나서서, 김홍욱의 상소가 조리가 없고 괴이하지만 역률(逆律)로 논하게 되면 덕에 손상이 될까 염려된다며 만류했다.

그러나 효종은 '후세에 비록 악명이 있더라도 내가 책임질 것'이라며 상관하지 말라고 입을 막았다. 이런 말이 군주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 역시 학주를 변론하다가 효종으로부터 '경은 병을 칭탁하고 들어가더니 오늘은 홍욱을 구원하려고 왔는가? 어찌 속히 물러가지 않는가.'라고 면박을 들었다. 대사간 유경창(柳慶昌)은 효종의 마음을 돌리려다 물러났고, 대사헌 오준(吳竣)은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효종실록>권13 5년 7월 13일(경자))

곤장을 견디지 못한 학주는, 대신과 삼사를 부르면서 '어찌하여 할 말을 말하지 않는가'라고 꾸짖었다. 아울러 효종에게 "옛날부터 말한 자를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습니까? 신은 용방(龍逄)이나 비간(比干)과 더불어 지하에서 함께 놀겠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눈은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 두면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보겠습니다."라고 절규했다. 용방과 비간은 각각 하나라 걸왕과 은나라 주왕 때 충신으로, 걸과 주의 무도함을 비판하다가 살해된 인물들이었다.

다음 날에도 국문이 계속되었고, 그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15일을 쉬고, 17일 다시 궐정에서 학주를 국문하였다. 학주는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효종은 "김홍욱이 이미 죽었으나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그의 자제 및 그와 가까운 친속들은 대대로 조정 반열에 서지 못하게 하라."라고 전교하였다.

여진(餘震)의 끝

<맹자(孟子)>는 철저한 민본사상 때문인지 송나라 성리학자들이 '4서(書)'로 집어넣기 전까지 '경(經)'이 아니었다. 또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조선 학자들의 처신과 기개를 이해라기 위해서는 맹자라는 인물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선 학자, 관료들의 모델이 맹자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맹자는 대장부를 추구했다. 대장부란 다음과 같은 사람이다.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길을 간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리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행한다. 돈이나 귀함이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가난과 천대가 절개를 바꾸게 하지 못하며, 위세과 권력이 지조를 굽히게 할 수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을 대장부라 부른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志, 與民由之; 不得志, 獨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학주가 곤장을 맞다가 세상을 뜬 뒤에서 공론(公論)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제는 강빈 옥사가 아니라 학주를 장살한 효종의 처사에 비판이 쏟아졌다. 한 순간의 판단 잘못이 효종을 궁지에 몰기 시작했다. 부사직(副司直) 정두경(鄭斗卿)이 상소하여 자손까지 금고(禁錮)한 것도 과도하다고 비판했다. 호조판서 허적도 김홍욱의 자손을 폐고하라는 명을 거두라고 청하였다.

결국 사림의 여망을 저버릴 수 없었던 효종은 효종 8년 7월 우선 송준길을 조정으로 불러 국정을 논의함으로써 정국을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어머니 3년상 중이었던 송시열은 이보다 1년 늦은 9년 7월에 조정에 들어왔다. 그리고 양송을 중심으로 한 청류 사림들의 정국 주도가 이루어지던 무렵에 우리가 주목하는 효종과 송시열의 기해독대가 있었다. 나중에 공개된 〈악대설화(幄對說話)〉에 따르면 기해독대에서 논의되었던 사안은, 북벌(北伐),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 강빈 옥사의 신원, 학주 김홍욱의 복작이었다.(<국역 송자대전>ⅩⅤ(고전국역총서222) 송서습유권7 잡저, 〈악대설화〉 1~17쪽)

효종 자신이 강빈 사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점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송시열이 인조의 전교를 인용하면서 전교에서도 저주와 독약을 넣은 혐의를 두면서 '필시(必是)'라고 표현하여 사실을 억측하여 판단한 것이 아니냐고 지적하였을 때, 효종도 엉겁결에 놀라 그런 점을 시인하고 말았다. 송시열은 인조의 억단이 송(宋)나라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모함할 때 이용했던 '(사실인지 아닌지 증거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그럴 수도 있다[莫須有]'는 논법과 마찬가지라며 강빈 옥사가 모함이라고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역모임이 틀림없다는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마무리된다. 이로써 숙종 44년(1718) 강빈이 민회빈(愍懷嬪)이라는 칭호로 위호가 회복될 때까지 강빈 신원은 유보되었다.

그러나 김홍욱의 복작에 대한 송시열의 태도는 분명하였다. 구언응지상소에 대한 처벌을 문제 삼으며 그런 행동은 마음속에 꺼리는 것이 있는 사람의 태도라고 지적하여 효종의 시인을 받았다. 이때의 합의는, 독대가 있은 며칠 뒤 송시열의 제안과 송준길·정유성의 재청에 이어 좌의정 심지원이 동의하면서 효종의 허락을 받는 절차를 거쳐 김홍욱의 복작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효종실록>권21, 10년 3월 27일(무오))

근래에 드문 일

다시 학주 김홍욱이 장살된 이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그 무렵 효종의 정국 주도를 어렵게 만들었던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더 있었다. 첫째는 효종이 왕권 강화와 국방 정비 차원에서 추진한 군비의 증강은 생각처럼 공론의 지지나 재정적인 뒷받침을 얻지 못하였다. 어영청(御營廳) 증액이 김육의 반대로 벽에 부딪히거나, 영장(營將) 복설(復設)에 대한 신료들의 비판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원로대신 이경석, 대사성 김익희(金益熙) 등은 군병(軍兵)보다 안민(安民)이 급선무라고 상소를 올리는 등 효종의 군사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비등해갔다.

둘째, 효종 5년 이후 계속되는 흉년도 민심의 이반을 부추겼고, 셋째, 노비추쇄와 같은 군정(軍丁) 확보 노력도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조정랑이었던 문곡 김수항은 효종의 군사정책, 노비추쇄 추진을 비판하는 여덟 조항의 폐단을 진달하면서, 아울러 김홍욱 장살 사건의 부당성을 간곡하게 상소하였다.

"김홍욱이 풍질(風疾)을 앓아 심성을 잃어 물을 밟고 불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죄가 있건 없건 본디 논할 것도 못되겠으나,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려 흉역(兇逆)을 넌지시 감쌌다고 한다면 신은 결코 그것이 본래 실정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김홍욱은 두 조정의 은총을 입어 근밀(近密)에 출입한 것이 30년이 넘습니다. 역적 강씨(姜氏)의 친족도 아니거니와 역적 강씨의 사은(私恩)도 없었던 것을 나라 사람이 다 아는 바입니다.

김홍욱도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은혜와 의리를 전혀 잊고 차마 사람의 도리에 없는 일을 하였겠습니까. 만약 김홍욱이 평소에 간사한 마음을 품고 일찍이 사사로이 붙은 일이 있어서 감히 나중에 갚을 생각이었다고 한다면, 소인이 이익을 탐함은 오직 자신을 위한 생각인지라 얼마 안 가 해로움이 있을 게 뻔하고 결코 뒷날의 복이 없을 경우에는 그 간사함이 심할수록 이런 일을 더욱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깝게도 전하의 밝으심으로 일찍이 이러한 사정을 굽어 살피지 못하셨습니다." (<효종실록>권16 7년 2월 27일(병자))


문곡은 김홍욱이 생각한 바를 진달한 것은 다만 직언(直言)을 해도 죄를 주지 않는다는 교서를 믿었던 것일 뿐인데 효종이 그런 사람을 죽이고 자손까지 금고하였다고 통박했다. 또한 김홍욱의 죽음은 조정의 동료들로부터 민간의 백성과 천인들까지도 슬퍼하고 가엾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며 여론을 전하였다. 문곡은 김홍욱 장살은 물론이고, 장살의 부당성을 지적했던 홍우원(洪宇遠)을 내친 일도 비판하였다.

한 세대 선배였던 학주 김홍욱(1602-1654)마저도 장살 당하는 판국에 문곡의 상소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지지를 상실하고 있었기도 했고 처사를 반성하고 있었던 효종은 문곡의 상소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근래에 드문 일'이라고 평하였다.

참고. 학주 김홍욱은 <세한도(歲寒圖)>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7대조이다. 추사도 사사로움이 가득한 조정 권신들의 탄압으로 제주로 유배되었다. 추사 시기가 되면 경주(慶州) 김문(金門)도 처신과 이해가 달라지지만, 경주 김문이 조선의 명문이 된 것은 학주가 바른 말을 하다가 장살된 뒤부터의 일이다.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학주 김홍욱은 추사의 7대조이다. 경주 김문은 학주 이후부터 조선의 명문이 되었다. 바른 말을 하다가 죽은 인물에 대한 추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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