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학을 공부했고, 원소를 좋아하며, 주기율표에 여전히 신기해하고, 주기율표를 만든 멘델레예프를 사랑한다. 정식 출간은 되지 않았지만 멘델레예프에 관해 쓴 짧은 책이 잡지의 부록으로 나간 적도 있고, 초등학생용 과학책 시리즈물의 <원소> 편을 쓴 적도 있다. 몇몇 출판사에서 원소에 관한 본격적인 책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고사했다. <원소의 왕국 : 피터 앳킨스가 들려주는 화학 원소 이야기>(피터 앳킨스 지음, 김동광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주기율표>(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돌베개 펴냄), <세상을 바꾼 독약 한 방울 : 죽음을 부르는 독극물의 화학사>(전2권, 존 엠슬리 지음,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라진 스푼 : 주기율표에 얽힌 광기와 사랑, 그리고 세계사>(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해나무 펴냄)까지 나왔는데 원소에 대해 더 이상 쓸 말이 뭐가 있단 말인가? 웬걸! 또 있다. 화학을 전공한 과학저술가가 쓴 <원소의 세계사 : 주기율표에 숨겨진 기상천외하고 유쾌한 비밀들>(휴 앨더시 윌리엄스 지음, 김정혜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펴냄)가 그것이다.
<원소의 세계사>을 펼치면서 받은 첫 인상은 <사라진 스푼>과 매우 비슷한 책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에 관한 인상은 첫 3초에 결정된다지만, 책은 다르다. 한참 읽은 후에야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라진 스푼>은 원소를 빙자하여 생물학에서 천문학에 이르는 자연과학 전반을 다루는 책이라면 <원소의 세계사>는 원소를 빙자하여 세상 이야기를 하는 문화사 책이다.
▲ <원소의 세계사>(휴 앨더시 윌리엄스 지음, 김정혜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펴냄). ⓒ알에이치코리아 |
"원소들은 영원했다. 즉 빅뱅이 있은 직후에 만들어졌고, 인류가 멸망한 후에도 지구에 머물 것이며,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물론이고 지구 자체가 죽음의 행성이 된 이후에도 존재를 이어갈 것이다. (…) 모든 일은 역사에서 일어나고, 지리학에서 고유한 위치를 차지하며,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원소들로만 물질적으로 구성된 것이기도 하다. 동아프리카 대지구내, 금란의 영역, 뉴턴의 프리즘, '모나리자' 등 모든 것이 원소 없이는 불가능하다." (13쪽)
원소는 세상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세계사와 문화사 역사 원소로 이뤄져 있을 게 아닌가, 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원소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재구성한다면 물-불-공기-흙이라는 상투적인 큰 제목을 붙일 수도 있으련만, 그는 힘-불-기술-아름다움-흙이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문화사를 꾸린다.
'힘'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원소는 뭘까? 내가 천박(친박이 아니다.)해서인지는 몰라도 '힘'이라는 단어는 '금'이라는 원소와 연결된다.
<사라진 스푼>은 '돈으로 쓰이는 원소들'이라는 챕터에서 아연(Zn), 금(Au), 텔레늄(Te), 유로퓸(Eu), 알루미늄(Al)을 다뤘다. 그런데 <원소의 세계사>는 '힘'이라는 챕터에서 금(Au), 백금(Pt), 철(Fe), 플루토늄(Pu)과 수은(Hg)을 다룬다. 유럽인들은 금에 대한 욕망으로 신대륙을 찾았고, 중국의 진시황은 불로장생의 영험을 믿고 수은(Hg)을 찾았던 게 아닌가? <해리포터>에서도 덤블도어 교장 선생님과 볼드모트가 금을 만들고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들 수 있다는 마법사의 돌을 두고서 다투지 않는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로마제국은 청동, 스페인은 황금, 영국은 철과 석탄을 소유함으로써 제국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저자는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금 대신 플루토늄을 이야기한다. 20세기 초강대국 사이의 균형은 우라늄을 사용하는 핵무기와 우라늄으로 만드는 플루토늄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이다. 뭐, 상식이다. 평소에 원소와 관련지어 생각해 본 바가 있는 것은 아니어도, 듣고 보면 빤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할 즈음마다 저자는 재미있는 요소를 던져준다.
"각 원소는 하나 혹은 두 글자로 줄여진 원소기호를 가진다. 표준적이 규칙에 따르면 플루토늄의 기호는 Pl이 되어야 했지만 우리는 Pu를 선택챘다."고 그(시보그)가 설명했다. P. U.(오줌, 윽!-옮긴이)는 예로부터 미국 영어에서 악취를 뜻하는 비속어이고, 따라서 불쾌한 느낌을 준다. 우리의 작은 장난이 비난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비난은커녕 장난을 알아채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102쪽)
▲ <사라진 스푼>(샘 킨 지음, 이충호 옮김, 해나무 펴냄). ⓒ해나무 |
지표면의 매장량은 백금이 황금보다 열 배나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백금의 녹는점이 철보다도 훨씬 높고, 심지어 숯불로 만들 수 있는 최고 온도보다 훨씬 높은 덕택에 예전에는 제력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백금이 가장 가치 있는 금속이라는 인식이 퍼졌고, 실제로 백금이 더 비싸다. 그래서 '골든디스크'보다 더 많이 팔린 음반을 플래티넘 디스크라고 한다.
<원소의 세계사>와 <사라진 스푼>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원소의 세계사>는 확실히 문화사에 가깝고, <사라진 스푼>은 상대적으로 과학책의 성격을 더 띤다. 예를 들어, 유로퓸(Eu)에 관한 설명을 들어 보겠다. 유럽은행은 유로화를 제조할 때 위조지폐를 분간하기 위해 유로퓸이 포함된 형광제를 썼다. 물론 이름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사람들이 정말로 궁금했던 것은 이런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많은 잉크 중에 하필이면 왜 유로퓸이 포함된 잉크가 선택됐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째 됐건 이것은 결국 유럽연합의 이름으로 발행되는 새로운 지폐가 이것과 동일한 아이디어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화학원소를 포함함으로써 교묘하게 강화되는 사명을 보유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원소의 세계사> 481쪽)
"화학자들은 유로퓸 염료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안다. 하나는 분자의 대부분을 이루는 수용기, 즉 안테나 부분이다. 안테나는 들어오는 빛 에너지를 붙잡아 그것을 유로퓸이 흡수할 수 있는 진동 에너지로 바꾸어 그 에너지를 분자 끝부분으로 전달한다. 거기서 유로퓸의 전자들이 에너지를 받아 더 높은 에너지 준위로 도약한다. 그러나 전자들이 도약을 했다가 추락하면서 빛을 방출하기 직전에 들어온 에너지 중 일부가 도로 안테나 쪽으로 돌아간다." (<사라진 스푼> 481쪽)
그렇다. '원소'에 관한 또 하나의 번듯한 책을 가지게 된 것이다. 모두 읽자. 건강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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