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인 젊은이들의 문화 공간인 이른바 '홍대입구'가 어떻게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지배하는 소비 공간으로 변모되었을까? 문화와 예술의 명소를 만든 주역인 그들은 정작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변두리로 내몰리고 있다. 디지털 혁명으로 시작된 음악 파일의 공유라는 사태는 어떻게 애플 아이튠즈나 국내 이동통신 회사의 음악 사이트로 매출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을까? 이제 가수들은 생계를 위해 오프라인 공연에 몰두하거나 본업이 아닌 예능에 더 집중한다.
디지털 세상이 되면 구(舊)도시, 산업경제가 창조도시(뉴타운), 창조경제로 변모해 경쟁과 착취에서 벗어나 협력과 공유의 세상이 될 거라는 유토피아적 환상이 10여 년 이상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디지털 세상에 우글거리는 새로운 괴물의 유형과 새로운 착취의 형태를 고발하는 동물우화집이 나타났다. 파스퀴넬리는 <동물혼(Animal Spirits)>(서창현 옮김, 갈무리 펴냄)이라는 책에서 '창조도시'와 '창조경제' 및 카피레프트로 대표되는 '디지털 공유지'에 기반을 둔 디지털 유토피아론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서울의 뉴타운(유럽의 창조도시)이 원래 살고 있던 주민들을 몰아낸 것을 우리는 뉴스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이런 일이 1980년대 초반, 뉴욕 맨해튼의 동부 저지대에서 동일하게 일어났다. 저자는 이를 상세히 설명한다. 상업용 부동산으로는 임대가 나가지 않자, 집주인들이 건물을 예술가들에게 5년 기한으로 값싸게 빌려줬다. 이는 이 지역을 독특한 풍취와 고급스러운 문화 거리로 만들려는 '젠트리피케이션' 전략의 일환이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특색을 앞세워 값싼 지역이 인기 있는 명소로 변모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서울에서는 젊은이들의 예술문화 거리인 홍대입구와 고풍스러운 문화 거리인 북촌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5년 뒤 그 지역이 급속도로 예술적 아취가 풍기는 유명한 장소가 되면서 집주인들은 400%, 600%, 심지어 1,000%까지 집세 인상을 요구했다. 이 지역을 젠트리피케이션 하는 데 돌격대 역할을 했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과업(?)을 수행한 대가인 비싼 임대료에 의해 쫓겨났다. 이처럼 금융 버블의 원류인 부동산 사업이 고안한 '창조도시'라는 고급 공간화 전략은 투기적 고수익을 얻기 위해 예술계와 문화산업마저도 착취한다.
신도시와 뉴타운으로 대변되는 우리나라의 창조도시들은 고급 공간화를 동반한다. 창조도시에서 부동산은 상징경제 또는 지식경제에 의해 촉발된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이다. 여기에 기생하는 존재자가 은밀하게 살고 있다. 홍대입구는 일군의 창조계급인 미술가와 음악인들이 문화적 아우라를 만들고 여기에 창조적인 소상인들이 일군 독특한 카페들이 어울리는 자생적인 문화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성의 이미지는 부동산 사업가와 대기업 프랜차이즈 지점에 의한 독점 지대(地代)로 변형되는 집단 상징자본이나 문화자본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자본을 창조한 창조계급은 역설적으로 높아진 임대료로 고통을 받고 더 변두리로 쫓겨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창조계급'이라는 허울적인 이름으로 격찬을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프리랜서나 자영업자라는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프레카리아트)일 뿐이다.
저자에 의하면 '홍대입구'라는 브랜드나 디지털 음악 사이트는 "다수가 생산하지만 소수가 착취하는 '공감각적인 환상'이다." 다시 말해서 정보통신혁명을 통해 출현한 디지털 신경제와 지식사회의 환상 유토피아라는 공간에 동물혼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동물혼>은 디지털 공유지가 새로운 정치경제적 자율 공간이라고 보는 맹목적 찬양에 대한 건전한 회의론이다. 이에 의하면 세 마리의 괴물과 같은 동물이 나타났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공유지에는 대기업이라는 기생체가 거주하고 있다. 홍대입구와 같은 창조도시 배후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히드라가 기생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 포르노의 미디어스케이프(매체를 의미하는 미디어와 경치를 의미하는 랜드스케이프의 합성어)를 지배하는 권력과 욕망이라는 두 개의 머리를 지닌 독수리가 따라다닌다.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 코뮌주의가 제시한 인지 자본주의란?
▲ <동물혼>(맛떼오 파스퀴넬리 지음, 서창현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
자율주의 노선의 대표주자는 <제국>과 <다중>으로 유명한 네그리이다. 이러한 자율주의의 철학적인 기초는 반(反)변증법을 대표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이다. 이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입장에서 저자는 포스트모던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인 <시뮬라시옹>으로 유명한 장 보드리야르와 동시에 이를 비판하는 변증법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을 언어 물신주의라고 비판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언어적 비판에 머물러 실질적인 착취의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의 부재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서구의 불안에 대응하는 일종의 신경안정제(디아제팜)라고 규정한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이데올로기적인 언어보다는 "네트워크 사회와 지식(인지) 생산"의 어두운 일면인 투기적이고 기생적인 새로운 지대(렌트)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분석을 지칭하기 위해 '인지(지식)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조어를 활용한다.
인지(認知)란 아는 과정과 앎이라는 결과물을 의미하므로 지식과 비슷한 말이다. 인지 자본주의 이론(최초로 도입한 학자는 엔조 룰라니와 안토넬라 코르사니)은 지식을 창조하는 경제에 새로운 형태의 착취가 기생하고 있음을 밝히기 위해 가치화 과정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한다.
요즘 박근혜가 정부가 주창하는 '창조경제'는 원래 영국 노동당 당수인 토니 블레어가 제시한 개념이다. 창조경제란 지식경제, 문화경제, 상징경제, 네트워크경제, 증여경제, 신경제라고 불린다. 이러한 밝은 이름에도 불구하고 창조경제에는 물질적이면서 더러운 대응 부분이 존재한다. 음악 파일과 아이튠즈, 파일 공유 네트워크와 초고속 인터넷 회사, 무료 음악과 라이브 콘서트, 바르셀로나 생활양식(유럽 창조도시의 대표적인 사례)과 부동산 투기, 예술계와 젠트리피케이션, 세계적 브랜드와 노동착취 공장의 경제적 결합이 그것이다. 실제로 어두운 영역에서 실질 화폐가 거래된다. 어두운 영역이 밝은 영역에 기생하며 이를 착취한다.
저자가 제시한 정보화시대, 지식사회, 문화산업(한류), 창조경제, 창조도시(신도시와 뉴타운)의 우울한 인지 자본주의 분석은 새로운 시대의 가치화 과정에 관한 새로운 버전의 '정치경제학 비판'(네그리의 유명한 책 제목대로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이다.
어떻게 디지털 세상에서 렌트(지대, 임대료)가 지배하고 있는가?
디지털 공유주의는 협력을 강조하지만 저자는 지식 경제에서 여전히 경쟁이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에게 잉여가치는 "에너지의 초과 및 그것의 착취와 향유(즐김)를 서술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잉여가치의 착취 형태는 마르크스가 분석한 것처럼 산업경제에서는 이윤(profit)이었다. 그러나 예전의 농경사회에서 귀족의 주요한 수입원이던 지대 또는 렌트(rent)가 창조경제에서는 다시 잉여가치의 새로운 착취 형태로 나타난다. 렌트에는 항상 대가가 따른다. 지대란 렌트 비용, 임대료, 접속료 등을 의미한다. 지대는 새로운 이윤이다. 즉, 디지털 경제에서는 공장이라는 생산 공간에서보다 사회적 삶과 연관된 전월세나 주택융자와 같은 물질적인 공간에 적용된 지대에 의해 착취와 축적이 이루어진다.
오늘날 우리는 집을 렌트하고 자동차를 렌트하고 정수기를 렌트하고 인터넷을 렌트하고 휴대폰도 렌트하고 심지어 애인도 렌트한다. 이런 식으로 렌트(지대)는 공유지를 쉽게 착취의 구조로 바꾸어 놓는 마법의 지팡이이다. 자본가는 소유하고 서민과 노동자는 렌트한다. 이 렌트는 은밀한 기생의 방식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류가 매트릭스의 환상에 빠져 자신의 생체에너지가 그 환상의 공급원으로 착취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듯이.
이렇게 저자의 동물우화집은 영화 <매트릭스>에 비견될 수 있다.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창조한 컴퓨터 연결망은 기생적인 존재자이다. 지적인 기계들이 인간을 통제하면서 인간을 에너지 자원으로 착취한다. 저자는 <매트릭스>의 이러한 플롯을 활용해서 디지털 세계가 인간들에게 들러붙어 기생하는 기생체에 의해 주도됨을 폭로한다.
저자는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세르를 본받아 "기생체가 기생체들에 기생한다"고 선언한다. 유기체 각자는 다른 유기체의 기생체이다. 인간은 자연의 기생체이다.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일종의 기생체 체계이다. 여기에서 저자의 주 관심사는 모든 생활의 형태에 특유한 잉여(surplus)의 축적과 추출이다. 저자는 기생체를 순수 매체성의 요소라기보다는 축적의 엔진으로 도입한다. 그에 따르면 "리비도, 주목(관심), 정보, 데이터, 전기라는 온갖 형태로 잉여가치의 축적과 그것의 단절 지점이 자유 협력과 공짜 문화에 대한 모든 담론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미디어 문화의 정치적 초점이 되어야 한다."
물론 과학기술에 의해 추동된 모든 형태의 집단지성과 창조적인 공유는 프리웨어나 카피레프트 운동처럼 잉여가치의 '자본주의적 축적'에 대한 실재적인 위험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디지털 유토피아론이 간과하는 것은 비(非)물질적인 층위의 너머와 아래에 존재하면서 착취당하는 물질적인 피(彼)기생체이다. 달리 말하면 가상공간이란 인간 신체들 너머에 존재하면서 인간에게 들러붙어 기생하는 디지털 기생체이다.
창조경제는 창조적 공유지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구조이다
저자에 의하면 "하지만 기생체는 흡혈귀가 아니라 공생자이다." 기생체란 직접적인 착취와 이윤 강탈이 아닌 경제적 지대(임대료)가 지배적인 착취 형태인 기생적인 존재자이다. 메트로폴리스에서 기생체란 창조도시, 혁신도시, 신도시라는 과대광고를 통한 부동산 투기를 가리킨다. 또한 미디어스케이프에서는 물질적 기반시설과 온라인 공간 독점의 렌트로 증식하는 기생체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KT, SKT, 구글, 네이버, 종편 등이 그것이다.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는 독점적인 하드웨어를 판매하기 위해 공짜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는 기생체가 있다. 지식경제에서는 지적 재산 소득이라는 기생적 렌트를 이용하는 기생체가 살고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집단적 행동에 관한 증권 거래 투기를 주도한 기생체가 번성하고 있다. 이러한 투기의 대상이 소위 금융파생상품이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 위기의 원인이 바로 부동산 거래의 금융파생상품에 대한 유명한 금융회사들의 과도한 투기이다. 이는 기생체의 과욕(過慾)이 숙주를 죽이는 화를 불러온 격이다.
'지식'이라는 물건(인지 대상)의 생애 주기는 발명, 유포, 모방, 경쟁, 헤게모니, 엔트로피의 과정에 직면한다. 한마디로 "정보는 비(非)경쟁적이지 않다." 지식 공유와 디지털 공유지가 비(非)경쟁 사회가 아닌 임시직 노동자, 프리랜서, 활동가들의 노동 조건에 걸쳐 경쟁과 사회적 고통으로 전유(專有)되고 있다. 피터 드러커의 <변화리더의 조건>(이재규 옮김, 청림출판 펴냄)과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원창엽 옮김, 홍신문화사 펴냄)에서의 환호성이 간과한 측면이 있다. 즉, 정보통신 혁명으로 인해 산업 사회가 지식 사회로 바뀌었지만, 이러한 제3의 물결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본의 회전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하여 극히 투기적인 금융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조경제란 이러한 착취와 고통을 강요하는 금융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경제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창조경제는 경제성장과 무관하고, 필요한 부의 재분배 없이 경제적인 지대 및 투기와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다중들이여, 창조적으로 사보타주하라!
케인스는 경제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충동을 동물혼(야생적 충동)으로 규정했다. 동물혼의 개념은 수학적인 계산과 같은 합리적인 능력과 달리 자발적인 낙관주의이자 자발적으로 행동하려는 충동이다. 그는 이를 조절하고 제어해야 하는 부정적인 힘으로 인식했다. 반면에 저자는 여기서 다중의 이미지를 이끌어낸다. '동물혼'은 역사를 추진하는 살아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선하지 않다. 인간은 원래 동물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라는 집단적 주체의 토대는 생물학적이고 동물학적인 것이다. 폭력적인 본능과 합리적인 힘들로 이루어진 욕망의 양가성(권력과 힘의 양가성)을 대표하는 머리 둘 달린 독수리가 정치 제도들의 기초적인 틀인 반면에 공유지의 기생체는 경제와 과학기술의 비대칭성을 위한 분자적인 모델이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이 시대의 진보에게 "이제 인간이 착하다는 생각을 버리자!"고 외친다. 그에게 프리(공짜) 소프트웨어는 비(非)물질 내전, 다시 말해서 디지털 동족상잔의 증상이다. 본능적 충동들이 집단적인 언어와 문화를 오염시키면 이 충동은 갈등 속에서 서로에게 소리 지르며 서로를 먹어치우려는 머리들을 가진 갈등적 히드라로 나타난다. 이러한 분열된 상황과 분자적인 삶-정치적인 경쟁에서 출발하여 '사회 공장'들의 통합된 주체를 재구축하는 것은 어려운 과업이다. 그러나 인지자본주의의 배경에서 투사된 유일한 정치적인 주체는 공동적인 것으로서의 다중이다.
세계 자본은 지역적인 저항마저 독점 지대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활용한다. 저자는 이런 점을 밝히기 위해 부르디외의 '문화 자본' 개념을 대도시(메트로폴리스)를 구성하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과정으로 확대하여 만든 하비의 '집단적 상징자본'을 도입한다. 창조계급의 카피레트트 운동과 프리웨어 운동과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적인 상징자본은 세계 금융 자본에 착취당하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비(非)물질적인 착취가 젊은 세대의 88만원 노동자의 일상적인 삶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계급투쟁이 아니라 비(非)물질적인 차원의 내전(內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현대의 '스펙터클 사회'의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투쟁은 비(非)물질적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비(非)물질적인 내전 개념은 현대 상품에 갇혀 있는 사회적 관계의 폭발이다." 이런 투쟁은 기생적인 창조도시, 창조경제에 대한 '다중의 창조적인 사보타주'로부터 시작된다.
언어와 문화는 삶의 기생적 차원의 발명이자 확장이다. 인지(지식)노동의 기생체가 정치적 장(場)에 들어가면 다중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다시 말해서 일반지성을 대항적 주체로 바꾸는 자기조직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새로운 공유지에 대한 가치 축적의 사보타주(태업)가 투기적인 지대(임대료, 접속료)의 익명적이고 비인간적인 차원으로부터 새로운 공유지를 보호하는 행위이다. 저자가 든 사례는 '메트로폴리스 파업'이다. 이는 네그리의 말처럼 노동계급이라는 특수한 일부만이 파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24시간 전체 생활이 중지되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형태의 대항 권력이다. 생산적 사보타주란 다시 자본의 광고 캠페인으로 전락하는 반항의 상상계가 아니라, 자본의 식민화를 불리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상징 자본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지젝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다중'의 비(非)물질적인 내전은 '절대 민주주의'와 '해방의 댄스'에 불과할 뿐 여전히 레닌 식의 '진리의 정치'와 헤겔 식의 '자유의 체제'를 결여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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