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개월을 돌이켜보면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대중적으로 진보연하는 지식인 중에서도 <프레시안>의 협동조합 전환에 냉소적인 반응으로 일관한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프레시안>이 자진해서 망하는 길로 발을 디뎠다"고 악담 아닌 악담을 퍼붓는 이들도 봤으니 더 말해 뭣하랴.
이들이 실패를 예단한 이유는 간단하다. 생활협동조합처럼 유기농 먹을거리 같은 유형의 대가가 없는 상황에서, 누구나 공짜로 접할 수 있는 <프레시안>의 기사에 기꺼이 한 달 1만 원씩의 돈을 지불하려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처음에 3만 원 이상의 출자금까지 내야 하니, 이들에게 <프레시안>의 실패는 불 보듯 뻔했다.
이런 반응의 배후에는 우리의 본질에 대한 강한 확신이 깔려 있다. 우리는 '당근'에 반응하고 '채찍'을 회피하는 '이기적 인간' 혹은 요즘 유행하는 용어로 바꿔서 말하면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라는 인간 본성에 대한 통념이 바로 그것이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실험이 대실패로 끝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통념의 지배를 받고 있다.
▲ <펭귄과 리바이어던>(요차이 벤클러 지음, 이현주 옮김, 반비 펴냄). ⓒ반비 |
책에 소개된 '협력'을 둘러싼 연구 성과는 하나하나 다 흥미롭지만, 특히 인상에 남은 것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의 변주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은 서로 다른 방에 가둔 A, B 두 사람에게 죄를 자백할 것을 종용하는 데서 시작한다. A가 자백하고 B가 침묵하면 A는 10년형을 받고 B는 풀려난다. 반대로 B가 자백하고 A가 침묵하면 B가 10년형을 받고 A는 풀려난다.
A, B가 만약 서로를 믿고서 둘 다 침묵하면 모두 풀려난다. 하지만 A, B는 '이기적 혹은 경제적 인간'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한다. 결국 A, B는 둘 다 자백하고 모두 5년형을 받는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모두에게 해를 미치는 결과를 낳는 이 죄수의 딜레마는 냉전 시대 핵전쟁처럼 인류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보는 견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실제로 해보면 어떨까? 현실에서 이 게임에 참여한 이들은 이론과는 달리 더 많은 수가 협력했다. 이 책에 나온 더 흥미로운 사례도 있다. 심리학자 리 로스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약간 변형해, 한 집단에게는 '공동체 게임'을 할 거라고 말하고, 다른 집단에게는 '월가 게임'을 할 거라고 말했다. 결과는 극적으로 엇갈렸다.
공동체 게임을 한다고 들은 사람은 70% 정도가 협력을 선택한 반면에, 월가 게임을 한다고 들은 사람은 33%만 협력했다. '신뢰'나 '희생'을 연상시키는 '공동체' 또 '경쟁'과 '탐욕'을 연상시키는 '월가'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피험자의 반 가까이가 이타적 인간과 이기적 인간을 왔다 갔다 한 것이다.
이 실험의 또 다른 흥미로운 대목은 '30%의 비밀'이다. 공동체 게임의 유혹으로도 30%의 이기적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다. 월가 게임의 경고로도 또 다른 33%의 이타적 인간을 타락시키지 못했다. 이를 세상은 30%의 이기적 인간과 30%의 이타적 인간 그리고 언제든지 '이기심' 혹은 '이타심'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는 40%로 구성되었다고 해석하면 비약일까?
그렇다면, 포식자로 호시탐탐 나머지 70%를 노리는 30%의 이기적 인간을 통제할 방법은 없을까? 경제학자 아이리스 보넷과 브루노 프레이의 실험은 한 가지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만난 적이 없는 학생을 모집해 역시 A, B 두 그룹으로 나눴다. 그리고 A 그룹 학생에게 10달러를 준 다음에, 가지고 싶은 만큼 가지고 나머지를 B 그룹 학생에게 주도록 했다.
이론대로라면, A 그룹 학생은 10달러를 모조리 가져도 '양심의 가책'을 제외한 어떤 책임 추궁으로부터도 자유롭다. 하지만 놀랍게도 A 그룹에서 B 그룹에게 한 푼도 주지 않은 학생은 28%에 불과했다. (정말로 30%가 문제다!) 이런 결과를 염두에 두고, 보넷과 프레이는 실험을 변형했다. A 그룹 학생과 B 그룹 학생이 얼굴만 대면하게 한 것이다.
서로 힐끗 얼굴을 봤을 뿐, 그들은 앞으로 만날 일이 거의 없는 남남이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얼굴 한 번 마주봤을 뿐인데, A 그룹에서 B 그룹에게 한 푼도 주지 않은 학생은 28%에서 11%로 떨어졌다. 평균 금액도 10달러의 25%에서 35%로 늘었다. 보넷과 프레이는 이번에는 A 그룹 학생에게 B 그룹 학생의 전공, 취미 등 개인 정보를 알려줬다.
여전히 A 그룹 학생의 누가 얼마를 줬는지는 비밀로 붙여졌다. 하지만 뚜껑을 열었더니, 이번에는 A 그룹 학생 중에서 한 푼도 주지 않은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B 그룹 학생이 받은 평균 금액도 10달러의 50%로 늘었다. 서로 개인 정보를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30%의 이기적 인간을 이타적 인간 혹은 협력하는 인간으로 바꾼 것이다.
이런 실험의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경제학이 가정하는 '경제적 인간'은 없다. 아니, 있더라도 전체 인간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머지는 오히려 이타적인 인간이거나 혹은 타인과 협력할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다. 둘째, 이기적 인간 3분의 1조차도 구제불능이 아니라 적절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협력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그 동기야 어찌 됐든 통념과는 다르게 인간은 협력에 목매는 이타적 동물이다. 그러니 <프레시안>의 실험이 이토록 지지부진한 원인은 한국 시민들이 이기적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아직까지 이기적인 옷을 벗어던질 기회를 만나지 못해서다.
그렇다면, 프레시안 협동조합의 조합원 가입이야말로 혹시 그런 기회가 아닐까?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이타주의자의 뜨거운 협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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